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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타자를 물들이는 ‘물감’을 갖고 있는가?

나는 왜 림태주 작가의 《오늘 사랑한 것》을 읽어버렸고, 읽고 말았을까?

당신은 스며든 공감으로 타자를 물들이는 물감을 갖고 있는가?:

나는 왜 림태주 작가의 오늘 사랑한 것을 읽어버렸고, 읽고 말았을까?

     

     


사람도 책도 한 눈에 반하는 책이 있다. 표지 디자인을 통해 책 속의 내용을 드러내려는 보이지 않는 욕망이 포착되고 제목이 제몫을 한다는 예감이 들 때다. 한 눈에 반하는 책의 또 다른 핵심은 저자 소개가 범상치 않을 때다. “육신을 헐어가며 썼고, 시간을 긁어가며 더디게 썼다”는 평범하지만 비범한 문장 속에 글을 쓰며 깊이 고뇌하는 저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표지와 제목에 반하고 저자 소개에 전두엽을 강타당하면 이제 프롤로그와 목차를 보면서 영혼을 갈아 건축한 문장 노동자의 숨결이 들리기 시작한다. 책을 펴자마자 멈출 수 없어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아니 순식간에 읽고 말았지만 읽다가 밑줄 친 문장에 한 동안 머무르다 다시 정신을 차려 읽고 또 읽다가 밑줄을 치며 마침내 다 읽고 말았다. “금방 나온 작품을 대하는 순간 그것이 뿜어내는 빛이 하도 눈부셔 눈멀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그것은 천둥과 같아서 귀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그것은 갓 삶아낸 감자거나 옥수수 같아서 손에 화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4쪽). 김윤식의 《혼신의 글쓰기 혼신의 글 읽기》 중에 나오는 말이다. 림태주 작가의 《오늘 사랑한 것》이 바로 이런 책이다. 고압전류가 흐르다 잔잔한 긴장감이 감돌기기도, 뒤통수를 치는 개념적 의미의 파장이 파도를 치다가 사소한 것에 대한 깊은 사랑과 사연의 밀당이 펼쳐지기도 한다. 서둘러 작가의 책을 읽고 싶은 까닭이다. 작가가 시인서가에서 서성거리며 지나가는 가을바람을 붙잡고 하소연하며 몸을 관통하며 남긴 흔적과 얼룩에서 주워 담은 문장 속의 비밀 화두를 풀어 헤쳐 염탐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나는 너에게 물들어 사랑이 되고, 너는 나에게 물들어 시가 된다


“길거리에서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14쪽)고 고백하며 스승 장그리니에가 쓴 《섬》에 부치는 글에 까뮈가 썼듯이 나도 《오늘 사랑한 것》이 도착하자마자 아무도 방해받지 않은 공간에서 몰래 문장 속으로 파고들어가고 싶었다. 스며들면 공감이고 물들이면 물감이다. 당신은 나에게 문장의 꽃이지만 나는 당신의 문장에게 꽂혔다.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가 맡은 구역을 염색한다. 구름은 하늘을 염색하고 봄은 숲을 염색하고 빛은 바람을 염색한다. 나는 너에게 물들어 사랑이 되고, 너는 나에게 물들어 시가 된다. 내가 쓰는 이 글이 누군가에게 스며든다면 이 글도 염색재료다”(112쪽). 작가의 책속 모든 문장은 저마다의 색깔로 염색되어 시간이 지나도 탈색되거나 변색되지 않고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다. “색과 색이 만나지만 삶의 내용은 결속되지 않고 생활의 표면만 착색되는, 스밈과 물듦이 없는 착색은 곧 벗겨진다. 햇빛에 탈색되고 바람에 갈라지고 습기에 들뜬다. 대개 시간의 발효 없이 집착과 조건으로 점철된 사랑의 모습이 그렇다”(114쪽). 긴 시간의 기다림이 만들어내는 숙성된 색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는 까닭이다.



기존 에 걸려 사망선고를 받다


작가는 뜨거운 문제의식보다 뜨거운 문제를 만나 자기 몸이 온통 화상을 입을 때까지 세상과의 불화를 의도적으로 시작, 그 불화에서 불협화음(不協和音)을 일으키며, 작가가 포승으로 묶인 ‘기존 앎의 암(癌)’을 치료하기 위해 항암치료도 거부한 채 햇빛에 털어 말리고 흩날리는 바람에 일부러 휘둘리며 구름 속으로 끌려간다. 기존 ‘앎’이 걸린 ‘암’에 회생 불가능한 사망선고를 내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앎의 자식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진통을 하루 일과로 부하지만 진지한 반복을 통해 의미의 반전을 꿈꾼다. 작가가 쓴 모든 문장은 당연한 것,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에 시비를 걸고 질문을 던지며 한눈팔다가 한 눈에 반한 ‘오늘 사랑한 것’에 대한 감각적 언어의 향연이자 의미의 식탁이다. 확정된 의미로 문장을 건축하지 않고 기존 단어의 의미와 결별을 선언하고 낯선 의미를 잉태시켜 기정사실에서 불편한 현실을 만나고 숨어있는 진실을 캐낸다. 그래서 작가가 쓴 행간에는 언제나 기존 사유체계를 전복하고 낯선 생각을 잉태시키는 혼란의 격전장이 펼쳐지고 《오늘 사랑한 것》이 안타까움과 처절할 정도로 간절한 사연을 품고 헤아릴 수 없는 사유의 깊이로 파고든다.


“시인은 읽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거예요”(38쪽). 이성복 시인의 《불화하는 말들》에 나오는 말이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작가는 읽는 사람을 다치게 또는 아프게 만드는 사람”이다. 내가 먼저 깨져야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으로 고정관념이나 기정사실의 폐부를 관통할 때 자만에 휩싸이고, 교만의 나락에서 춤추며, 오만의 극지로 향하던 나도 멈춰 서서 자기채찍질을 시작한다.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리고 딜레마 상황에 몰아넣어 웬만한 힘과 정상적인 사고체계로는 탈출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뜨거운 문제의식보다 뜨거운 문제를 만나 내 몸이 온통 화상을 입어야 세상과 불화가 시작되고, 그 불화는 불협화음(不協和音)을 일으키며, 나를 ‘앎의 암(癌)’으로 심하게 몰고 간다. 불현 듯 들이닥치는 갑작스러운 느낌의 소용돌이가 방향감을 상실한 채 헤매고 있을 때 몸 둘 바를 모르며 앎에 심한 생채기가 생긴다. 기존 앎이 암에 걸려 회생 불가능한 사망선고를 받아야 새로운 앎의 자식이 잉태되고 출산된다. 글은 그 순간 자기만이 포착하고 간파할 수 있는 어긋난 그리움과 설익은 간절함으로 세상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감춰진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독자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져 숨겨진의 의미와 이유가 무엇인지를 캐묻는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게 만든다.



