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면 모범생을 기를 수 있고 가리키면 모험생을 기를 수 있다!
‘방법’을 가르치지 말고 ‘방향’을 가리켜라!
가르치면 모범생을 기를 수 있고
가리키면 모험생을 기를 수 있다!
기업에서 가르친 경험을 포함하면 가르치는 업에 몸담은 지 어언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방법을 가르쳐왔는가 아니면 방향을 가리키려고 노력해 왔는가? 가르치면 모범생을 길러낼 수 있지만 가리키면 모험생을 길러낼 수 있다. 모범생은 범생이다. 말은 잘 듣는다. 시키는 일도 곧이곧대로 잘 따라 한다. 하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알아서 추진해 보라고 하면 겁을 먹는다. 모범생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의식도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모범답안을 찾는데 열중한다. 틀 밖에서 새로운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거나 뜻밖의 질문을 하지 못한다. 학부모들은 자식이 커서 모범생이 되기를 원한다. 남이 걸어간 길, 안전한 길을 따라 별 탈 없이 잘 자라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버지가 의사면 자식도 의사, 판검사면 판검사, 교수면 교수 직업을 갖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전 과목 공부를 잘하는 선수가 되는 다양한 과정을 거친다. 모범생은 부모나 선생님의 칭찬을 먹고 자란다. 정해진 범위 내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 칭찬을 받고, 그렇지 기대하지 않은 일, 엉뚱한 일, 예상을 벗어나는 일을 하면 야단을 맞는다. 그래서 정상 궤도 안에서 별 다른 시련과 역경을 경험하지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
이에 반해서 모험생은 주어진 길, 남이 걸어간 길을 뒤쫓아 따라가는 과정에 별 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8번째 습관은 성공한 사람의 뒤를 따라가지 않는다. 모험생은 무엇보다도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 자신의 가능성을 발굴하기 위해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일, 가보지 않은 곳, 읽어보지 않은 책, 보지 않았던 영화 등을 보면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다. 색다른 도전을 즐기면서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스스로 찾아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는 가능성의 한계지점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모험생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재미있게 즐긴다. 그것이 비록 돈이 안되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험생은 오로지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모험생은 색다른 질문을 먹고 산다. 이전에 성취했던 결과도 지금 시점에서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묻는다. 모험생은 뜻밖의 결과를 찾기 위해 틀 밖에서 질문하고 관찰하고 탐색하는 일에 재미와 즐거움을 느낀다.
방법은 가르치고 방향은 가리킨다
방법은 가르치고 방향은 가리킨다. 방법을 가르치면 쉽게 따라서 할 수 있지만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는 자생능력은 점차 상실된다. 구체적인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방향을 찾으려는 의지를 희석시키는 장본인이다. 그래서 방법을 구체적으로 반복해서 가르치면 삶을 그르칠 수 있다. 방향을 가리키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방향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방향을 가리키면 스스로 방법을 찾아 자신을 스스로 키울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삶을 그르칠 수 있는 방법을 너무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지나친 보호막 속에 가두고 사육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육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생능력을 심어주는 활동이지만 사육은 가급적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약을 주입하는 활동이다.
‘가르치다’는 무엇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어 배우게 하다는 말이다. ‘가리키다’는 '가르치다'의 잘못된 표현이다. 예를 들면 ‘동생을 가리켰다’가 아니라 ‘동생을 가르쳤다’가 맞는 말이다. ‘가르치는’ 일에는 언제나 혼신의 힘과 열정을 쏟아부어야 한다. 성의 없이 대강 대충 가르치면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도 대강 대충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아무런 가르침을 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가르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가르치는’ 일은 자신을 던지는 일이다. ‘가르치는’ 일은 내용과 방법을 가르치는 일이기보다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나 가치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특정 내용에 대한 자신의 체험적 스토리, 거기에 담긴 철학과 신념, 특정 지식을 얻는 동안 고뇌했던 체험적 열정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치는’ 가운데 학생들이 받는 감동은 ‘가르침의 기교’에서 오지 않고 가르침에 임하는 스승의 ‘자세와 태도’에서 비롯된다.
