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민의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군인가?》를 읽고
마케팅으로 넘버원 복사본(퍼스널 브랜드)을 양산할 것인가,
브랜딩으로 온리원 원본(휴번 브랜드)을 만들 것인가?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군인가?》를 읽고
이 책에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유독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낯선 생각으로 물꼬를 터주는 질문이 많이 등장한다. 현실에 안주하며 안락한 삶을 살다가 낯선 질문을 받으면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자신을 점검하고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를 특정한 가치에 비추어 반추해 본다. 개미가 지나가던 지네에게 난생처음 질문을 던졌다. “지네야, 너는 수많은 다리 중에서 앞으로 걸어갈 때 어떤 다리를 첫 발로 내딛느냐?” 이 질문을 받은 지네는 가던 길을 멈춰 서서 깜짝 놀랐다. 자신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질문은 가던 길을 멈춰 세우고 어디로 왜 가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탐문(探問)이자 심문(審問)이다. 탐문하거나 심문하는 질문을 받으면 안 보이던 관문도 열리고 없어도 창문도 생긴다. 그때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질문하면 우리의 정신도 젊어진다.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자신을 허기지게 만든다. 나에 대해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146쪽). 질문하는 동안은 동안(童顔)이 되는 까닭이다.
질문은 새로운 자기다움을 찾아 나서는 탐문이다
우선 이 책 제목부터 질문이다.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그냥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 구인가라?”는 질문은 논리적 이해 수준이 차이가 아니라 심리적 강도가 천지차이가 날 정도로 폐부를 찌르는 수준이 다르다. 2007년 4월 11일 교통사고가 나서 중태에 빠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던진 질문이 있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여기 있는 나는 누구지?” 이런 질문은 인간의 근본적인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평상시에는 그 누구도 잘 던지지 않는 질문이지만 정신 나갔다가 정신을 차리면 던지는 질문이다. 이 책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해서 “더 이상 숨 쉬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자기다움을 탐구하는 여정을 마친다. “네가 답을 맞히는 데만 욕심을 내기 때문에,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야. 답은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문이 뭐인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한 거다. 왜냐하면 틀린 질문에서 옳은 답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지.” 저자가 특별히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 나오는 대사를 강조해서 인용하는 까닭이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반복해서 강조된다.
“나는 어떤 코끼리를 그리며 살아왔을까?”라는 질문을 시작하는 이 책 서두에 두 마리의 코끼리가 등장한다. 한 마리의 코끼리에는 남이 정해준 순서대로 번호를 따라가며 그리면 되는 코끼리가 있고, 다른 한 마리의 코끼리에는 번호가 없고 점만 이어져 있다.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남이나 사회가 정해준 순서대로 동일한 코끼리를 무한 복제하는 동일성의 코끼리 그리기 패러다임이다. 반면에 점만 이어져 있는 코끼리는 퇴직이나 은퇴로 더 이상 일하지 않는 순간이 갑자기 다가오면서 직면하는 금시초문의 인생 패러다임을 대변한다. 갑자기 낯선 상황에 놓인 내가 찾는 자기가 과연 누구인지, 어디서부터 무슨 점을 어떻게 찍는 것인지가 불분명해지면서 극심한 불안감을 불확실성이 가중시키는 순간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전매미문으로 나를 엄습한다.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외에 필자가 품고 있는 필생의 질문은 “브랜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유니타스 브랜드라는 책 같은 매거진을 만들어 전 세계 수많은 브랜드니스(BrandNess)를 갖고 브랜드로 리더십을 만드는 브랜드십(BrandShip)을 발휘하며 브랜드웨이(Brand Way)를 가는 자기다움으로 우리다움을 구축하는 브랜드 생태계를 권민 대표만의 방식으로 정립해 왔다. 이미 2002년도 《새벽 나라에서 사는 거인》으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고, 2012년 《자기다움》이라는 책으로 한 번 자신이 품은 질문을 재확인한 다음, “나는 나답게 죽을 수 있을까?” “죽기 한 달 전까지 일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절체절명의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놓고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 제목의 자문에 심문하면서 탐문하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마케팅은 넘버원을 지향하고 브랜딩은 온리원을 추구한다
“브랜드란 자기다움으로 남과 다름이다. 브랜드란 비제품이 제품을 초월하는 것이다”(163쪽).자기다운 브랜드는 색다른 브랜드이고, 색다른 브랜드는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서 사랑과 존경심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브랜드다. ‘자기다움’은 ‘색다름’이고 ‘색다름’이 곧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아름다움’이다. 색달라지면 저절로 남달라 지는데 남달라 지려고 노력하다 자기 정체성마저 잃어버리고 다른 브랜드를 복제하며 복사본으로 생을 마감한다. 자기다워지려는 브랜딩과 남달라 지려는 마케팅은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넘버원을 추구하는 ‘마케팅’은 남과 경쟁을 거듭하면서 결국 다른 브랜드와 닮은 복제본을 대량 양산한다. 반면에 온리원을 추구하는 ‘브랜딩’은 어제의 나와 경쟁하면서 전보다 잘하려는 노력으로 대체불가능한 원본을 만들어간다. 마케팅은 남과 경쟁하면서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고 브랜딩은 어제의 나와 경쟁하면서 유일한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을 추구한다. 마케팅을 할수록 결국 동일성의 패러다임에 갇혀 서로 닮아가지만 브랜들을 계속할수록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면서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자기만의 컬러와 스타일을 갖추게 된다.
