질문은 확신을 썩지 않게 만드는 방부제이자 각성제다
확신은 부패한다. 질문은 방부제다
신념은 통념이고 고장 난 고정관념일 수 있다
노벨문학상을 탄 ‘심보르스카’가 수락 연설문에서 시인에게 중요한 건 “나는 모르겠어!”라고 무지를 인정하는 겸허한 자세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즉, 모든 걸 배우는 자세로 질문을 던지는 호기심으로 확신하는 신념도 통념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노력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신념에 가득 찬 사람보다 의심에 가득 찬 자를 신뢰한다”라고 말한 소설가 김훈의 주장도 일맥상통하는 메시지다. 질문으로 공격받지 않은 신념도 어느 순간 통념으로 전락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말이다. 과연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볼 수 있을까? 당연한 사실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져본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볼 수도 있지만 리처드 바크가 말하는 새는 갈매기라는 사실에서 주목하면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갈매기는 근시다. 근시인 갈매기가 높이 난다고 멀리 볼 수 있다는 신념은 통념에 불과할 뿐이다. 확신에 찬 신념이 통념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으로 공격을 받아야 한다.
선풍기에는 날개가 있어야 한다는 신념과 당연한 가정을 깬 출발점에도 의문을 품은 질문이 있었다. 선풍기에는 꼭 날개가 있어야 할까? 이런 질문이 선풍기에는 날개가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가정을 없애는 새로운 혁신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날개 없는 선풍기가 출현한 배경에도 당연함을 부정하는 질문이 있었다. 사진을 찍은 다음에는 기다려야 한다는 당연함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던진 질문 덕분에 세계 최초로 즉석카메라, 폴라로이드가 탄생한 까닭이다. “아빠 왜 사진을 찍은 다음에 기다려야 돼?” 호기심 어린아이의 질문이 혁신적인 제품을 창조하게 된 출발점을 마련한 것이다. 스테이플러에는 꼭 침이 있어야 할까? 당연함을 의심하는 수준을 넘어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침이 없는 스테이플러(Stapleless Stapler 또는 Strapless Stapler)가 개발되었다. 질문은 확신으로 무장된 신념이 고정관념이나 통념으로 부패되는 과정을 방지하는 방부제일 뿐만 아니라 각성제다.
다른 사람의 인사이트는 나에게 인스턴트 자극이다
내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의식 중의 하나는 왜 마스터리(mastery)에 이르는 길은 언제나 미스터리(mystery)일까?이다. 마스터리, 즉 경지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인 과정이나 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후속 세대가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해도 선각자가 이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의식은 후속적인 질문을 부른다. 경지는 한 번 이르면 변하지 않는 명사일까, 끊임없이 변하는 동사일까? 경지에 이른 사람의 노하우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쉽게 밝힐 수 없다는 점은 다른 연관된 질문을 계속 제기하게 만든다.
경지에 이른 사람의 비법은 왜 다 나에게는 편법으로 다가올까? 왜 경지에 이르는 맥락(context)은 언어적 표현(text)으로 다 담아낼 수 없을까? 왜 경지에 이르게 만든 모든 일상적 실천(Practices)이나 차이를 반복하는 연습을 일정한 단계나 절차로 이루어진 프로세스(process)로 처방할 수 없을까? 왜 처방된 프로세스대로 현장에서 실천(practices)이 일어나지 않을까? 콘텍스트와 텍스트, 프랙티스와 프로세스 사이에는 언제나 좁히기 어려운 간극이 존재하는 걸까? 그런 간극을 메우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인간의 학습으로 이런 간극을 좁히는 방법은 없을까?
엄마가 가르쳐준 프로세스나 매뉴얼(manual)대로 김치를 담갔는데 왜 엄마가 담근 김치 맛과 내가 담근 김치 맛은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 맛의 차이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매뉴얼로 만들 수 없을까? 왜 매뉴얼에 처방된 대로 매너가 나오지 않을까? 과거의 매뉴얼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예측 불허의 상황이 발생하면 또다시 매뉴얼을 제작해야 될까? 매뉴얼에 없는 현상이 나타나면 매뉴얼대로 하지 않고 기존 매뉴얼을 리뉴얼(renewal)해야 되는데 왜 사람들은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왜 다른 사람의 인사이트(insight)는 나에게 인스턴트(instant) 자극으로 전락하는 것일까? 인사이트와 인스턴트 사이에 어떤 노력이 개입되면 다른 사람의 인사이트도 나의 인사이트로 바뀌게 될까? 그렇다면 아웃사이트(outsight)를 바꾸면 인사이트도 바뀌게 될까? 생각을 바꾸면 그만큼 행동도 바뀌는 게 맞은 말일까? 아니면 거꾸로 행동을 바꿔야 생각이 바뀌는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어제와 다른 마주침(outsight)이 바뀌어야 어제와 다른 깨우침(insight)이 생기는 게 더 맞는 주장이지 않을까?