‘가르치다’라는 말과 혼동될 수 있는 말이 바로 ‘가리키다’이다. 즉 ‘가리키다’는 손가락으로 어떤 대상이나 사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말이다. 무언가를 지칭할 때나 방향을 제시할 때 쓰는 표현이 바로 ‘가리키다’이다. 스승은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이다. ‘가르침’은 곧 ‘가리킴’이다. ‘가르침’은 곧 ‘가리킴’이기 때문에 잘 못 ‘가르친다’는 것은 곧 방향을 잘 못 ‘가리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치는’ 과정에서 스승이 범할 수 있는 최대의 실수는 제자들이 나아가야 될 방향을 잘 못 ‘가리키는’ 것이다. 스승이 있는 곳에 '道'가 있고 '道'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다. 길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는 것이다. 스승은 길의 방향을 가리킬 수는 있지만 그 길에 도달하는 방법은 제자들의 몫이다. 깨달을 ‘각’(覺)자를 보면 먼저 ‘배워서’(學) ‘본다’(見)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가르침’을 받고 방향에 대한 ‘가리킴’을 받으려면 먼저 배워야 큰 깨달음이 있다는 의미다. 궁극적으로 길을 찾고 길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사람은 자신이다.
잘 못 가르치면 그르친다
한편 ‘그르치다’는 「…을」 잘못하여 일을 그릇되게 하다는 의미다. ‘그르치다’는 한자로 ‘誤’(그르칠 오)라고 쓴다. 가르치면 긍정적으로 사람이 바뀌지만 그르치면 사람은 잘 못을 저지를 수 있다. 멍청한 ‘의사’ 한 명은 환자 한 명을 죽일 수 있지만, 멍청한 ‘교사’ 한 명은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스승이 ‘가리키는’ 길의 방향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방향을 잘못 가리키면 내용을 잘 못 ‘가르치는’ 것보다 그 파급효과가 훨씬 막대하다. 잘 못 가리킨 방향을 믿고 쫓아갔다가 엄청난 역기능적 폐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는 결연한 감행을 거듭하고 있는가? 내가 걸어가는 길의 방향을 가리켜주면 나 스스로 그 길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 나서고 있는가? 아니면 그 길을 떠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도 가르쳐주기를 기대하고 있는가? ‘가르침’과 ‘가리킴’의 궁극적인 성패는 ‘가르침’과 ‘가리킴’의 대상자인 제자 자신이다. 스승이 가르치고 가리킨 길 위에서의 성패여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가르치는’ 일에는 언제나 혼신의 힘과 열정을 쏟아부어야 한다. 성의 없이 대강 대충 가르치면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도 대강 대충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아무런 가르침을 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가르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가르치는’ 일은 자신을 던지는 일이다. ‘가르치는’ 일은 내용과 방법을 가르치는 일이기보다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나 가치관을 근간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특정 내용에 대한 자신의 체험적 스토리, 거기에 담긴 철학과 신념, 특정 지식을 얻는 동안 고뇌했던 체험적 열정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치는’ 가운데 학생들이 받는 감동은 ‘가르침의 기교’에서 오지 않고 가르침에 임하는 스승의 ‘자세와 태도’에서 비롯된다.
깨우쳐야 깨달을 수 있다!