마케팅하다 사라진 상품은 유사 상품이라 사라져 없어져도 소설 《미키 7》에 나오는 “지금껏 죽어본 중에서 가장 멍청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현실로 구현시킨 복사본이다. “우리는 어째서 원본으로 태어나 복제가 되어 죽는가?”라는 에드워드 영의 물음처럼 차별화를 외치며 벤치마킹을 거듭해 왔지만 결국 벤치에 앉아서 복사본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안타까운 순간을 반복한다. 반면에 브랜딩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상품은 죽어도 죽지 않고 지속가능성을 넘어 영혼의 향기가 영속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간직되어 브랜드답게 살아가려는 욕망을 부단히 부추긴다. 할리데이비슨은 오토 사이클이라는 상품을 팔지 않고 일탈과 자유라는 욕망을 판다. 그래서 진정한 “브랜드란 비제품이 제품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일탈과 자유라는 비제품이 모터 사이클이라는 제품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한양대학교 유영만 교수라는 ‘퍼스널 브랜드’는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라는 ‘휴먼 브랜드’로 거듭날 때 비로소 유수한 대학교수라는 직업으로 다른 교수와 경쟁하지 않고 어제의 유영만이 가장 지식생태학자답게 차이를 반복하며 반전을 거듭하는 자기다움의 여정에 몰입하며 의미와 재미의 이중주를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한양대학교 유영만 교수는 퍼스널 브랜드이고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휴먼 브랜드다
“자기답게 사는 것은 자기 이름처럼 산다는 뜻이다”(266쪽). 한 사람의 ‘이름’ 값도 우여곡절의 삶을 살아가면서, 문제와 ‘씨름’하고 ‘시름시름’ 앓아가면서, 마음의 ‘고름’까지 생길 정도로 구구절절 사연을 간직한 ‘먹구름’에 담긴 ‘주름’을 펼치는 과정에서 생긴다. 지금의 ‘먹구름’이 미래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이름에 담긴 수많은 사연의 주름이 자기다움과 자기다움이 아닌 것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자기 이름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칭찬이 바로 “이 사람은 브랜드야!”(276쪽)라는 말이라고 한다. “퍼스널 브랜드와 휴먼 브랜드의 가장 큰 차이는 퍼스널 브랜드는 살아있는 개인을 위한 브랜드이고, 휴먼 브랜드는 자신이 죽어서도 영속 가능한 브랜드”(277쪽)다. 휴먼 브랜드는 브랜딩을 할수록 대체 불가능한 원본이나 나만의 스타일로 거듭나는 자기다움의 상징이고, 퍼스널 브랜드는 마케팅을 할수록 대체가 가능한 복사본이나 개인의 상품으로 닳아 없어지는 남다름의 특징이다. 당연히 퍼스널 브랜드는 경쟁상대와 부단한 경쟁을 통해 시장가치 1위를 차지하여 최고가 되는 것이고, 휴먼 브랜드는 다름과 차이를 반복하여 마침내 반전을 일으키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온리원이 되는 것이다. “휴먼 브랜드는 자기다움의 시작이자 완성”(263쪽)이 되는 까닭이다.