시는 지시(指示)’하지 않고 넌지시’ ‘암시’(暗示)‘한다


시는 직설적으로 의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넌지시 알아차리게 만들거나 암시하고 있어서 시적 지칭 대상이 내포하는 의미를 반추하며 침묵의 언저리에서 잠시 맴돌게 한다. 시는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는 자극을 주기보다 질문을 던져 의문을 품고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도 의심하게 만드는 시심을 낳는다. 그래서 모든 “시작(詩作)은 작란(作亂)이라 했다. 이를 테면 혼란을 짓는 일이다”(372쪽).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 나오는 말이다. 시는 범주에 갇힌 생각을 끄집어 내 뜻밖의 세계로 데리고 가거나 타성에 젖은 고루한 통념을 세탁, 맑은 날 빨랫줄에 걸어 말린다. 시는 마비된 이성이 관념의 파편으로 떠돌다 간신히 거처를 마련하고 책 속에 잠자는 글로 표현하기보다 탕진된 자아가 일상의 궤도를 이탈하며 어둠 속을 횡단하다 불현 듯 날아드는 불나방의 위태로운 찰나의 순간에 주목한다. “사랑은 어설픔과 익숙함의 언저리에 존재”(16쪽) 하듯, 시도 찬란한 어긋남과 뜻밖의 마주침으로 감정이입이 될 뿐만 아니라 믿었던 삶의 좌표도 뒤흔드는 혼란을 낳는다. 넌지시 암시하는 일상의 사물이나 현상을 끌어안고 그것이 던져주는 대자연의 섭리 이전에 가슴으로 다가오는 경이로운 기적과 감동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우선 여러분들은 시인들의 언어를 들어야 합니다. 언어를 창조하고 완성하는 시인들 말입니다! 우리는 문학을 해부하듯 분석하기 전에 일단 호흡해야 하며 가슴으로 따뜻하게 느껴야 하지요…….먼저 감동하고, 그다음에 공부하시오!”(44-45쪽).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에 나오는 말이다.


작가는 디테일과 스케일을 동시에 보기 위해 산책을 하거나 정원을 배회할 때는 언제나 현미경과 망원경을 지니고 다닌다. 현미경으로 자세히 관찰하고 망원경으로 먼 곳을 관망한 다음 디테일이 포착한 섬세한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스케일이 품은 보이지 않은 이면의 구조나 관계를 꿰뚫어보는 투시경으로 지금 여기서 저기를 내다본다. “나의 육체와 지능과 감각을 써서 직접 해결하는 일이 많다. 빗방울 하나, 잎사귀 하나가 관능을 자극하고, 바람과 햇볕의 기분이 피부로 감촉되는 일이 경이롭다…….나는 마음이 작동하는 경로와 몸이 반응하는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5쪽). 사소함에 숨은 사물이나 식물의 급소를 포착하기 위해 다정한 담소를 나누며 그것만이 지닌 핵심과 본질에 닿으려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가끔 독자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귓속말을 하지만 그 목소리가 침묵을 가르는 우렁찬 물줄기 같고 스스로를 딜레마 상황에 빠뜨려놓고 난국을 돌파하려는 비장한 각오로 혼잣말을 뇌까리기도 한다. 작가의 경지는 늘 기지(旣知)에서 미지(未知)로 가는 여정에서 가까스로 구축되다 느닷없이 불어 닥치는 비바람과 혹한의 폭설로 수시로 무너지기도 한다. “걷다가 예술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문장에 옮겨 담았고, 그 글들이 나의 생애를 장식해준 파편들”(261쪽)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삶의 사소한 흔적을 소리소문 없이 축적하며 자신이 꿈꾸는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갈 때 내 삶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평범하지만 획기적이고 비범한 사건을 터뜨리고 싶다. 일면 2분 1 시간을 마련해보자는 의도였다.



어른이 되는 길에는 참고문헌이 없다


때로는 엇갈리는 심정을 무거운 심장으로 짓누르고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튀어 나오는 한 마디로 어렵게 단어들을 불러보아 힘겹게 한 문장을 쓰는데 한 나절이 더 걸린다. 몸이 세상과 만나 감각적으로 파고든 영감을 주워 담지 않고 마감시간이 다가와도 당황하지 않고 하루 종일 사무친 감정을 열정으로 달구거나 냉정으로 냉각시키지 않은 채 붙들고 안간힘을 쓰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몇 글자 붙잡고 밥을 짓고 빵을 굽듯 또 한 문장을 짓는다. 작가는 “걷다가 예술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문장에 옮겨 담았고, 그 글들이 나의 생애를 장식해준 파편들”(261쪽)을 연결시켜 《오늘 사랑한 것》을 완성한 듯하다. “고심 끝에 언어로 포착된 문장과 언어로 포착되지 않은 것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절치부심”(17쪽)했던 유영만의 《책 쓰기는 애쓰기다》도 작가들의 엇비슷한 언어와의 싸움장면을 그리고 있다. 박자감으로 움직이는 율동적인 춤보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취하는 엉거주춤 자세로 오늘도 변함없이 흐르는 시간의 줄기를 붙잡아 의미 요리를 조리법도 없이 만든다. 어렵사리 범상치 않은 느낌이 다가 오기에 알맞은 동사하나 만지작거리다 느닷없이 급습하는 부사 때문에 찰나의 순간에 다가온 애틋한 서글픔의 정수가 산산이 부서지고 허공으로 흩어진다. 좌절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절망을 얼마나 더 먹어야 천지도 개벽하는 눈부신 문장 한 줄 건질 수 있을까. “동사들이 침묵하는 건 부사들 때문”이라는 나희덕 시인의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 하신다’는 시로 위안을 삼는다. 동사(動詞)가 동사(凍死)당하는 까닭을 이제야 깨닫고 부사(副詞)가 부산하게 움직이지 못하게 동사 앞으로 부사가 다가서지 못하게 막아야 할지 고민 중이다.


