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해서 서재에 꽂아 둔 채 몇 년째 읽지 못하는 책이 많다. 그중에 한 권이 바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쓴 《천 개의 고원》이다. 천 개의 고원이라서 그런지 책도 천 페이지다. 방대한 분량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우발적 접목으로 부단히 수평적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뻗어나가는 리좀(rhizome)처럼 다양한 철학적 개념이 느닷없이 휘몰아치며 한 문장도 읽어낼 수 없는 난해한 책이었다. 난해한 책을 읽어야 난해한 책을 읽어낼 수 있는 정신근육이나 정신의 관절이 생긴다는 사실을 믿는다. 쉬운 책만 읽으면 뇌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책 내용을 홈패인 공간에 저장된 기존의 인식체계로 쉽게 해석해 버린다. 뇌에 입력되는 낯선 자극이 없어지면서 뇌도 효율적으로 작동하려는 관성에 빠져버린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다”(12쪽). 책을 쓰는 과정에서 저자가 쏟아낸 고뇌의 주름이 챕터별 이어지면서 개념과 개념의 접속과 배치가 달라지면서 다양한 사유체계가 흔적으로 축적될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동일한 책도 언제 어디서 누가 읽어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사유의 주름이 생긴다. 책은 나아가 저자의 사유 주름과 독자의 독해 주름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또 다른 사유체계로 직조된다는 점에서도 책은 하나의 다양체다.
다양체는 추후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한 사람이 살아오면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겪은 경험적 흔적이 자신도 모르게 주름으로 축적되면서 생기는 다양한 정체성이다. 한 권의 책을 격주 토요일마다 대학원 제자들과 읽고 토론하고 정리하면서 생긴 사유의 주름이 엉켜 있어서 시간이 지나도 이름값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기억에 남아 있는 읽기의 주름을 더듬어 앓음다운 사유의 무늬로 직조해 보기로 했다. “하나의 배치물로서의 책”(13쪽)은 무수한 개념들과 그 개념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의 낯선 배치를 해독하는 일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다. 사건은 배치가 뿜어내는 기호를 해석하는 과정이다. 일 년여 기간 동안 제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낯선 배치가 품은 의미의 기호를 해독하면서 정보의 지배를 받으며 타성에 젖어가는 언어사용 습관을 깨고 기존 언어 꾸러미에 추가하여 낯선 언어를 벼리고 벼리는 과정에서 날 선 사유도 그만큼 잉태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막걸리는 비 오는 날을 거부하고 새벽에 마시고 싶은 욕망을 꿈꾼다
《천 개의 고원》은 수많은 개념들의 천국에서 노닐며 고원을 넘나드는 책이다. 여러 가지 개념 중에 배치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배치가 바뀌면서 일어나는 수많은 우발적 접속이 리좀이며, 리좀이 생기면서 발생하는 사건이 삶의 시기별로 주름을 만들어 다양체(multiploicity)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배치, 리좀, 사건, 다양체와 같은 생소한 개념을 낳는 모든 생소한 개체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라고 한다. 우리가 말하는 기계적이라는 말과 관계없이 《천 개의 고원》에서 말하는 기계는 차이를 생성하려는 의욕을 가진 모든 개체다. 이런 기계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다른 부분과 접속하고 결합하는 것에 따라 다양한 작용을 하며 변신한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모든 기계는 어떤 힘을 갖고 뭔가를 계속 생성하려는 욕망하는 기계다. 《천 개의 고원》에 나오는 기계는 궁극적으로 모든 유형무형의 존재로서 국가도 기계이고, 사람도 기계이고, 제도도 기계다. 