‘깨달음’은 생각처럼 쉽게 오지 않는다. 깨달음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깨달음에 담긴 우리말 고유의 의미를 알면 이해가 갈 수 있다. ‘깨닫다’는 ‘깨다’와 ‘닫다’가 어우러진 말이다. ‘깨다’는 잠에서 깨어나고 꿈에서 깨어나고 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살아 숨 쉬며 움직이는 현실에 다시 눈을 뜨고 건너오는 노릇이다. 즉 ‘깨다’는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술에 취한 듯이 흐리고 멍청하던 삶에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 맑고 또렷한 본살의 삶으로 건너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닫다’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간다’는 뜻이다. 가야 할 곳, 삶의 과녁을 겨냥하여 힘껏 내달린다는 뜻이다. 결국 ‘깨닫다’는 흐리고 멍청하던 삶에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 맑고 또렷한 본살의 삶으로 건너와서(깨다) 곧장 삶의 과녁을 겨냥하여 내달린다(닫다)는 뜻이다. 깨닫게 하는 방법의 핵심과 중심에 언제나 올바르게 가르치고 가리키는 행위가 자리 잡고 있다. 깨우침을 통해 깨달음의 원동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언제나 낯선 생각이 잉태될 수 있도록 외부에서 제공하는 지적 자극이 필요하다.
지적 자극으로 일어나는 ‘깨닫다’는 ‘알다’와 질적으로 다르다.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보며, 입으로 맛보고, 코로 맡고, 귀로 들어가면서 부지런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 길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깨달음’은 노력한다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찾아오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깨끗하게 비워서 가만히 들여다보는 노릇뿐이라고 한다. 변덕스럽게 줄곧 날뛰는 ‘느낌’도 눌러 앉히고, 쉴 새 없어 허둥대며 헤집으려고 드는 ‘생각’도 잠재우고, 불쑥불쑥 고개 들고 일어서는 ‘뜻’도 잘라버리고, 그런 후에 그것들이 가라앉아 거울같이 고요해진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깨달음’을 만난다고 한다. 참된 ‘깨달음’에 이르려면 우선 ‘깨우침’을 쌓아야 되고, ‘깨우침’이 쌓이면 ‘깨침’에 이르고, ‘깨침’을 거듭 쌓다 보면 어느 날 느닷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깨우치다’는 다른 사람의 힘으로 깨어나는 것이지만 ‘깨치다’는 스스로 깨어나는 것이다. 즉 ‘깨우침’은 수동적․타율적으로 오지만 깨침은 능동적․자발적으로 온다. ‘깨치다’는 ‘깨다’와 ‘치다’가 합쳐진 말이다. 여기서 ‘치다’는 북을 치고 종을 치는 것처럼 ‘깨다’에 힘을 보태는 도움가지다.
깨닫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인생의 큰 ‘깨달음’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삶을 영위하고 싶은 생각은 누구나 갖고 있다. 문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지 않거나 별 다른 노력 없이 쉽게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과 기술을 알고 싶어 한다는 데에 있다. ‘깨달음’은 각고의 노력 끝에 불현듯 찾아온다. 안 들리던 귀가 어느 날 갑자기 뻥 뚫리는 것처럼 깨달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우선 무지몽매한 자신을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부터 무수히 깨지는 깨우침을 얻어야 한다. 자신이 깨지는 깨우침을 창피하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해서는 깨우침이 올바로 전달되지 않는다. 깨우침은 깨짐의 결과다. 깨지는 깨우침 덕분에 스스로 자신을 깨뜨리는 깨침이 찾아온다. 즉 깨침은 깨뜨림의 결과다.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몰랐던 사실을 알아가다 보면 깨침이 슬며시 다가온다. 깨침이 축적되다 보면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와 기뻐 날뛰게 만든다. 깨달음은 또 다른 깨달음에 의해서 무참히 깨지고, 또 다른 깨우침으로 자신을 부단히 깨뜨리다 보면 새로운 깨침이 온다. 이런 깨침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깨달음을 선사해 준다. 결국 깨우침과 깨침, 그리고 깨달음은 종착역이 없는 영원한 미완성 교향곡이다.