경지는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지대다
이런 연관된 질문은 나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현상을 움직이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힘이 무엇인지를 밝혀보고 싶은 관심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책을 지금까지 100권 쓰거나 번역했는데 책 쓰기 노하우를 알려달라는 사람이 많다. 물론 《책 쓰기는 애쓰기다》라는 책도 썼지만 경지에 이른 사람의 노하우는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하고, 매뉴얼이나 처방전 또는 비법으로 정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어떤 방법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복잡한 상황에서 위기를 탈출하거나 딜레마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간단한 처방전이나 매뉴얼을 지속적으로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지에 이르는 방법은 배우는 게 아니라 익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 스토리나 비법, 다른 사람의 성공지도에는 나의 성장지도가 없다. 아무리 훌륭한 성공 스토리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성공지도는 나름의 독특한 context와 practices를 반복하면서 자신은 알고 있지만 언어화시킬 수 없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 존재한다. 암묵적 지식은 자신은 알고 있지만 상대에서 언어로 표현하거나 문서화시켜 가르칠 수 없는 지식이다. 무수한 프랙티스를 다양한 콘텍스트에서 몸으로 체득한 결과가 암묵적 지식이다. 예를 들면 엄마의 김치 담그는 손맛이나 선일금고의 고(故) 김용호 회장님의 금고 여는 노하우가 암묵적 지식에 해당된다. 김용호 회장님은 전 세계 금고를 유형별로 무수한 실험과 반복되는 연습을 통해 금고 유형별 열리는 원리를 머리로 배운 게 아니라 몸의 미묘한 감각적 차이로 체득한 결과 금고여는 암묵적 지식을 체화시킨 것이다.
장자의 포정이야기에 나오는 매지어족(每至於族)도 암묵적 지식은 배우는 게 아니라 겪어보는 가운데 체득하는 지식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소를 수천 마리 잡았지만,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처럼 날카로운 이유는 뼈와 살이 붙어 있는 곳(族)에 매번(每) 이를(至) 때마다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방법이 다 다르다는 이야기다. 소의 뼈마디마다 살이 붙어 있는 틈이 있고, 그 날카로운 것이 틈 사이로 칼이 들어가니 너른 공간에 칼날을 놀리기가 넉넉할 정도로 경지에 이르렀다는 대단한 암묵적 노하우다. 하지만 자만하지 않고 소를 대할 때마다 포정은 어려움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경계한다고 한다. 안다고 자만한 상태에서 틀에 박힌 관성을 반복하며 매뉴얼의 처방전을 따른다면 포정의 매지어족은 불가능한 경지다. 경지는 설명할 수 없는 방문이 자주 일어나는 위대한 지대다.
경지는 무한한 욕망과 끈질긴 능력이 만든 이중주 합작품이다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체득하는 암묵적 지식은 ‘체험’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습득한다. 체험은 단속적이고 계획적이지만 경험은 연속적이고 우발적이다. 포정의 매지어족은 계획적이고 단속적인 체험의 반복이 아니라 우발적이고 연속적인 경험을 반복하면서 오늘의 경험을 성찰하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경험을 이어가면서 자기만의 매지어족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포정은 다른 사람의 정보를 참고 체험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연속적이고 우발적인 경험을 반복해서 그 누구도 모방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내러티브를 축적해서 자연스럽게 육화 된 경지에 이르렀다. 당연히 그 경지에 이르는 과정은 설명 불가능한 지식이며 배움이 아니라 몸으로 겪어보는 익힘으로 체득한 결과다.
포정은 흘러가는 시간을 일정한 스케줄에 따라 물리적으로 시간을 보낸 사람이 아니라 칼을 들이대고 뼈와 살 사이를 빠져 다니는 모든 순간을 순간적으로 성찰하면서 칼과 손끝이 소의 뼈와 살에 닿는 미묘한 감각의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해 보고 정리하는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크로노스는 남의 정보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경험을 통해 자기만의 서사를 구축하지 못하고 노골적인 남의 정보를 단속적으로 체험을 반복하는 시간이다. 경지에 이르는 사람은 모두 카이로스의 시간을 통해 몸으로 축적한 경험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 경지에 이르는 자기만의 암묵적 지식을 체득한 사람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언어에 매몰되어 관념적인 머리의 언어로 설명하지 않고 자기만의 문제의식과 신념과 열정이 담긴 몸의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자기만의 고유한 언어를 끊임없이 개발한다.