딜레마의 난간에 당도해도,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기슭에 도달해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다시 펜을 잡는 손길을 믿는다. 작가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바람에게도 바람맞지 않고 달팽이처럼 기어가는 기다림의 시간에도 지치지 않는다. 조급함과 느긋함의 엇박자가 맞물려 돌아가는 와중에 간신히 한 문장 받아들었지만 작가가 느낀 감각의 촉수를 건드리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고 그저 엇비슷할 정도다. “어른이 되는 길은 각자의 길이라서 참고문헌이 없고, 가야만 하는 길이라서 험난하고 고단하다”(280-281쪽). 지금 당장 정답을 찾아 제시하기보다 누군가 겪어내는 험난하고 고단한 인생에서 같이 고민하고 풀어내야할 숙제를 짊어지고 오늘 사랑한 것을 곱씹어보며 먹이를 반추하는 소처럼 의미를 반추할 뿐이다. 뭔가 사무치게 그리움을 자극하지만 언어창고에 들어가 아무리 뒤져봐도 사무치게 몸으로 스며든 그리움을 붙잡을 문장은 건축되지 않고 헛손질만 허공을 가를 뿐이다. 정원의 한 포기 풀이 바람에 흔들려 쓰러질까봐 안타까움 한 움큼 짊어지고 한낮을 지켜봐도 마땅히 대안이 떠오르지 않을 때 몸이 먼저 아픔을 호소하며 몸져눕기도 한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나희덕 시인의 ‘파일명 서정시’라는 시의 일부다. 하루 종일 지운 문장과 간신히 살아남은 문장들 사이에서 장문의 삶을 번역하지만 마땅히 마음에 들지 못하고 애꿎은 햇빛만 타들어가는 갈증만 자극할 뿐이다.



작가는 언어를 불에 달구고 정념의 모루에 얹어 반복해서 단련한다


글을 짓고 책을 쓰는 과정은 언어와의 전면전, 특히 기정사실과 고정관념, 타성에 젖은 상투적인 말의 향연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일이다. 언어가 상투적인 관념어로 통념에 젖어 있으면 생각도 천박해지고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틀에 박힌다.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사선을 넘고 경계를 넘나든다. 시야에서 벗어나 변방이나 배경으로 내몰린 것들,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 뒤떨어져 있는 패배자나 낙오자, 떨어지지도 않은 채 매달려 있지만 불안한 지금을 살아가는 덜떨어진 존재를 다시 전면으로 부각시켜 언어적 번역 시장에 내세운다. 작가는 자신이 직면한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언제나 낯선 비유를 사용한다. 비유가 달라지면 사유의 관문은 무한한 가능성을 잉태하고 새롭게 열린다. 작가는 “언어를 불에 달구고 정념의 모루에 얹어 두드리고 식히고를 반복”(245쪽)하며 타성에 젖은 고루한 관념의 파편을 담금질한다. 행간과 행간의 사이는 “단어가 단어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쑤셔” 넣고, “뒤따라 온 문장이 앞 문장의 몸통에 뿔을 박아” 넣어 “생사를 넘나드는 축축한 긴장과 대치, 그 압축된 메타포(245쪽)가 예고 없이 곳곳에서 격발되는 개념의 전쟁터이자 느닷없는 사랑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어찌할 수 없는 해일에 가깝다. ”그리움은 수증기 같아서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지만, 외로움은 갈증 같아서 삶의 수분을 빼앗아 말라 죽게 만든다“(258쪽)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비틀리고 엇갈리다 평정을 찾아가는 안간힘의 글쓰기 향연이 펼쳐진다.


“나는 너에게 물들어 사랑이 되고, 너는 나에게 물들어 시가 된다”(112쪽). 이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이성범 시인이 《불화하는 말들》에서 말하는 “글쓰기의 불륜”과 “시를 임신하고 싶으면 모르는 것과 섹스”하는 장면이 느닷없이 급습해서 맨 정신으로 책을 끝까지 읽어나가기 어렵다. “가을의 우울은 생리통”(78쪽) 같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이곳에 안개가 다녀가면 담쟁이 덩굴이나 화살나무 잎들에서 푸른 웃음기가 빠져나가고 갱년기 같은 불그레한 반점이 번집니다. 푸름을 탐하는 안개의 욕망은 추하고 노골적이어서 앞산의 상수리나무들이 밤바다 문단속을 심하게 합니다”(78쪽)라며 가을의 낭만에 취하며 “그리움의 감도”(78쪽)를 한껏 드높인다. “찰나의 감탄이 아니라 육중한 감동의 서사”(121쪽)는 사계절을 시인의 서가에서 “육신을 헐어가며 썼고, 시간을 긁어가며 더디게 썼다”는 몸부림의 흔적이자 고뇌의 얼룩이다. “당신이 없는 데 날이 저뭅니다. 당신이 없는 데도 버젓이 저녁이 옵니다. 저녁이 와서 가로등이 켜지고, 가로등이 켜져서 길이 환해지고, 길이 환해져서 마치 내가 당신을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난감해집니다”(71쪽). 가로등이라는 단어에 서린 ‘사연의 무게와 깊이’가 ‘사유의 무게와 깊이’를 결정한다.



작가는 언어를 수레에 실고 언덕을 오르내리는 고된 노동자다


작가는 오늘도 변함없이 책을 읽다 가볍게 산책하며 몸속에서 아우성을 치는 두레박의 샘물 깃는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다정하게 품은 채 태연한 척 창공에 시선을 가둔다. 지나가던 소낙비가 불쑥 따듯한 햇빛을 보여준다고 해도, 비바람이 천둥번개를 몰고 오다 짧은 여유를 데리고 온다 해도 그늘진 우울을 보듬으며 차라리 한 문장을 지으려는 고된 노동을 선택한다. 누군가 지름길을 알려줘도 며칠 사이 겪어낸 시름이 만든 주름을 스스로 어루만지며 에움길을 따라 걸으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세상의 자극과 소리를 귀담아들으려고 애간장을 녹인다. 작가는 24시간 365일 오로지 자기만이 창작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작가란 쓰지 않는 때에도 쓰고 있는 사람이다”(205쪽). 작가가 아닌 사람은 글을 쓸 때만 작가가 되지만 진짜 작가는 쓰지 않을 때에도 쓰기를 구상하며 마음이라는 원고지에 계속 글을 쓰는 사람이다. “나에게 글쓰기란 암호 같은 것이어서 생의 비밀을 푸는 데 유용했다. 글쓰기 덕분에 나는 타인의 삶을 살기도 하고 세상을 정의해보기도 하고 이파리 하나 빗방울 하나가 되어 보기도 한다”(195쪽). 작가에 세상은 언제나 불가사의한 기호의 천국이자 암호로 묶여진 비밀의 화원이다.