이런 어려운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이후에 살펴보기 전에 개념들과 개념들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돋우기 위해 막걸리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막걸리라는 기계는 비 오는 날과 배치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비가 오면 막걸리라는 기계는 파전과 같이 먹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때로는 막걸리라는 기계는 비 오는 날에 배치되기보다 등산 다녀온 후 마시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막걸리라는 기계는 비 오는 날씨, 등산, 파전이라는 기계와 접속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 막걸리 마시는 영토를 구축해 왔다. 어느 날 막걸리 마시는 영토 속에 잠재된 욕망이 기존 영토를 벗어나고 싶어 탈주를 거듭하며 탈영토화를 거듭한 끝에 막걸리와 새벽이라는 기계가 우발적으로 접속하는 리좀이 발생하면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하나의 사물이라는 기계라고 할지라도 다른 기계와 어디서 어떻게 접속해서 무슨 배치를 만드는지에 따라, 즉 배치가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는지에 따라 그 사물이 갖는 의미는 전혀 달라지며 그 순간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은 사물이 이전과 다른 접속을 통해 낯선 배치는 만드는 순간 발생한다. 막걸리가 한 번도 만나본적이 없는 새벽과 우발적으로 접속하면서 막걸리-새벽이라는 배치가 형성되면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막걸리는 주로 비 오는 날 파전을 먹는 경험이 축적되면서 특유의 주름이 생겼었다. 막걸리라는 기계가 비 오는 날과 파전이라는 기계가 만나 기계적으로 배치되면서 생기는 주름이 다양체다. 막걸리를 마시는 경험이 바뀌지 않으면 배치가 바뀌지 않고 배치가 바뀌지 않으면 막걸리와 관련되어 축적되는 흔적이나 주름도 바뀌지 않아서 다양체도 바뀌지 않는다. 막걸리에 대한 다양체는 막걸리를 마시는 기계인 사람이 막걸리를 마시는 상황에서 마주치는 다른 기계들과 우발적 접속인 리좀이 바꾸지 않으면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막걸리와 관련된 기계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되는 장이 형성될 때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성을 획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걸리라는 기계는 욕망하는 기계라서 다른 기계들과 이전과 다르게 접속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면서 기존의 접속을 풀고 이전과 전혀 다른 접속으로 배치가 형성될 때 탈영토화가 시작되고 다시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서 재영토화를 반복하는 것이다. 막걸리는 비 오는 날 마셔야 한다는 기존의 고착화된 코드화는 탈코드화 되어 막걸리는 새벽에 마셔도 된다는 새로운 코드가 만들어질 때, 막걸리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도 통렬하게 무너지면서 막걸리를 마시는 새로운 방식으로 재코드화가 진행된다.
한 사람은 번개였고 한 사람은 피뢰침이었다
들뢰즈는 철학사를 전공한 철학자지만 다른 철학자와 철학을 공부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철학사를 전공하는 철학자는 철학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비추어 철학자의 철학적 신념과 주장을 당대의 시대적 배경과 맥락에 비추어 사회역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주류 철학적 입장의 핵심 사유체계를 역사적 흐름에 따라 재건축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전의 철학적 사유체계가 구축한 영토에서 벗어나는 탈주를 통해 탈영토화 시켜 그 자리에 전혀 다른 철학적 사생아를 제3의 대안으로 제시하며 특이한 방식으로 철학사를 자기만의 관점과 접근논리로 재건축한다. 주류 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학문적 입장을 왕립과학(Royal Science)이라고 하고 이이 대응하여 대안논리를 추구하며 주류 입장에서 벗어나 제3의 철학적 입장을 주장하는 학문적 관점을 소수과학(minor science) 또는 유목적 과학(namad science)이라고 한다. 주류입장을 옹호하고 유지하는 진영을 국가라는 기계가 담당하고 소수과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진영을 전쟁기계라고 한다. 국가장치는 제도와 법률과 규칙을 기반으로 일정한 체계로 묶어 통제하려고 하고 전쟁기계는 표준화된 제도적 장치에서 벗어나 탈주를 거듭하면서 낯선 접속을 통해 이전과 다른 배치를 만들어 사건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부단히 반복하는 기계다.