경지에 이르는 사람은 한시적이고 순간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삶보다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욕망으로 향하는 능력을 개발한다. 경지에 이르는 사람은 만족이 없다. 오늘보다 더 나은 전문성이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지향하며 꿈틀거리는 욕망의 물줄기를 따라 부단히 능력을 개발하는 사람이다. 욕망은 지금보다 더 나은 수준으로 나의 존재 자체를 심화하고 확장시키려는 적극적인 에너지이자 창의적인 원동력이다. 욕망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 언제나 미완성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오늘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의 수준으로 나를 끌어올리기 위한 존재의 심원으로 이끌고 가는 근원적인 동인이 바로 욕망이다. 경지는 무한한 욕망과 끈질긴 능력이 만든 이중주 합작품이다.
경지도 궁지가 만든 역전의 작품이다
경지에 이른 사람은 궁지에 몰렸던 사람이다. 지금은 긍지를 갖고 자기 분야의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도 한 때는 궁지에 몰려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한 방법개발전문가다. 다른 사람의 성공 스토리나 비법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자기만의 언어로 경험을 벼리는 가운데 자기만의 일생이론을 만들어나가는 지루하고 고단한 과정이지만 그 과정의 아름다움이 결과의 아름다움을 보장하는 명랑하고 행복한 길이 바로 코나투스를 근간으로 삶을 영위하는 방법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코나투스라는 위대한 개념으로 내 삶의 지향점을 근원적으로 성찰하게 만든 책이라면 마이클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은 코나투스대로 살아가면서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체득되는 암묵적 노하우의 정체를 밝혀준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적 지식은 사실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 담긴 ‘인격적 지식’이다. 모든 지식에는 그 지식을 창조한 사람의 성품은 물론 치열한 문제의식과 열정과 신념과 철학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주체의 헌신적 참여 없는 지식은 헌신짝에 불과하다. 따라서 객관적 지식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허상이고 관념이며 불가능 꿈에 불과하다. 코나투스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이클 폴라니가 말하는 인격적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며, 자신을 경지에 이르게 만든 원동력인 암묵적 지식의 실체나 정체를 자신은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폴라니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형식적 지식(explicit knowledge)과 대조되는 암묵적 지식을 부각했을 뿐만 아니라 초점식과 보조식을 연결시켜 암묵적 지식이 창조되는 과정을 적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경은 배경 덕분에 드러난 풍경이다
명시적 지식과 암묵적 지식은 각각 초점식(focal awareness)과 보조식(subsidiary awareness)에 상응한다. 예를 들면 망치로 못을 박는 사람은 망치로 내리치는 못대가리에 의식적으로 초점을 둔다. 못을 쥐고 있는 손을 망치로 내리치지는 않을까를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널빤지에 못을 똑바로 박기 위해서는 수많은 다른 동작들이 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망치로 내리치는 힘을 적당하게 줘야 되고, 그 사이에 못을 잡고 있는 손은 못이 삐딱해지지 않도록 못을 적당히 잡고 있어야 한다. 망치를 잡고 있는 오른손이 어느 정도 각도와 회전을 유지한 상태에서 못 상단 부분을 정확히 내리쳐야 못을 잡고 있는 손도 다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못이 널빤지에 똑바로 박힌다.
못을 널빤지에 박기 위한 모든 동작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못 박는 행동을 도와주는 보조식이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초점식은 명시적 지식이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못을 똑바로 박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인식을 보조식이라고 하며 거기서 탄생하는 지식을 암묵적 지식이라 한다. 암묵적 지식과 보조식의 도움을 받지 않는, 명시적 지식과 초점식은 없다. 전문가의 초점식은 수많은 변수들이 동시에 관여하면서 하나의 성취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완벽한 하모니의 결과다. 심지어 못을 박는 과정에서 호흡조절만 잘 못해도 망치는 정확한 초점을 잃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리칠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배경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본분을 다할 때 전경으로 드러나는 게 초점식이다. 전경으로 드러난 초점식은 보이지 않는 배경에서 관여하는 무수한 보조식 덕분에 빛나게 보일 뿐이다. 전경에 드러난 초점식의 아름다움은 배경에 관여하는 보조식 덕분에 드러난 아름다운 풍경이다.