불가사의한 미지의 세계는 한두 가지 열쇠를 자물쇠에 집어넣는다고 열리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난감한 상황에 직면한다. 그 곤란함이 껴안은 정감어린 표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급속히 휘발되어 날아가는 영감의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은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하루 종일 언어를 수레에 고 언덕을 오르내리는 고된 노동을 반복하지만 나의 느낌과 정서를 반영하는 언어 꾸러미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심함을 넘어 한탄이 감탄사를 대체한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언어적 의미를 채굴하기 위해 몸이 말하고 싶은 감각을 일깨우며 내면을 응시하고 세상 밖을 관조한다. 작가는 더 적확한 언어를 사용해서 지금 여기서 느끼는 감각적 자극과 각성을 표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욱해서 낱말의 계단에서 자주 미끄러져 무릎이 까진다”(230쪽). ‘미욱하다’는 말로 하는 짓이나 됨됨이가 매우 어리석고 미련한 자신의 우둔함을 드러낸다. “가을의 척추가 휘우듬하게 휘어진다”(199쪽)거나 “계절이 서붓 옮겨가고 있습니다”(71쪽)라는 표현에는 조금 휘어져 뒤로 자빠질 듯 비스듬한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소리가 거의 나지 아니할 정도로 가볍고 부드럽게 발을 내디디며 서둘러 겨울로 옮겨가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 사이  “수국은 음전하다”(168쪽)는 말로 곱고 우아하거나 얌전하고 점잖은 수국의 자태를 만끽하는 여유를 갖는다.



작가는 문장부호들 사이에서 국밥처럼 뜨끈한 삶의 자서전을 남기려 마침표를 미룬다


작가의 문장에는 세상을 향한 지적 분노와 적개심을 이성의 칼과 화살로 찌르기보다 낮은 자세로 세상을 응시하며 몸을 파고든 서글픔과 그리움의 정서가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쉼터 같은 평온한 위로와 담담한 희망이 수줍게 꽈리를 틀고 있다. “바람이 흔들릴 때마다 맺힌 목숨이 쏟아진다”(121쪽). 작가의 문장에는 힘에 겨워도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픈 마음에 전해주는 아스피린 한 알이 들어있다. “추상을 사유하는 힘은 떨어지고 피상을 믿고 따른다. 몸의 쾌락으로 영혼의 허기를 달래려고 한다. 관광은 여행의 노화다”(323쪽). 부서지는 파도가 새하얀 허망함의 거품을 내뿜어도 다시 바람에 실려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인 힘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토닥여주며 그대를 향하는 눈길과 손길이 어울려 달려가는 힘이 문장 속에 꿈틀거린다. 설익은 과일이 지천에 널려 있지만 그의 손길이 닿고 눈길과 마주치면 농익은 그리움에 무게가 실려 무겁지만 미더운 문장으로 변신, 우리 모두가 힘들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침묵의 환호성으로 행간으로 스며든다. 책의 곳곳을 읽다보면 가던 길이 막히고 갑자기 길을 잃어도 불안함과 불길함에 휘말리지 않고 머뭇거리고 서성거리면서도 갈 길을 다시 찾아보려는 작은 용기가 손짓을 하며 다음 페이지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끊임없이 언어의 쓰임새를 의심하고 언어적 점성으로 달라붙은 이웃항의 언어적 배치들을 창조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낯선 사유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한다. “인생이라는 원고지에 눈물방울 같은 느낌표와 웃음소리 같은 이음표와 밥알 같은 말줄임표가 찍힌다. 문장부호들 사이에서 대낮처럼 환하고 국밥처럼 뜨끈한 삶의 자서전을 남기기 위해 나는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고 있다”(22쪽). 아름다운 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국어사전에 들어 있는 낱말을 낱낱이 끌어내어 엉뚱한 조합을 하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깨달은 주관적인 통찰을 의미의 껍질로 만들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숨겨놓는다. 단어는 저마다의 삶의 무게감을 갖고 각자의 위치에서 힘들게 살아간다. 느낌표, 말줄임표, 마침표가 작가가 지닌 삶의 무게감을 담아내며 낯선 의미를 잉태한다. 단어의 논리적 의미보다 상황적 맥락의 의미가 더 언어적 내상을 앓는다. 단어에 서린 사연의 무게와 깊이가 사유의 무게와 깊이를 결정한다. 객관적인 의미가 도처에 표준화된 상태로 배열되어 있는 게 아니라 단어마다 겪어낸 삶의 고통을 특정한 상황적 맥락에서 오랫동안 견뎌낸 안간힘의 무게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어떤 단어를 써야겠다고 결심하기보다 마음을 내려놓고 한눈을 파는 방식 속에서 언어적 의미는 삶의 깊은 무게감을 갖고 스멀스멀 다가올 때 쏜살같이 붙잡아 문장의 한 모퉁이에 배치할 때, 이제껏 길들여진 사유의 틀을 벗어나 비상하기 시작한다.