이 책에 따르면 마케팅으로 시장가치를 올리려는 상품은 남과 다르기 위해 자기다움을 추구하다 유사품으로 전락하며 상표로 인식(認識)된다. 하지만 자기다움으로 남과 다름을 증명하려는 브랜딩은 정체성을 인정(認定)하는 것이다. 이래서 “마케팅의 대상은 경쟁자이고, 브랜딩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107쪽). 마케팅은 100m를 똑같은 출발선성에서 치열한 각축전 끝에 1등을 가리는 전쟁이고, 브랜딩은 100m를 360도 방향으로 뛰면서 저마다의 자기다움으로 유일한 내가 되는 자신과의 경쟁이다. 100m를 똑같은 출발선상에서 골인지점을 향해 뛰면 모두가 경쟁상대지만 360도 방향으로 뛰면 유일한 경쟁상대는 내가 했던 어제의 방식이다. 100m를 같은 방향으로 뛰는 사람은 누군가 나를 조명해 주고 좋겠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이고, 100m를 360도 방향으로 뛰는 사람은 소명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이라 누군가 그 소명에 감명받고 호명받는 사람이다.
한양대학교 유영만 교수는 무수한 교수 중에 ‘조명’ 받고 싶어서 다른 교수와 경쟁하면서 차별화를 추구할수록 다른 교수와 닮아져 가며 이미지가 닳아 없어지지만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는 자기다움의 ‘소명’을 받고 유영만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유영만답게 대체불가능한 원본임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간다. 소명은 “오직 나만이 창조할 수 있는 가치이자, 내가 표현하지 않으면 다른 누구도 표현할 수 없고, 이름이 없는 그 무엇”(64쪽)이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의 ‘소명’에 충실할수록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로부터 ‘호명’을 받으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할수록 내 삶의 혁명을 일으키며 ‘운명’조차 바꿀 수 있다. 조명받고 싶은 사람에서 호명받고 싶은 사람은 자기만의 가치를 중심으로 의사결정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몸을 던진다. 그런 단어를 미국의 철학자 로티는 ‘마지막 단어(final vocabilary)라고 했다.
가치 중심으로 삶을 준비해야 삶아져서 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 어휘는 평상시에는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잠자고 있다가 결정적인 딜레마 상황에 빠져있을 때 결단과 결행 일보 직전에 눈앞에 나타난다. ‘마지막 어휘는 가장 나다운 색깔을 담고 있는 내 삶의 등대이자 나침반이기도 하다. 가던 길을 잃었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려주고 어디로 왜 가야 하는지를 고심하게 만들어주는 내 삶의 가치판단 기준이자 행동규범이기도 하다. 나의 마지막 어휘는 도전이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호기심의 발로이자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며, 능력을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내 삶의 ‘카니발’이 도전이다. 도전은 내 능력의 한계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능력의 심화와 확장 가능성을 알려주는 성장 발판이기도 하다. 도전은 나에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버팀목이기도 하다. 마지막 어휘를 중심으로 삶의 마지막까지 살아갈수록 나의 자기다움은 한계에 도전하면서 어제와 다른 나로 도약을 반복하며 완벽보다 완성을 향한 미(美) 완성 교향곡을 연주할 것이다.