《천 개의 고원》을 같이 쓴 가타리는 번개, 들뢰즈는 피뢰침의 역할을 하면서 전대미문의 철학책을 합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천 개의 고원》을 쓰기 전에 가타리와 들뢰즈가 처음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욕망하는 생산’(production desirante)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억압적인 욕망’이 들뢰즈와 가타리를 만나 ‘생산적인 욕망’으로 혁명적인 전환을 하면서 욕망은 혁명을 일으키는 생산적인 힘이자 창의적인 원천으로 변신한다. 하지만 순수한 욕망은 없고, 없었던 욕망도 배치가 바뀌면 생긴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본래 가방을 사고 싶지 않았는데, 가방의 특정한 디자인이나 이미지의 배치가 내 안의 잠자는 욕망을 꿈틀거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배치가 바뀌면 욕망이 꿈틀거리고 욕망이 꿈틀거리면 사건이 발생한다. “배치는 사건이자 실천이다”(119쪽). 이정우의 《천 하나의 고원》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배치가 천 개의 고원에서는 아장스망(agencement)을 뜻하는, 영어로 번역하면 배치(arrangement)를 의미하는 말이다. 배치가 바뀐다는 의미는 난생처음 경험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고 그 사건 자체는 이전과 다른 실천을 촉발하는 방아쇠나 다름없다. 배치는 욕망의 꿈틀거림이 내재화된 소리 없이 잠자고 있는 듯 하지만 위험한 침묵이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배치가 바뀌면서 혁명적인 사건이 벌어질지 모르는 잠재성의 장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철학을 공부하는 방식은 “어떤 철학자의 진정한 사상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철학자의 생각과 자신의 것이 만나고 접속하여 제3의 것을 만드는 것”(39쪽)이다. 이진경의 《노마디즘 1》에 나오는 말이다. 기존 철학자를 뒤에서 덮쳐 전혀 다른 우발적 접속을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식의 개념을 사용하면 리좀을 통해 전대미문의 색다른 개념적 사생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배치와 욕망, 리좀과 사건, 다양체 등이 다 그런 우발적 접속으로 생겨난 금시초문의 개념적 리좀의 산물이다. 낯선 개념을 새롭게 창조하기도 하지만 기존 개념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재개념화 또는 창조해서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풀어내는 새로운 무기로 사용한다.
리좀은 우발적 접속으로 어제와 다른 다양체를 생산한다
대표적인 개념이 전술한 기계다. 기계라는 개념을 생각하면 자동차, 로봇, 농기구나 ‘기계적’, 기계적 부속품, 틀에 박힌 사고방식 등을 연상하지만 《천 개의 고원》에 나오는 기계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기계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이들에게 기계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총칭한다. 기계는 입이라는 기계는 음식을 만나면 먹는 기계가 되고, 상대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만나면 말하는 기계가 되며, 공기 중의 산소를 만나면 호흡하는 기계가 된다. 이처럼 기계는 다른 기계와 만나 배치를 만드는 순간 부단히 다른 기계로 변신을 거듭한다. 모든 기계는 다른 기계와 만나고 싶은 생명 또는 잠재적 욕망을 품고 있다. 그래서 모든 기계는 욕망기계이자 익숙한 배치를 벗어나 다른 배치를 만들어 낯선 기계로 변신하고 싶은 전쟁기계다. 전쟁기계는 코드화된 영토에서 벗어나 낯선 영토를 만들어 탈영토화 시키는 기계다. 결국 들뢰즈가 가타리가 기계라는 개념을 새롭게 재개념화 시켜 이루고 싶은 꿈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내재적으로 품고 있는 욕망을 실현시키는 생명의 메커니즘을 만들어 이전과 다른 기계적 배치를 통해 새로운 배치를 부단히 창조하는 데 있다. 결국 욕망하는 기계란 익숙한 사물을 낯선 사물로 재탄생시키는 시스템이자, 다른 기계와 부단히 접속, 제3의 기계와의 차이를 반복, 또 다른 기계로 변신하는 일종의 자기 생산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기계가 다른 기계와 만나는 우발적 접속을 리좀이라고 한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47쪽). 리좀은 우발적 마주침으로 접속되는 사이와 사이에서 다른 소리를 들려주면서 울려 퍼지는 일종의 간주곡이다. 리좀의 반대되는 사유방식이 수목형 사고다. 수목형은 나무뿌리와 줄기와 가지가 일정한 수직적 위계와 계층적 질서를 갖고 있어서 쉽게 바꾸기 어렵다. 수목형(樹木型)은 항상 중심과 근간이 존재하고 그걸 기반으로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듯 생각의 위계도 결정되는 정형화된 사고 패턴이다. 반면 리좀은 뿌리가 땅속에서 뻗어나가듯, 언제 어디서 어떤 방향으로 뿌리를 내릴지 예측불가능한 상태로 수평적인 방향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번짐과 엉킴의 형상을 추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지금까지 서양의 사유체계는 ‘나무’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수목형(樹木型)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나무와 뿌리를 모델로 하는 수목형 사유는 ‘그리고…그리고…’로 무한히 이어지는 연속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좌우대칭의 질서 정연한 구조와 체계적인 형태다. 