질환은 ‘치료(curing)’의 대상이 질병은 치유 또는 ‘보살핌(caring)’의 대상이다
초점식과 보조식은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의 차이에도 어울린다. 질환은 ‘치료(curing)’의 대상이자 초점식이며 명시적 지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질병은 치유 또는 ‘보살핌(caring)’의 대상이자 보조식이며 암묵적 지식이다. “질병은 질환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경험이다. 질환 이야기가 몸을 측정한다면, 질병 이야기는 고장 나고 있는 몸 안에서 느끼는 공포와 절망을 말한다. 질병은 의학이 멈추는 지점에서,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단순히 측정값들의 집합이 아님을 인식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은 내 삶에도 일어난다. 내 삶에는 체온과 순환도 있지만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도 있으며, 이런 것들은 측정될 수 없다. 질병 이야기에 그 몸 같은 것은 없으며 오직 내가 경험하는 내 몸만이 있다”(28쪽).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에 나오는 말이다.
체온은 명시적 지식이지만 체온으로 느끼는 낙담과 기쁨, 그리고 슬픔은 모두 감정 언어로 번역해 낼 수 없는 암묵적 영역이다. 어떤 사람의 혈압 수치가 140에 90이라서 고혈압이라고 진단할 때, 고혈압은 질환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두려움이나 불편함, 불안감 같은 심리적 문제는 질병이다. 질환은 환자가 지금 당장 초점을 두는 초점식이라서 명시적 언어, 즉 수치로 표현이 가능한 데 반해 질병은 환자가 질환을 보고 느끼는 다양한 심리적 감정의 변주가 보조식으로 관여할 뿐이다. 혈압을 떨어뜨리기 위해 고혈압 약을 처방하는 의사의 진료는 치료에 해당하지만 고혈압으로 겪는 심리적 불안감과 두려움을 보살펴주는 의사의 진료는 치유다. 겉으로 드러난 증상과 질환을 일으킨 원인에 대한 치료는 초점식이고 명시적 영역이다. 대부분의 의사가 진료 대상으로 삼는 부분이다. 하지만 환자가 진짜 원하는 것은 초점식으로 드러난 객관적 수치가 아니라 그 수치가 환자에게 미치는 불안감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해소하고 질환을 받아들여 이겨내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북돋아주는 치유에 있다.
질문은 확신을 썩지 않게 만드는 방부제다
경지에 이르는 사람은 자신감과 확신에 차이 있지 않다. 끊임없이 나는 모른다고 가정하고 더 낮은 자세로 질문을 던져 배운다. 경지에 이르는 사람은 수많은 보이지 않는 보조식의 협업으로 보이는 초점식을 탄생시키는데, 그걸 전문성의 전부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배경에서 전경을 드러내주는 보이지 않는 영역의 힘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놓고 어제보다 더 겸손하게 배우려고 안간힘을 쓸 뿐이다. 모든 확신은 반드시 부패한다. 질문은 확신을 썩지 않게 만드는 방부제다. 나는 모른다고 자세와 내 생각도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열린 마음에서 호기심의 질문이 발동되고, 그 질문으로 낯선 관문을 열어젖히기도 한다.
이처럼 질문에는 호기심과 잘 모른다는 겸손함의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질문하는 사람 중에 호기심으로 알고 싶은 욕망 이전에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전제된 질문을 제기하는 경우, 그 질문을 알고 싶어서 제기하는 질문이라기보다 상대방의 주장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제기하는 질책에 가깝다. 목소리만 들어봐도 질문하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가 엿보인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기주장은 옳고 상대방의 주장은 틀렸으니 자기주장을 따르라는 충고나 조언에 가까운 질문은 기존의 앎을 발전시키는 디딤돌이 되지 못하고 새로운 앎을 잉태하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걸림돌이나 방해물로 작용한다. 질문을 통해서 발표한 주장의 난점(難點)을 물어보는 의문을 품거나 한계나 문제점이라고 생각되는 사안에 대해 의견을 물어보는 경우, 질문은 새로운 관문을 열어가는 가능성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질문을 통해 자기 입장을 강요하는 주장으로 상대의 주장을 비난할 경우, 두 사람 사이는 소통의 문을 열기보다 불통의 벽을 높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