내가 정한 가치판단 기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사회가 정한 가치판단 기준에 열심히 성과를 달성하며 살아왔지만 그 속에서 내가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음에도 우리는 자기 계발을 계속하면서 자아를 탕진하는 경험을 반복해오고 있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공사다망하게 사는 삶이 복사본의 인생이다. 뭔가 일이 꼬이면 리부팅을 하고 업무 효율을 높이며 더 많은 목표를 달성하지만 목숨은 점차 위태로워지는 까닭도 모른 채 오늘도 “삶을 준비해야 조직 안에서 삶아지지 않는 삶”(92쪽)을 살 수 있다는 잠재된 위험조차도 스스로 잠재우며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도 모른 채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가치는 무엇일까? 어떤 가치로 의미 있게 살 것인가? 자기답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109쪽) 이런 질문이 품고 있는 의미나 가치조차 모른 채 성과를 달성해서 받는 자리나 지위, 그리고 금전적 가치로 자신의 존재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멈춰 서면서 나는 지금까지 무슨 일을 왜 이렇게 열심히 하면 살아왔는지, 그런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근본적으로 의심하고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때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삶의 가치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저자에 따르면 나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는 한 가지 방법은 명언 500개를 모은 다음 그중에서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는 100개를 찾은 다음 그 100개의 명언이 나의 심장을 왜 뛰게 만드는지를 귀담아들어보면 심장박동을 가속화시키는 원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 “가치는 찾는 게 아니라 결정하는 것이다. 의미도 찾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것이다”(293-294쪽). 나의 심장을 두드리는 5개의 단어가 있다. 열정, 혁신, 신뢰, 도전, 행복이다. 열정적으로 어제와 다르게 생각하는 혁신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매일 5가지 키워드와 관련된 생각과 행동으로 작은 스토리(story)를 만들고 나만의 시각과 관점으로 해석한 서사(narrative)를 구축, 유영만의 역사(history)를 기록하며, 유영만답게 살아가는 유영만 웨이(way)를 만드는 삶이 자기답게 살아가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5가지 키워드가 바로 내가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결정한 가치이고, 그 가치가 만들어가는 스토리나 서사에 의미를 부여해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게 만든 삶을 살아갈 때 자기다움으로 남다름을 증명하는 삶이다.
자기다움으로 글을 써야 자기 삶을 담아내는 고유한 문체가 생긴다
“이 일은 나의 인생을 살게 만드는가? 이 일을 하는 것이 내가 진짜 사는 것인가?“(76쪽). 이런 질문 자체도 사치로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다. 2-30여 년 조직에서 근무했던 회사생활 장기복역수가 어느 날 맞이하는 냉엄한 현실은 남이 만든 의미의 틀에 갇혀 살아가는 재미도 잊은 채 능률복음으로 성과를 극대화하는 목표달성 기계로 살아온 것이다. 이런 사람들 앞에 자기다움으로 남다름을 증명하는 절박한 질문으로 자기 존재혁명 선언문을 발표한 책이 바로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군인가?》다. “하나의 원본이 떠돌고 있다. 자기다움이라는 원본이.” 자기다움이라는 원본이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살아 있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과 간극을 두면서도 끝없이 현실에 출몰하는 존재, 특이한 의미에서의 ‘존재’이다. 자기다움은 남다름이라는 현실과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실재로서, 현실과 간극을 두면서도 끝없이 현실에 출몰하는, 그래서 현실을 놀라게 하고, 위험에 빠뜨리고, 종국에는 무너뜨리려 하는 자기다움이다. 자기다움은 현실 속 인간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그래서 권민 작가는 말한다. “자기다움으로 하여금 원본이 일으키는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공산당 선언문을 패러디해서 자기다움으로 원본을 증명하고 증거 하려는 절박한 주장을 담아봤다.
“자기답게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의 지문을 남긴다”(111쪽). 지문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문체다. 톨스토이와 괴테의 문체가 다르고 스피노자와 니체의 문체가 다르다. 가장 자기답게 살면서 자신의 삶을 자기만의 언어로 벼리고 벼리는 가운데 대체불가능한 원본을 창작한 작가들은 모두 저마다의 삶의 지문으로 문체를 남긴다. 이 책의 저자처럼 나 역시 “글쓰기는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다움의 증거다”(145쪽). 내 삶을 능가하는 말도 글도 할 수 없다. 내가 살아본 삶만큼 삶을 바꾸는 글을 쓸 수 있다. “내가 쓴 글은 내 글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확히 나의 글이다. 왜냐하면 내 글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123쪽).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에 나오는 말이다. 내 글은 나답게 살아가는 길에서 깨달은 삶의 정수가 언어로 번역되어 건축되는 문장의 향연이다. 삶의 색깔과 스타일이 글의 문체로 각인되어 그 사람 고유의 지문으로 남는 까닭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명대사가 있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이 남긴 말이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라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이옵니다.” 글은 글로서 끝나지 않고 길로 연결된다. 그 길에 그 사람의 살아가는 삶의 지문이 아로새겨지기 때문이다.