수목처럼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근대적 사유체계는 질서 정연한 패턴을 유지하며 피라미드처럼 위계적 명령체계를 따른다. 이 수목구조 반대의 개념이 바로 ‘리좀’이다. “뇌는 나무가 아니라 풀”(p.30)이 되는 까닭도 새로운 지적 자극이 뇌에 입력되면 수목형 구조처럼 위계적으로 생각하는 계통을 따르지 않고 풀뿌리가 수평적으로 뻗어나가는 난반사 형태로 사고의 뉴런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54쪽). 시작과 끝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수목형 구조와는 다르게 리좀은 시작도 끝도 없이 언제나 사이와 중간 상태를 유지하면서 종단하면서 동시에 횡단하며 융합하면서 통섭한다. 리좀은 부단히 기계적 배치를 바꿔가면서 고정된 체계나 구조를 만들지 않고 질서와 패턴을 유지하지 않고 예측불허의 우발적 접속을 반복해서 이어간다. 리좀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55쪽). 흐르는 시냇물이 흘러가면서 어떤 기계와 우발적으로 마주칠지 예측불허다. 이질적 사물과의 우발적 접속가능성이 무한대로 열려 있기 때문에 리좀은 언제나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며 생성하는 다양체를 창조한다. 우발적 마주침의 흔적으로 생기는 주름이 시시각각 변화되기 때문에 리좀이 수평적으로 뻗어나갈수록 그만큼 다양한 다양체가 생긴다. 이런 점에서 리좀은 이전과 다른 마주침이 생기고 단절될 때마다 이전과 전혀 다른 접속의 부산물리 생기는 ‘다양체’다. 다양체는 거꾸로 말해서 리좀이 그동안 어떤 수평적 접속을 통해서 주름을 형성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산물이다.
‘∼되기’는 배치를 통해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생성적 욕망이다
‘배치’는 《천 개의 고원》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적 토대이자 철학적 기반이다. 모든 배치는 기계적 배치다. 앞서 설명한 기계는 배치의 구성요소다. 배치란 기계와 기계와 어제와 다르게 접속하며 리좀형 사유체계를 양산하는 위치의 배반이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 다른 곳에 위치할 때 낯선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 배치가 탄생한다. 모든 기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기계와 접속함으로 배치를 만드는 과정에서 존재한다. 개체로서의 기계는 불변하는 단일한 속성을 지닌 독립적 실체가 아니다. 모든 기계는 다른 기계와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접속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다. 가령 ‘종이’를 예를 들면, 종이 기계는 어떤 기계와 배치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기계로 거듭나다. 종이가 펜을 만나면 메모장이 되고, 종이를 접으면 비행기로 변신하고, 종이를 창문에 붙이면 햇빛 가림막으로 바뀐다. 기계는 다른 기계와 접속을 통해 본질적 성격과 기능이 다르게 형성되는 가변적인 존재다. 모든 기계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정체된 명사로 존재하지 않는다. 기계는 언제나 다른 기계와 접속, 이전과 다른 배치를 통해 전혀 다른 다양체로 거듭나려는 역동적인 동사의 모습을 띠려고 한다.
존재하는 모든 기계는 있는 그대로 지금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뭔가 ‘되기(becoming)’ 위해 부단한 접속을 통해 생성하는 존재다. “되기는 진화, 적어도 혈통이나 계통에 의한 진화는 아니다. 되는 계통을 통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데, 모든 계통은 상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되기는 항상 계통과는 다른 질서에 속해 있다. 되기는 결연(alliance)과 관계된다”(453쪽). 되기는 수목형 구조처럼 일정한 혈통이나 계통을 따르는 체계적이고 절차적인 과정이 아니라 기존 배치와 결별을 선언하고 전혀 다른 배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며 일어나는 생성이다. “생성은 모방”(576쪽)이 아니다. “생성은 욕망의 과정”(517쪽)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성은 이전 기계를 단순히 모방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전과 다른 배치를 만들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욕망은 어제와 다른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이다. 모든 “되기는 자기 나름의 고름을 갖고 있는 하나의 동사이다”(454쪽). 여기서 말하는 고름은 되기 과정에서 생긴 고통의 주름살이다. 다양체가 다양한 주름의 산물이라면 되기 과정을 반복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생기는 고통의 흔적과 얼룩이 하나의 무늬로 바뀌면서 대체 불가능한 단독적인 다양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든 “되기는 역행적이며, 이 역행은 창조적”(453쪽)이 되는 까닭이다.