깨우치고 마주치는 가르침의 여정은 언제나 미(美)완성이다
깨우치는 가르침과 깨닫는 배움의 과정도 미완성이라야 희망이 자랄 수 있다. 이때 미완성(未完成)은 미완성(美完成)이다. 부족하고 갈길이 멀다고 생각하는 미완성의 겸손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기본 토대가 된다. 가르치는 사람은 스스로 부족하기에 더 배워야 된다는 겸손함을 유지하고, 배우는 사람은 언제나 초보자라는 생각을 갖고 진심전력해서 배움의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배워서 가르치는 것이고,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이다. 가르침은 배움을 전제로 한다. 가르치면서 학생들로부터 받는 피드백으로 깨우치고, 이전과는 다른 생각과 인식의 깊이로 깨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깨달음이 또한 가르침의 소중한 원료로 쓰인다. 깨달음은 언제가 가르침의 입력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가르침의 여정에서 깨달음이 발생하고 그 깨달음은 이전과 다른 깨우침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깨달은 결과가 있어야 가르침의 여정이 시작되는 게 아니다. 가르침은 뭔가 낯선 것과의 마주침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그 마주침이 일어나는 가르침의 여정에서 어제와 다른 깨우침과 깨달음이 선순환적으로 반복된다.
‘깨우치는’ 교수법이 있어야 ‘깨치는’ 학습법’이 따라온다. ‘깨우침’이 있어야, ‘깨침’이 따라오고, ‘깨침’이 있어야 ‘깨달음’이 따라온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박수도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다. 가르침과 배움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가르치는데 배울 의욕과 열정이 없다면 가르침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배우고 익히려는 학습 욕망의 크기만큼 배울 수 있을 뿐이다. 배움과 익힘에 대한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의 수준만큼 깨치고 깨우치며 깨달음의 수준도 높일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의 열정이 없는데 배우려는 사람만 의욕이 강하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현상이 될 수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도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밖에서 쪼는 사람은 스승이고, 안에서 쪼면서 알 밖으로 나오려는 사람은 학생이다. 알은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다만 어미는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의 과정을 도와줄 뿐이다. 가르침과 배움도 고장난명과 줄탁동기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물음표의 곡선이 직선의 느낌표를 낳는다!
어른이 되는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야 될 방향을 가리키며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가운데 판단착오를 줄이는 과정이다. 방향을 모색하고 나면 무엇을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방법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지혜는 혼자 터득하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때 뜻밖에 다가오는 통찰이자 직관이다. 틀어 박히면 틀에 박힌다. 틀을 벗어나 밖에서 안을 어제와 다르게 바라볼 때 틀을 깨는 깨달음이 전율하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깨달음은 온몸으로 부딪히고 때로는 넘어지면서 체득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불현듯 다가오는 지적 희열이다. 깨달음은 물음표의 곡선이 오랫동안 방황 끝에 찾은 감동의 느낌표다. 물음표가 품고 있는 곡선적 방황이 느낌표가 품고 있는 직선적 방향의 적확함을 결정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남이 가공해 놓은 또는 자신이 편집․가공한 지식을 완결된 형태로 제공하는 과정이나 기법이 아니다. 오히려 어른의 전달력은 가르치는 사람이 직접 체험했거나 남의 체험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이를 다시 자신의 문제상황에 적용하는 무수한 실천, 여기에 동원되는 아날로그적 고통체험이 공유․교감되는 과정이다. 어른의 전달력의 핵심은 먼저 도착하는 상쟁기술을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남과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는 상생원리를 터득하면서 옆을 보는 지혜를 체득하게 하는 데 있다. 때로는 정답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똑바로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서성거릴 필요가 있으며, 거기서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는 곡선의 여유로움과 함께 치열함이 더욱 필요하다. 그런데 작금의 전달력이나 스피치 기술은 학습자로 하여금 걸어보기도 전에 목적지에 놓여 있는 답을 찾아 주는가 하면 거기에 보다 빠르게 도달하는 효율적인 방법적 처방전을 제시하는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천천히 여유(裕)를 갖고 직접 자기 몸(體)을 움직여 그 답을 찾아보는 가운데 가슴 뭉클한 감동(感)이 따라온다. 몸으로 체험(體)하면서 깨닫고 느낀(仁) 지혜(智), 체인지(體仁智)만이 나를 체인지(change)하고 주변을 넘어 세상을 체인지(change) 할 수 있는 지혜다.