자기 다운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을 알아가는 배움”(147쪽)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자신을 알아가는 배움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언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가, 나는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자기다움을 느끼는가와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면서 내가 어떤 일에 다리가 떨리고 어떤 일에 심장이 뛰는 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나의 실존을 위협하거나 슬픔을 주는 사람이나 일에 몸소 저항을 함과 동시에 나를 기쁘게 만드는 정서가 끌리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코나투스》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코나투스를 갖고 있지만 모든 사람의 코나투스는 저마다 다르다. 자기 코나투스가 품고 있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이 뒤따를 때 없었던 새로운 능력이 개발된다. 욕망과 능력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몰입의 통로가 개설되고 그 통로에 흐르는 명랑하고 행복한 에너지가 흐른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공사다망하게 살다가 다 망하는 삶, “자신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버리는”(148쪽) 선택과 동시에 “내가 아니면 할 수 없고, 나만 사랑하고, 나만 느끼는 그 무엇을 찾을 때까지”(148쪽) 자기답게 살아가는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을수록 가장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좋은 브랜드(생태계)는 자기다움과 우리다움이 어울리는 지식생태계다
자기답게 살아가는지 읽어보기 위해서는 자기다움 일기를 써야 된다고 강조한다. “자기다움 일기의 목적은 자기다움 읽기다. 자기다움 일기는 자기답게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한 일일 사용설명서와 같다”(186쪽). 권민 작가는 매일 새벽에 질문 노트와 자기다움 일기를 쓴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질문 노트는 인생을 멀리 보기 위한 오목 렌즈이고, 자기다움 일기는 하루를 인생이 초점을 맞추기 위한 볼록 렌즈”(188쪽)라고 한다. 질문노트는 오목렌즈로 멀리 있는 미래를 보기 위한 망원경이고, 자기다움 일기는 볼록렌즈로 가까운 현실을 관찰하기 위한 현미경이다.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미래를 내다보면서 동시에 현실을 들여다보며 단순한 생존차원의 삶이 아니라 생동하는 역동적인 삶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바로 자기다움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의미 있고 가치는 인생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다는 의미는 ‘나듦’으로 요약된다. 나이 들면서 자기다워짐, 나이 들면서 어른스러워짐, 아름답게 자기다워짐, 자기다움으로 어른스러워짐, 어른답게 자기다워짐, 자기다움으로 어른스러워짐 등으로 이해되는 ‘나듦’은 목적의식을 가진 진정한 나의 존재가 내 안으로 들어와 소명과 목적대로 살아가는 과정에 이루어지는 성숙한 자기다움이다. 나이를 먹었지만 어른답지 못한 사람은 ‘나이를 처먹은’ 사람이고, 나이가 들면서 자기 다운 삶, 자신의 소명을 증명하는 사람은 ‘나이가 든’ 사람이다.
소명에 따라 자기 사명을 다하며 자기다움을 증명하는 사람은 “자기다움의 완성을 위해서는 우리다움의 뒷받침이 필요(219쪽)하다는 점을 깨닫고 우리다움을 실천하기 위해 생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관계의 거울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며, 함께 나누는 순간들 속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간다”(214쪽). 자기다움은 또 다른 자기다움을 만나 우리다움으로 거듭날 때 홀로 만드는 자기다움에서 벗어나 함께 만드는 브랜드 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다. 브랜드 공동체는 “나다움과 너다움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느슨하게 어울릴 때, ‘우리’라는 충만함(322-323쪽)으로 넘쳐나는 생태계다. 자기다움 없이 우리다움은 완성되지 못하고, 우리다움 없이 자기다움은 불안하다. 자기다움과 우리다움이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 때 자기다운 브랜드는 우리다움 속에서 영속하는 브랜드 생태계를 이룩할 것이다. “좋은(진짜) 브랜드는 좋은 생태계”(164쪽)가 되는 까닭이다. 브랜드 생태계는 브랜드에 남긴 신념과 철학을 공유하고 저마다의 고유한 온리원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공진화하는 지식생태계다. “내가 우리다움으로 함께 하고 싶은 지식생태계는 ‘자신의 목적과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함께 공부하는 공동체’이다”(234쪽). 나만 절실하게 사랑하는 그것을 찾아 질문을 던져 놓고 배움과 익힘을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며 자기다움의 무늬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우리다움이 발현되고, 더불어 살아가는 영속적인 브랜드 생태계도 구축될 것이다. 다만 브랜드 생태계는 영원한 미(美)완성이라서 끊임없이 함께 공부하며 건설되는 지식생태계로 공진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