단어는 개념이라는 의미가 세 들어 사는 집이다


흔히 지식인들은 감각적 깨달음이나 오감각으로 다가온 느낌을 기반으로 사유체계를 구축하기보다 날카로운 지성이나 차가운 이성적 사고로 딜레마 상황을 탈출할 대안적 논리를 구상한다. 빈틈없는 이해를 제공하고 논리적 짜임새로 쓰임을 증명하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않는 까닭이다.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도달한 사유에 맞춰 거꾸로 체험을 구성할 경우 작품은 파탄을 면치 못한다. 사유로부터 경험이 도출되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지 않고 옷에 몸을 맞춘 것처럼 어색하다. 몸에 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듯, 경험에서 사유가 뒤쫓아 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의 원리다"(228쪽). 김상욱의 《다시 쓰는 문학에세이》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고 논리적 사유를 건너뛴 채 감각적 느낌만으로 사유의 집을 건축하라는 말은 아니다. 럼주 같은 뜨거운 심장박동이 차가운 이성에 지배당해서 사유를 관통하는 감성의 꽃이 피기 전에 짓밟히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는 말이다. “똑똑한 머리 열 개가 따듯한 가슴 하나를 못 이긴다. 머리를 사용해야할 때가 있고, 가슴을 사용해야 할 때가 있다”(55쪽). 가슴이 하는 일은 “어깨 한 쪽을 빌려주고 한쪽 팔을 붙잡아주는 가만한 부축”(56쪽)이라고 한다. 몸의 언어가 머리의 언어를 지배할 때 전두엽에는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는 사유의 폭풍이 일어나면서 온몸을 급습하는 열기가 격렬한 광풍을 일으키며 핏줄기를 타고 끝없이 흐르는 위력이 펼쳐진다. 출혈을 일으키는 독서의 위력은 두 눈으로 목도한 현실의 부조리를 조리 있게 설득할 수 있는 내공으로 남고, 무겁게 짓누르는 한낮의 짙은 우울(憂鬱)도 가을날의 참을 수 있는 우수(憂愁) 정도로 치부할 수 있게 만든다.


작가는 관성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도 물음표를 던져 따져 묻는다. 예를 들면 과연 주어는 주체적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을 찾아낸다. “주어는 안타깝게 전혀 주체적이지 못하다. 술어가 주어를 부리고 흔들고 좌우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 이것은 주어의 고독이고 운명이다. 술어가 행동하고 술어가 정의하고 술어가 묘사한다. 주어는 술어에 따라 작동되고 설명되고 명명된다”(240-241쪽). 전혀 다른 의미로 재음미된 주어가 이끄는 문장은 주어의 술어 종속성을 아낌없이 발가벗긴다. 이렇게 건축된 문장은 다른 문장과 단락으로 구분된다. “단어는 개념이라는 의미가 세 들어 사는 집이다”(229쪽). 단어란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의 확정’이 아니라 ‘의미의 그림자’ 혹은 ‘의미의 윤곽’이다(229쪽). 의미는 논리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상황적-맥락적으로 의미의 그림자나 윤곽이 결정된다. 똑 같은 단어가 어떤 상황적 맥락에 따라서 쓰이는지에 따라 의미는 확정되지 않고 열린 가능성을 품고 계속 미끄러진다. “언어는 안개다. 모호하고 불완전하다”(237쪽). 비트겐슈타인도 언어는 의미가 아니라 사용이라고 한 까닭이다. “나는 내가 고른 언어다. 다양하게 말하면 다채로운 내가 되고, 다층적으로 말하면 은유하는 내가 된다. 표현한다는 것은 나의 어떤 단면을 보여줄 것인가를 선택하는 행위다. 선택의 폭이 곧 내 세계의 지분이고, 나의 세계는 표현된 범위로 제한된다”(117쪽). 내가 사용하는 단어가 나의 이미지를 미지의 사람들에 전달하는 일종의 광고판인 셈이다. 나의 이미지를 바꾸려면 내가 선택하는 언어를 바꿔야하는 까닭이다.



작가는 어설픈 영감과 설익은 언어조합에서도 상상력을 잉태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세상을 먼발치서 관조하거나 관망만 하지 않고 관심을 갖고 관찰하면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관능적인 힘과 에너지의 출처를 캐묻는다. “지금을 벗어나 먼데를 꿈꾸는 글이 아니라 여기의 깊이에 빠져드는 문장”(6쪽)을 쓰려고 노력하는 까닭이다. 쇠락되어가는 육신이지만 마지막 남은 안간힘을 쓰며 심장 속에 박힌 머리를 흔들어 깨우며 다시 쓴다. 삶은 쓰지만 삶을 쓰는 까닭이다. 늘 낮은 자세로 세상과 만나기 위해 애간장을 녹이고 반성을 넘어 깊은 성찰을 통해 통찰의 벽을 넘어서려도 또 얼마나 애쓰기를 반복했던가. 김소연 시인은 《마음 사전》에서 설렘을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308쪽)으로, 애틋함을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이 녹아내릴까 봐 안타까워하는 것”(309쪽)으로, 야속함을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이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309쪽)이라고 정의한다. 지루한 자기응시와 대상이나 사물에 대한 웬만한 상상으로는 나올 수 없는 안목과 혜안의 정수가 깃든 문장이다. 불현 듯 다가온 익숙한 단어지만 자기들만의 의기투합으로 기막힌 문장을 가끔 데려온다. 하지만 써놓고 보면 여전이 타성의 늪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서투른 영감의 증표들이다. 그래도 가끔씩 위안을 얻는 원천은 어설픈 영감과 설익은 언어조합이지만 우리말의 위력에 기대어 몇 글자 적어본다. 천만다행으로 그 백지위에서 위력을 가늠할 수 없는 상상력의 돌풍이 불 때가 있어서 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쓰면서 쓰임새를 단련한다.


하지만 국어사전에는 설렘을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림”으로, 애틋함을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함”으로, 야속함을 “무정한 행동이나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이 섭섭하게 여겨져 언짢음”으로 정의한다. 결국 설렘은 두근거림, 애틋함은 애가 탐, 야속함은 언짢음으로 정의하는 데 두근거림과 애가 탐, 그리고 언짢음을 다시 찾아봐야 하는 단어 반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그 뜻을 ‘감(感) 잡기’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정의되어 있다. 국어사전의 낱말 풀이나 개론서적의 개념정의에 머물러 있는 한 고통으로 새겨진 삶의 얼룩은 나만의 언어적 무늬로 거듭나지 못한다. 감이 오지 않아 찬이슬을 맞으며 새벽녘을 향할 때 시린 가슴을 녹이는 사케 한잔을 마셨더니 온몸에 나른한 열기가 퍼지면서 뼈와 살 사이로 나른함이 소리소문 없이 스며든다. 그 사이 가로등마저 기운이 떨어진 듯 까만 밤을 밝히다 희미하게 깜빡거린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지만 스치는 찬바람에 술 한 잔 건네며 받을 수 없는 전화인지 알면서 하소연을 실어 보낸다. 꿈꾸던 혁명은 마침내 배반으로 앙갚음을 하고 기다림의 끝은 변심한 시심만 맴돌 뿐이지만 삭막한 사막에서도 사유의 적막은 여전히 막막함을 견뎌낸다.