‘나와 함께 해보자 형 교육’이 진정한 어른의 전달력이다
수영을 배우려면 물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수영 강습장에서 수영이론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수영을 곧 잘하지는 못한다. 수영은 물에서 영법을 직접 몸으로 익혀야 실제로 할 수 있다. 물의 깊이와 물의 흐름, 그리고 바람과 물이 만나 요동치는 물결이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에서 직접 몸으로 모든 감각을 익혀야 한다. 뛰어들어 행동하지 않으면 의식은 그대로 잠자고 있다. 수영을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은 ‘나처럼 해봐’라고 강요하지 않고 ‘나와 함께 해보자’고 권유하고 조건을 만들어주며 말없이 지원해 준다. 나처럼 해보라고 설명하는 전달은 나처럼 하지 못하는 역기능을 양산할 뿐이다. 배움은 익힘이 따를 때 비로소 의미를 띠는 활동이다. 배우지만 실천 현장에서 몸을 던져 직접 익히지 않으면 관념적 앎에 머무를 수 있다. 몸이 느끼는 감각적 깨달음이 동반되지 않는 관념적 앎은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될 때에도 감동을 줄 수 없다. 자신이 겪어본 이야기가 힘을 받을 때 전달력도 상승작용을 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 함께 주어진 상황에서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반복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따르면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나처럼 해봐 형 교육’과 ‘나와 함께 해보자 형’ 교육이 있다. ‘나처럼 해봐 형 교육’은 가르치는 전문가의 전문성이 배우는 비전문가의 기준이자 정답이다. 전문가가 지니고 있는 전문성을 비전문가는 그대로 따라서 모방하는 데 전력투구한다. 전문가는 비전문가에게 어떻게 전문가의 전문성을 습득할 것인지를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 실무적 지침이 들어있는 매뉴얼을 제시하고 그대로 따라 할 것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서 ‘나와 함께 해보자 형 교육’은 전문가의 전문성은 비전문가에게 그대로 모방할 수 있는 노하우가 아니라고 규정한다. 나아가 전문가의 전문성은 전문가가 비전문가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쳐서 습득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전문가의 전문성은 비전문가가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상적으로 지향해야 될 기준이나 표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전문성은 한 번 축적되면 이상적인 상태로 작용하는 명사가 아니라 전문성이 탄생되는 맥락 속에서 시시각각 거듭나는 동사다. 따라서 나처럼 해봐 형 교육은 전문성을 동사로 보지 않고 명사로 보는 까닭이다. 명사로서의 전문성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진리처럼 작용하는 정체된 전문 지식과 스킬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함께 시도해 보고 모색해 보는 가운데 미지의 관문을 열어가는 나와 함께 해보자 형 교육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어른은 고정관념을 없애버리는 창조적 파괴자다
가르침이라는 말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일본의 경영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지는 《지식의 쇠퇴》라는 책에서 누가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친다는 teaching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teaching은 답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스승이 학생을 대상으로 무엇인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행위다. ‘나처럼 해봐 형 교육’은 이미 가르칠 정답이 명사적 형태로 정리되어 있다는 전제를 갖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은 정답보다 해답이 존재하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이다. 여기서는 정답이었지만 저기서는 오답으로 작용할 확률이 높다. 문제의 유형과 성격도 다르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적 맥락에 존재하는 변수나 미지수도 그때그때마다 다르다. ‘답이 없는 시대’에는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헤매는 방법 밖에 없다.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다양한 탐험과 시도를 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대안을 찾아 나서는 배움의 여정이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는 나와 함께 해보자는 가르침의 방법이다.