모든 ‘∼되기’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 있는 ‘소수자 되기다
되기를 통해서 배치가 만들어지는 순간 영토화가 일어난다. 지식생태학자 되기를 통해서 지식생태학의 새로운 위상과 학문적 배치가 만들어지는 순간 지식생태학의 학문적 영토가 새롭게 구축된다. 지식생태학이라는 영토는 그 영토 위에서 현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다른 배치를 부단히 만들고 차이를 생성하면서 탈영토화를 추구한다. ‘탈영토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움직임이 바로 ‘탈주’다. 차이를 생성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지식생태학적 배치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고 해결하면서 탈주를 거듭할 것이다. 지식생태학자는 교육공학자가 만든 영토에서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인식론적 체계와 방법론적 논리를 개발, 이전과 다른 학문적 탐구 공동체를 구축, 지금까지의 인식지평과 깊이를 가로막았던 경계를 너머의 다른 미지의 세계를 꿈꾼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배치를 추구하며 차이를 생성하고 싶은 욕망, 그 욕망아 살아 움직이는 동안에는 현실이 만들어준 영토에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지향하는 불꽃을 태운다. 이처럼 지금까지 구축한 영토에 머무르지 않고 탈영토화를 추구하면서 바깥 세계를 꿈꾸며 넘어서려는 과정이 바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되기’다.
‘되기(becoming)’는 ‘이기(being)’와 구분된다. ‘이기’가 수목형 구조를 따르면서 계열과 구조를 따라 일정한 체계성과 동일성을 반복하는 반면에 ‘되기’는 리좀형 구조를 따르면서 배치와 접속을 통해 부단히 차이를 생성한다. ‘이기’가 기억과 모방, 진화를 거듭하며 구조적 차이를 발생시키는 반면에 ‘되기’는 반기억과 절연, 역행과 함입, 변형과 변용을 통해 시시각각 다른 시간적 차이를 발생시킨다. ‘이기’가 근거와 토대, 강력한 뿌리를 근간으로 영토를 구축, 고체적 안정성을 지향하면서 명사적 정체성을 띄는 반면에 되기는 흐름과 변용을 통해 탈영토화를 추구, 액체적 역동성을 지향하면서 동사적 욕망을 지향한다. 이처럼 ‘되기’는 기존의 차이로 생긴 분류체계에 안주하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며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저항하며 창조적 혼돈을 의도적으로 생성하는 혁신적 활동이다. ‘되기’는 ‘이기’가 구축한 동일성의 논리를 파괴하고 새로운 차이가 생성되도록 촉구하는 자기 혁명적 실천행위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되기’는 언제나 ‘소수자 되기다. 여기서 말하는 소수자는 숫자적으로 소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소수성은 생성의 씨앗, 생성의 결정체”(205쪽)라서 다수성에 함몰되지 않고 이전과 다른 배치를 통해 거듭나려는 욕망하는 생성의 다른 이름이다. “소수성 소수파는 다수어의 모든 차원들과 요소들이 소수화되게 하는 잠재력을 지닌 작인”(205쪽)이 되는 까닭이다. 소수성은 다수성으로 안주하려는 속성에 저항하면서 낯선 타자가 되어 기존 지배질서와 담론체계를 전복시키려는 잠재력을 지닌다. 여기서 말하는 소수자 되기는 《천 하나의 고원》을 지은 이정우에 따르면 becoming의 현재분사가 그대로 담고 있다. 소수자 되기는 “모색하’고 있는‘, 싸우’고 있는‘, 뚫고 나가’고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 있는‘ 소수자이다”(226쪽). 결국 소수자 되기를 통해 다수자가 지배하고 있는 기존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배치를 창조함으로써 어제와 다른 차이를 생성하고 싶은 욕망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다수자는 일반성/특수성의 프레임에 갇혀 살고, 소수자는 보편성/특이성 또는 단독성 프레임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특수한 다수자는 얼마든 다른 특수한 다수자와 대체가 가능하고, 특수한 다수자를 보다 넓은 상황에 일반화시켜 생각해도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특이성을 띄는 소수자는 그 어떤 다른 소수자와 비교할 수 없는 온리원의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소수자와 대체가 불가능한 존재다. 돈이 일반적인 화폐라면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 예를 들면 물이나 커피, 각종 상품이나 기자재, 자전거나 자동차 등은 특수성에 해당된다. 