작가의 글은 사유가 느낌에 붙잡혀 머리가 심장으로 들어가 남긴 문장이다


1619년 겨울 어느 날 데카르트가 꾼 한 꿈에 두 권의 책이 등장하는데, 한 권은 백과사전, 다른 한 권은 시집이었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데카르트가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한다. “마치 부싯돌 안에 불의 씨앗들이 있는 것처럼, 우리들 안에는 학문의 씨앗들이 들어 있다. 철학자들은 그것들을 이성을 통하여 추출한다. 시인은 그것들을 상상을 통해 끄집어내고 그래서 그 불의 씨앗들은 더욱 더 찬연히 빛난다”(133쪽). 김상환의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에 나오는 말이다. 비록 먼 훗날 데카르트는 예술적 상상력도 논리적 이성의 지휘와 지배를 받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 시인보다 철학자의 우위를 주장했지만 꿈에서나마 시인들의 예술적 상상력이 발하는 빛의 찬란함을 칭송한 것이다. 시인은 “감각으로 사유하는 종들이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며 “환해질수록 짙어지는 어둠”을 볼 수 없는 빛을 상상한다. 작가의 글은 가슴이 머리로 들어가 논리와 이성이 재단한 산물이라기보다 머리가 심장으로 들어가 사유가 느낌을 파고들어 남긴 문장이 심장에 아로새겨져 생신 부산물에 가깝다. 산물없이 부산물도 없지만 산물을 능가하는 부산물이 우발적 마주침으로 불현 듯 붙잡히는 깨달음의 문장을 낳는 경우가 많다. “사유를 건너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까지 흔든다”(54쪽).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 나오는 말이 이 시점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에 따르면 “타자는 존재론적으로 확실하지만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50쪽). 마찬가지로 사랑도 존재론적으로는 확실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모호하다. 어디에나 사랑은 존재하지만 그 사랑의 의미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한다. 사람이 사랑하는, 또는 사람을 사랑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사랑이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는 여전히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사랑이 인식론적으로 모호한 까닭은 사랑의 경험적 의미를 언어로 담아내기에는 감정의 파고는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게 파고드는 정서적 공감의 연대관계가 광범위하고 드넓어서 어떤 논리적 설명도 사랑의 감정과 정서를 100%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혁명이자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변명이 언제나 변주곡을 울리며 긴장과 파장을 소리 없이 허공에 날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 사랑도 기꺼이 항복 선언을 하면서 내 뱉은 말도 있다. 바로 이성복 시인의 ‘사랑은 사랑만을 사랑할 뿐’이라는 시에 나온다. “사랑은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할 뿐, 사랑은 사랑만을 사랑할 뿐”이다. 사랑은 사랑스러운 걸 사랑하는, 사랑만을 사랑할 뿐이라는 동어 반복적이지만 사랑의 의미를 사랑 자체만으로 설명해내려는 의도와 기적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의미를 사랑이 시작되면 일어나는 변화에 비추어 짐작하고 상상해볼 수 있다. 사랑이 시작되면 평소와는 다르게 질문이 많아진다. 사랑하는 대상이든 사람이든 사랑이라는 관심권역에 들어오면 사랑하는 존재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이 폭증한다. 그래서 정희진 작가는 “사랑의 끝은 질문이 없어진 상태”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낯선 기호를 해독하려는 집요한 노력이다. 누군가 또는 뭔가를 사랑하면 호기심이 증폭되고 질문이 쏟아진다. 저건 무슨 의미이지, 왜 지금 저게 나에게 다가오는 거지, 수줍은 듯 하지만 안타까운 표정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거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은 온통 낯선 기호가 호기심의 물음표를 품고 끊임없이 발신되는 질문 생산지다. 사랑은 스며듦의 무게다. 스며든 사연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사유의 깊이도 덩달아 깊어지지만 그 사유가 사랑을 이어가는 데에는 또 다른 방해공작을 할 수도 있다. 사랑은 사유 대상이 아니라 겪어보는 감각적 확신과 대책 없는 직관적 편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랑을 사유하는 순간 사랑은 사랑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어요”(82쪽)라고 말하는 까닭이며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은 이해할 수 없고 이해가 되지 않는 영역”(83쪽)이라 항변하는 이유다. “사랑은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느끼고 견디고 욕망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옳고 그것만이 옹호됩니다”(84쪽). 사랑은 사랑할수록 이해가 불가능한 사람들의 사연이다.



사랑은 선()해석의 커튼을 찢는 예술이다


밀란 쿤테라 《커튼》에서 주장한 “소설은 선(先)해석의 커튼을 찢는 예술”(127쪽)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즉 “사랑은 선(先)해석의 커튼을 찢는 예술”이다. 사랑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삶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연극이다. 변방의 배경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전경으로 드러나면서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펼쳐진다. 지금까지 나를 지배해왔던 모든 해석적 틀이 깨지는 아픔이 동반된다. 하지만 선해석의 커튼을 걷어버려야 보이지 않았던 낯선 세상에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새로운 주연 배우로 등장한다.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라는 철학자가 한 말이다. 사랑에 빠진 나와 그 사람만이 주인공이고 나머지는 다 조연인 세상이 펼쳐진다. 사랑은 이렇게 숙명적으로 받아들인 불가사의도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며 운명조차 바꾸는 쿠데타, 즉 혁명의 깃발이 가슴 속에서 나부끼며 심장박동을 가속화시키는 사건이다.


"이타심은 이기심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이타심이 아니다." 황지우 시인의 《게 눈 속의 연꽃》에 나오는 말이다. 남은 도와주고 싶은 이타심은 결국 자신이 기쁘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 남을 도와주려는 이타심이 생긴다. 타자를 향한 사랑으로 내가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이타심은 결국 이기심이라고 한 것이다. “인간의 지능은 이기심의 발로이며, 인간이 어떤 이타적 사랑도 이기적인 자기애의 한 형태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60쪽).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다. 내가 그로 인해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주는 기쁨 덕분에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대상에 대한 애정이 생긴다. 기쁨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랑에서 비롯된다. 알면 사랑하기보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해보자. 궁금한 점도 많아지고 질문도 많아진다. 더 알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알고 싶지 않다. 메리 올리버는 《휘파람 부는 사람》에서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은 두 가지 능력이 아니라 한 가지 능력이다. 사랑하면 질문이 많아진다. 사랑하지 않으면 질문도 없어진다. 도종환 시인의 ‘가구’라는 시에 보면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사랑이 식으면 가구처럼 같은 방에 존재하지만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상대를 알고 싶은 욕망도 사라진다. 사랑이 가구가 되면 서로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사랑이 가구가 되면 관계는 무너지고 경계가 생긴다.