진정한 스승은 “나처럼 해봐”를 강요하는 자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해보자”라고 권유하는 자다. 내가 비록 상대보다 전문가적 자질이나 역량이 뛰어나다고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내가 체득하고 있는 전문성을 비전문가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칠 수는 없다. ‘나처럼 해보라’고 강권을 한들 나처럼 되지 않는다. ‘나와 함께 해보자’는 교육은 스승인 전문가가 제자인 비전문가를 어제와 다른 현명한 답을 찾아 어제와 다른 지식의 바다로 깊이 잠입하여 스승이 축적하고 있는 전문성보다 더 차이가 나는 지식과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격려하고 배려해 주면 촉진해 준다. 진정한 어른은 자신의 전문성을 자랑이라도 하듯 ‘나처럼 해봐’라고 지시하고 명령하며 나처럼 하지 못한 비전문가를 비난하고 질책하는 전문가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어른은 ‘나와 함께 해보자’고 참여를 독려하고 적극적인 탐구를 조장하는 촉진자다.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추구하는 답은 정보의 바다에 존재하지 않고 다른 지식의 바다에도 없다. 답이 없는 상황, 또는 답이 쉽게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전문가와 비전문가는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언제나 낯선 세계를 탐구하면서 어제와 다른 차이를 생성하는 새로운 지식을 부단히 만들어나갈 뿐이다. ‘나와 함께 해보자’고 권유하는 어른은 어제와 비슷한 정보의 바다에서 먼저 배운 스승이 발견한 정보와 동일한 정보를 찾으라고 강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어른은 기존의 앎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낯선 세계로 부단히 인도함으로써 기존의 고정관념과 인식의 한계를 스스로 느끼게 만드는 창조적 파괴자다. 그래서 진정한 어른은 후세대로 하여금 세계를 인식하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고 기존 인식의 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차이를 반복해서 생성하는 과정으로 빠져들게 만들면서 열정을 불태우게 만든다. 스승으로서의 진정한 어른은 제자보다 더 열심히 어제와 다른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는 정보의 바다, 어제보다 더 낯선 지식의 바다에 빠뜨려서 스승보다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창조할 수 있도록 부단히 격려하고 지원해 주는 인생의 멘토다.
진정한 어른은 어제보다 나아지기 위해 애쓰는 장인이다
리처드 세넷의 《장인》에 보면 장인을 어제와 다른 질적 도약을 위해 언제나 조금 더 잘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장인에게 100% 만족이란 없다. 언제나 어제보다 또는 전보다 조금 더 잘하려고 노력한다. 내일의 발전과 도약을 위해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노력하는 것이다. 내일이 되면 어제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 어제보다 더 애를 쓴다. 안간힘을 쓰면서 애쓰는 사람이 장인이다. 지금 현재 수준의 전문성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며 온몸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장인이다. 장인이 전문성의 축적과 심화를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과정은 그래서 영원한 미완성 교향곡이다. 장인에게 완성이나 완벽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완벽에 가까워지려는 노력과 완성하려는 안간힘을 통해 어제보다 조금 더 완벽과 완성에 이르려고 사투를 벌일 뿐이다. 과정의 아름다움이 결과의 아름다움을 보장한다는 진선진미(盡善盡美)가 바로 장인이 지니고 있는 미덕인 까닭이다. 진정한 어른의 전달력은 오늘보다 나아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애간장을 태우는 장인이다. 진정한 어른은 장인의 미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장인은 습관의 덫에서 빠져나와 관례나 관행을 거부하고 언제나 이전과 다른 시도를 즐긴다. 장인은 기존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면서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 잘 따라 하는 모범생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계에 도전하는 모험가를 육성하는 데에도 관심이 많다. 장인으로서의 진정한 어른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가치관에 얷매여 살지 않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세상을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모험생을 선호한다.