예를 들면 일반성에 해당하는 돈으로 산 특수한 물건 중에 아메리카노 커피는 다르지만 다 같은 커피다. 한 잔을 사서 취급 부주의로 쏟았다면 얼마든지 다른 커피로 대체하거나 교환이 가능하다. 일반성과 특수성으로 구분해서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개체는 다른 개체로 얼마든지 대체하거나 교환 가능하기 때문에 일정 기간 사용하거나 소비하면 없어지는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다. 반면에 보편성과 단독성의 프레임으로 생각하면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또는 교환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정신적 또는 물질적 자산에 속한다. 특수한 연구는 일반화시켜 반복해서 적용할 수 있지만 단독적인 연구는 일반화 자체가 불가능하고 반복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연구결과는 대체 또는 교환 불가능하다. 단독적인 연구는 연구를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연구인지를 보여주는 보편적인 연구다. 단독적인 연구에 다른 연구자들이 공감하고 공명하면서 자기만의 고유한 컬러나 스타일이 드러나는 보편적인 연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가장 단독적인 연구가 많은 연구자들에게도 귀감이 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연구가 되는 까닭이다.
전쟁기계는 소수자 되기를 원하는 장착 해야 될 무기다
소수자 ‘되기’는 보이지 않는 제도적 폭력으로 ‘이기’ 상태를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국가장치를 파괴하고 전쟁기계를 장착해야 가능하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전쟁기계는 제도화된 국가권력과 암묵적 폭력에 저항하면서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판을 짜려는 기계다. 전쟁기계는 국가 장치가 보이지 않는 정치권력으로 소수자를 포획, 다수자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막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국가장치는 장기에 비유된다면 전쟁기계는 바둑에 비유될 수 있다. 장기 놀이는 사전에 결정된 역할과 규칙에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도록 코드화된 닫힌 공간 속에서의 제한된 게임이라면, 바둑은 정해진 역할과 규칙도 없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낯선 배치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열린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게임이다. 마(馬)나 포(包) 혹은 졸(卒)이 움직이는 일정한 코드화된 언표체계와 달리 바둑의 낱알은 익명 또는 3인칭 자격으로 개별적으로 움직이며 이전과 다른 배치를 부단히 생성한다. 전쟁기계는 바둑알처럼 주어진 자리에서 갑자기 나타나 낯선 생각을 뿌려놓고 홀연히 사라졌다가 느닷없이 나타나 천둥과 번개를 치며 기존 질서를 사정없이 무너뜨리며 낯선 리좀방식의 행보를 반복한다.
주류를 형성하는 다수적 또는 제국적 왕립과학이 설정한 기존의 표준화된 헤아린 수, 즉 주민번호를 매개로 획일화 또는 표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국가장치다. 이들은 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정형화된 패턴을 공유하며 닮은 점을 찾는 만남을 통해 동일성을 무한 반복하려는 집단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철도와 고속도로처럼 출발지와 목적지를 정해놓고 그 안에서 효율성을 추구하며 모든 사람을 이상적인 롤모델처럼 양성하려는 일종의 주조(鑄繰) 패러다임을 따른다. 반면에 유목적이고 소수적인 비주류적 과학을 기반으로 이전과 다른 문제의식으로 기존의 문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설정함으로써 이전과 다른 차이를 무한 생성하려는 욕망이 전쟁기계다. 이들은 철도와 고속도로를 따라 주조하기보다 오솔길을 걸으며 우발적 마주침을 통해 어제와 다른 배치를 형성함으로써 차이가 생성되는 다양체를 단조(鍛造)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단조는 금속을 불에 달구어 모루 위에서 단련하는 과정을 통해서 생산되는 철물이다. 주조는 사전에 규격과 형식이 정해진 틀에 박힌 형태를 생산하지만 단조는 어떤 방향으로 쇠가 단련될지 예측불허의 리좀 방식으로 생성되는 다양한 잠재성의 산물이다.