이기주의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는 알랭 바디우의 통찰은 사랑의 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안목을 제공한다.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이기주의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 사랑의 주된 적, 내가 쓰러뜨려야만 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차이에 반대되는 동일성을 원하는 차이의 프리즘 속에서 걸러지고 구축된 세계에 반대하여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 하는 자아입니다”(71쪽). 알랑 바디우의 《사랑예찬》에 나오는 말이다. 대체로 사랑의 적은 밖에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다른 조건들, 예를 들면 더 멋진 그녀, 더 부자인 사람, 보다 괜찮은 외모다. 또는 더 근본적으로 질투심으로 가득한 나머지 내 사랑을 위협하는 제삼자인 그녀다. 예를 들면 보다 매력적인 그녀, 보다 말 잘하는 섹시한 그녀, 보다 안목과 혜안이 뛰어난 그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사랑을 무너뜨리는 것은 바깥의 비교 대상이 아니라 결국 다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펼쳐지고 이전과 다른 관계의 깊이가 서로에게 새로운 앎의 깊이로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타성에 젖어 관성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는 순간, 철벽 안에 갇혀 고정된 채 ‘자아’만 바라보는 이기주의는 결국 새로운 변신의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 채 나 자신은 물론 나와 너 사이에 싹트는 우리들의 사랑을 틀어박히게 만든다. 결국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아가 내 자신의 정체를 정체시켜버리는 강력한 적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탄생한다.



오늘 내가 사랑한 것들이 나의 실존을 증명한다

     

김사인 시인의 ‘늦가을’이라는 시에는 “사랑은/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호기심의 물음표보다 원래, 물론 그렇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마침표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가 정답이라고 믿는 신념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에게 정답은 다른 상황에서도 적용하고 복제 가능한 재생산의 대상이지만 타성을 거부하고 고정관념을 파괴하며 어제와 다른 호기심을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은 습관성 질문으로 빠지려는 유혹 자체를 거부한다. 나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을 위해 스스로의 심장에 꽂힌 의미를 채굴하기 위해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나의 목소리를 언어로 번역한다. 자칫 갇히기 쉬운 기존의 언어사용 방식이나 일반화된 집단적 공통감각의 틀에 빠져 언어적 점성의 덫에 걸리지 않으려고 사투를 벌인다. 매미는 맴맴으로만 울지 않고 귀뚜라미는 귀뚤귀뚤 로만 소리 내지 않는다. 책상위에 책은 언제나 놓여 있지 않고 책상과 낮은 포복 자세로 누군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릴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언제나 언어적 ‘타성의 덫’에 걸리지 않으려고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세상의 소리를 느껴보기 위해 ‘감각의 닻’을 풀고 대신 스쳐지나가는 바람의 언어도 잠시 쉬었다가는 ‘감각의 돛’을 드높여 보려는 안간힘을 쓴다. “걷다가 예술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문장에 옮겨 담았고, 그 글들이 나의 생애를 장식해준 파편들”(261쪽)이다.

“걷다가 예술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문장에 옮겨 담았고, 그 글들이 나의 생애를 장식해준 파편들”(261쪽).


“오늘 내가 사랑한 것들이 나의 실존을 증명한다”(17쪽). 오늘 내가 하루를 살았지만 사랑한 게 없다면 나는 흘러가는 물리적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낸 것이고,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놓고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사랑의 순간을 만끽했다면 나만의 심리적 카이로스 시간을 보낸 것이다. 사랑이 시작되면 보이지 않았던 것도 보이기 시작하고, 한계나 불가능이라고 간주했던 장벽도 새벽을 잉태하며 도전이 시작되며, 뜻밖의 가능성을 믿고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사랑은 익숙한 출발의 반복이 아니라 낯선 시작의 반전과 함께 온갖 걱정을 격정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늘 시작하고 출발하지만 사랑은 타성에 젖은 동일성을 반복하지 않고 다름과 차이를 양산하며 엇갈리지만 지금 살아가는 삶의 정도와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절묘한 차이 속에서 오늘도 힘겹게 하루를 보내는 일용할 양식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근원에 이르고 싶은 욕망, 시원에 도달하고 싶은 꿈이 헛된 망상으로 작용하지 않고 진심어린 마음과 자세로 온 몸을 던져 육박전을 펼치는 날이 많아진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를 횡단하려는 야망이 꿈틀거릴 때 매일 맞이하는 밤은 새벽이 되기까지 하얀 조명등 아래에서 인식보다 감각, 이성보다 감성, 머리보다 몸으로 자문하며 날밤을 까는 날이 많아질수록 없어진 코스모스에서 카오스의 바다를 헤맬 것이다.



사랑은 복수(複數)가 아니라 단수(單數)


모든 추상명사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다. 예를 들면 사랑은 반복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혁명적인 사건이다.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처럼 사랑에도 두 번은 없다. 오로지 한 번만 일어나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모든 개별의 삶은 빤하지 않고 지극히 실용적이고 구체적이어서 한 편의 시다”(226쪽). 사랑으로 느끼는 설렘과 사랑으로 겪는 고통은 저마다의 상황에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일인칭 개별적인 감정이나 정서다. 내가 지금 여기서 몸으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다른 상황에서 반복할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일회적인 느낌이다. “나는 오늘 사랑할 것을 의도하거나 기획하지 않고, 오늘 내가 껴안은 것이 무엇인가를 되짚어보는 방식으로 사랑한다”(5쪽). 마음먹을 대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고 계획대로 사랑의 각본은 풀리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통제 불가능한 방향으로 질주하거나 뜻밖의 변수가 미지수를 만들며 급습한다. 나는 다만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몸의 감각이 각성하는 방향으로 맡겨놓으면 된다. 그래서 작가는 “사랑은 사랑한 것의 복습이고 사랑할 것의 예습”(16쪽)이라고 한다. 모든 사랑은 이전 사랑과 다르게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은 이전 사랑을 복습한 덕분에 생기고 사랑할 것의 예습으로 불확실성의 주는 불안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은 살아간다는 말과 같은 뜻”(7쪽)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 “사랑은 마음 준 것들의 수집이고, 인생은 수집된 사랑의 나열”(5-6쪽)임을 재확인 할 수밖에 없다. 마음 준 것들은 주로 사회가 정한 도덕적 기준에 합당한 논리적 이해보다 개인적으로 끌리는 주관적 심리를 자극한 것이고, 수집된 사랑 역시 머리로 이해된 깨달음의 무늬보다 아픈 상처지만 그 위에 핀 꽃들의 추억이다.