어른이 갖추는 전달력을 연마하는 과정은 마치 검도에서 무공을 닦는 3단계 과정인 수파리(守破離) 과정과 일맥 상통한다. 매 순간, 이전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과정 자체가 아름다운 미완성이다. 그 과정의 아름다움이 결국 결과의 아름다움을 가져오는 미완성(未完成)은 그래서 미완성(美完成)이 되는 까닭이다. 수파리의 첫 번째 단계인 ‘수(守)’는 ‘가르침을 지킨다’라는 의미로서 스승이 가르친 기본을 철저하게 연마하기 위해 지루한 반복을 거듭하는 단계다. 여기서 지루한 반복은 어제와 비슷한 단순 반복이 아니라 철학자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비추어 보면 어제와 다른 차이를 지속적으로 생성하는 다른 반복이다. 두 번째 ‘파(破)’는 원칙과 기본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개성에 따라 독창적인 응용 기술을 창조하는 단계다. 기본기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고유한 필살기를 개발하고 연마하는 단계다. 마지막 단계인 ‘리(離)’는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신기의 세계로 입문하면서 스승과 이별하는 단계다. 스승보다 나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단계로 도약하는 단계다. 기본기를 닦는 수의 단계를 거쳐 창조적 응용동작을 하는 파의 단계를 통과하면 비로소 자신만의 독창적인 비밀병기로 스승과는 또 다른 길로 입문하는 ‘리’의 단계로 이어지는 여정은 끝이은 없다. 영원히 순환하고 반복될 뿐이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차이를 발생시키면서 어제보다 조금씩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애쓰는 영원한 미완성 교향곡인 셈이다.
진정한 전달력은 지행합일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수파리처럼 검도의 3단계 연마 과정은 언제나 어제와 난이도가 다른 외나무다리를 건너면서 전문성의 수준을 높여나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방법은 외나무다리 반대편에서 멘토나 스승에게 머리로 배워서는 체득할 수 없는 육체노동의 산물이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데 외나무다리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방법을 아무리 구체적으로 열정적으로 가르쳐도 반대편에서 외나무를 건너소 싶은 사람은 따라오지 않는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나처럼 해봐’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해보자’다. 학생들과 인간적 신뢰관계(rapport)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말로만 주장하고 강조해서는 학생들은 따라오지 않는다. 서로 간의 믿음은 지행일치(知行一致)보다 지행합일(知行合一)에서 생긴다. 지행일치는 말한 다음 행동하는 것이지만 지행합일은 말은 곧 행동이고 행동이 곧 말이다. 지행일치가 언행일치를 강조하면서 행동하기 이전에 알아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지행합일은 삶 속에서 앎이 형성되고 앎이 곧 삶이 되는 경우다. 진정한 어른은 먼저 안 다음 행동하는 지행일치보다 일상적 삶 속에서 앎을 추구하고 앎이 곧 삶인 지행합일을 추구한다. 지행합일을 지향하는 스승으로서의 어른과 제자의 튼실한 인간관계 속에서 굳건한 신뢰의 꽃을 피워야 비로소 배움의 바다로 뛰어든다.
지행합일을 추구하는 인간적 관계 맺음으로써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질문과 분석(Ask and Analyze)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향해 과감하게 도전한다. 스승의 역할은 정답을 찾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올바른 질문을 통해 전대미문의 현답을 찾아 나서도록 아낌없이 지원해 주고 촉진해 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전과는 다르게 변신(transformation) 하는 과정을 통해 부단한 탈바꿈을 시도한다. 스승으로서의 탁월함은 삶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을 갖고 지행합일을 몸소 실천하는 과정에서 어제와 다르게 차이를 반복하는 데서 비롯된다. 스승의 임무는 현란한 어휘를 구사하면서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스스로 모델이 되어 제자의 잠재능력에 불을 지르는 데 있다. 앎과 삶이 일치되는 지행합일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가르침이자 가리킴이다. 열정(熱情)은 비교적 오랫동안 흠뻑 빠져드는 에너지이자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헌신적으로 몰입하는 집중력이다. 지행일치에서 앎과 실천의 간극이 커질수록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한 열정은 식어가지만, 지행합일에서 앎과 실천의 간극이 더 벌어지기 전에 안간힘을 쓰면서 사투를 벌인다. 왜냐하면 지행합일에서 지와 행은 별도의 독립적인 두 가지 활동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에너지를 주고받는 호혜적인 영향력이기 때문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지행일치가 아니라 앎과 삶이 모순되는 딜레마 상황에서 그 위기를 탈출하려는 지행합일에서 더 강력한 영향력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