“인간이 시를 쓴다는 말은 소리 없이 운다는 뜻이다”(199쪽). 시인의 울음이 전하는 파장은 시인이 겪어본 삶의 애환의 깊이에 비례한다. 힘든 삶을 견뎌내면서 자신의 몸에 아로새겨진 상처의 깊이나 고달픔의 강도가 울부짖는 시심으로 숙성되어 한 줄의 시로 또 한 사람을 울리는 것이다. 강물에 돌멩이를 던지면 돌멩이 무게에 따라 물속으로 파고드는 깊이와 겉으로 드러나는 파장의 강도가 다르다. 하지만 물위에 빈 바가지를 띄우면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고 강물의 물결과 물살에 따라 정처 없이 떠돌며 흔들릴 뿐이다. 시 쓰기는 강물에 돌멩이를 던지는 일과 비슷하다. 깊게 파인 물결의 파장만큼 시인의 시는 독자와의 공감을 부르고 공명의 연대망을 구축할 것이다. 시인은 먼 훗날이 어떻게 현실로 다가올지 예견하기보다 지금 여기서 보고 들으며 느끼는 순간의 느낌을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 몰두한다. “지금 살아가고 지금 지나가고 지금 쓰는 것으로 세계는 파악될 수 있고 느껴지는 것이어서 그것만이 진실이고, 분명한 나의 생이다”(255쪽). 다 담아내기 어렵고 감당하기 힘든 일 앞에 좌절한 만큼 시어는 농밀해지고 감각을 건드린다. 때로는 직선으로 급습하고 때로는 사선으로 횡단한다. “사랑은 한 번은 직선으로 살고 한 번은 사선으로 산다. 직선의 세계에는 열화하는 삶이 있고 사선의 세계에는 머무는 삶이 있다. 처음에는 자랑처럼 홀로 서지만, 사랑은 점점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운다”(191쪽). 사랑이 깊어질수록 비스듬히 기울던 몸은 마음도 한쪽을 기울게 만들어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안목과 식견을 심할 정도로 갖기 시작한다. 뭔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선입견(先入犬)과 편견(偏犬)이라는 개 두 마리를 키운다. 이정록의시인 ‘쏠림’이라는 시에서 “사랑은 내 편견의 총합”이라는 말로 내 생각을 지지해준다. 사랑은 두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시작되지 않는다. 한 눈 팔다 한 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지면 편향된 시각이 생기고, 관점이 솟구치면서 그 동안 가졌던 선입견이 종합선물세트로 밀려들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선입견과 편견에 가려져 살았던 불우한 시절의 장막이 걷히고 이제 나의 선입견과 편견으로 세상을 편파적으로 바라보는 나의 세상이 펼쳐진다.



건전하게 살지 말고 건강하게 살자!


“모든 의미에는 이유가 없다”(334쪽). 하지만 모든 이유에는 저마다의 의미로 사유하는 문제의식이 스며들어 있다. 자기만의 문제의식이 스며든 각자의 길에는 보편적으로 반드시 따라야 할 도덕적 규범도 없다.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는,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길로 들어설 때, 욕망의 물줄기는 생산적인 에너지이자 창의적인 힘으로 작용하면서 내가 하면 신나고 즐거운 일에 손길과 눈길이 나도 모르게 끌려간다. 그게 바로 《오늘 사랑한 것》이 되면 오늘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펼쳐진다. 과거는 흘러간 역사라서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미스터리라서 미리 끌어당겨놓고 걱정해도 인정되지 않고 긍정할 수 없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면 현실 속에서 진실을 붙잡을 수 있고 지금 여기서 즐거운 느낌을 행복의 원천으로 간직할 수 있다. 작가의 글이나 시인의 시는 ‘건전’하지 않고 ‘건강’하다. “건전이 집단적 ‘도덕’의 시선에서 선한 것으로 판단되는 어떤 속성이라면, 건강은 개인적 윤리의 시선에서 ‘좋은’ 것으로 판단되는 어떤 속성”(403쪽).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에 나오는 말이다. 건전한 사람일수록 자기 건강을 지키지 않고 밖에서 요구하는 온갖 기준과 조건에 부응하느라 건강을 해칠 수 있다. 건강한 사람일수록 사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삶의 원심력에 끌려 다니지 않고 자신의 몸이 느끼는 즐겁고 행복한 감각이 이끄는 끌림이나 각성을 따라 몸을 맡긴다.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고 멈춤의 시간적 여유 없이 읽고 말았다. 가을 서녘하늘에 걸려 있는 노을에 그을린 그리움이 온몸으로 스며들며 심장박동을 가속화시키는 공감의 파장이 일어나고, 작가가 품은 《오늘 사랑한 것》들의 색감으로 내 몸은 심하게 물들어버렸다. 오이가 피클로 바뀌며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가 일어났다. 육신의 고통으로 건져 올린 단어들의 꽃이 나에게도 꽃이 되어 꽂혀버렸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평범하지만 비범하고 비장한 한 문장을 남긴다. “내가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도록 돕는다는 뜻”이어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네가 살아가는 일에 기여하는 것”(307쪽)임을 잊지 말자는 먹먹하고 엄숙한 선언과 주장이 의미를 심장에 꽂아 묵직한 감동으로 살아 움직인다. 의도적으로 ‘작별’할 수 있는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이별’할 수밖에 없는 서글픔의 사연만 있는 게 인생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겪어내는 삶은 작별과 이별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며 살아오는 동안 겪은 희로애락의 사중주가 울려 퍼지는 무대다. 알아버린 기지(旣知)의 익숙함과 아직도 모름의 호기심을 품은 미지(未知)의 세계가 엇갈리는 만남과 아득한 헤어짐의 이중주가 세레나데로 울려 퍼질 때 시인의 가슴은 사태를 파악할 수 없는 섣부른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 불안감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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