기관 없는 몸체(신체)는 무한한 잠재성을 품은 욕망의 결정체다
소수자 되기는 기관 없는 몸체 상태에서 시작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아직 분화된 기관을 갖지 않는 신체, 그렇기에 모든 분화된 기관으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생명체, 즉 알이다. 그래서 “기관 없는 몸체는 알이다”(314쪽)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기관 없는 몸체(신체)는 알이기 때문에 어떤 잠재성을 띤 다른 기관으로 변형되고 발전될 무한한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는 몸체다. 무수한 잠재성을 지닌, 잠재성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현실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가능성과는 구분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앞으로 어떤 변화상태를 겪을지, 어떤 모습을 띠고 나타날지 끊임없이 변화되어 가는 생성적인 신체다. 기관 없는 신체는 아직 어떤 기관도 갖고 있지 않는, 또는 어떤 기관으로도 무한히 변신할 수 있는 몸체다. 잠재성을 지닌 기관 없는 “신체는 끊임없는 변화상태”(431쪽) 또는 “끊임없이 변화되고 생성되는 새로운 힘”(노마디즘 1, 431쪽)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항상 어디까지나 창조적이고 동 시간적인 역행이다”(315쪽). 기관 없는 신체가 창조적이고 동 시간적인 역행을 멈추는 순간 기관 없는 일정한 신체나 몸체, 즉 유기체로 고착화되면서 더 이상의 변신을 반복하지 않는다.
기관 없는 신체가 고정된 실체로 규정되는 즉 유기체가 되는 걸 최대의 적으로 생각한다. “기관 없는 몸체의 적은 기관들이 아니다. 바로 유기체가 적이다”(304쪽). 유기체가 되는 순간 더 이상 다른 기관 없는 신체로 변형될 가능성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유기체로 만들어버렸다! 부당하게도 나는 접히고 말았다. 내 몸을 도난당했다!”(305쪽) 기관 없는 신체가 유기체로 고정되는 순간 그 유기체는 일정한 의미를 띤 신체로 고착된다. 즉 유기체화가 일정한 의미화로 고정되는 순간 기관 없는 신체는 하나의 정체성을 띤 주체가 되면서 더 이상 변화가능성이 없어지고 만다. 기관 없는 신체의 욕망은 “우리를 지배적인 현실 속에 고착시키고 고정시키는 주체화의 점들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307쪽)이다. 이런 점에서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이다”(316쪽). 욕망은 해보고 싶은 단순한 욕구가 아니라 아직은 잘 모르지만 그곳에 도달하고 싶은 생산적인 힘이자 더 잘하고 싶어서 갖고 싶은 능력이다. 욕망이 노력을 불러와 낳은 자식이 능력이다. 욕망이 능력을 만나면 지금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에너지를 내재적으로 장착하게 되는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가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해석하면 하나의 기관에서 다른 기관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힘의 강도나 집약 또는 응축되는 정도의 차이를 말하는 강밀도(intensite)를 욕망의 종류와 성격에 따라 바꿔나간다는 의미다. 기관 없는 신체는 알이기 때문에 강밀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극한적 상태다. 따라서 기관 없는 신체는 “강밀도의 분포를 바꾸지 못한다면 그 기관은 다른 기관이 될 수 없으며, 영원히 그 기관으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노마디즘 1, 461쪽). 예를 들면 헬스장에서 악력을 이용해 운동하던 손에 가해지는 힘의 강도나 분포가 만년필을 잡고 자신의 생각을 손글씨로 쓸 때의 손에 가해지는 힘의 강도나 분포가 다르다. 이제 손은 사랑하는 사람을 어루만지는 손으로 변신할 수도 있고, 아픈 사람을 돌봐주기 위해 내미는 따뜻한 손길이 될 수 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야단을 치는 손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이처럼 동일한 손이라는 기관도 손이 품고 있는 욕망과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배치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기관 없는 몸체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는 것이다.
홈 패인 공간에서 탈주, 전쟁기계가 활동하는 매끄러운 공간으로 이동하다
《정보의 지배》를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디지털 정보체제(Informationsregime)가 알고리즘으로 걸러진 특정한 데이터만 반복해서 검색하면서 인간을 데이터 가축으로 사육한다고 주장한다. 인간 스스로 성과목표에 포획당한 데이터 가축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 주어진 범위 안에서 주어지는 정보 고기만 편식하면서 사육당한다. 한마디로 데이터 가축으로 포획당한 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누군가 정해놓은 로드맵과 가치판단 기준에 따라 홈패인 공간에서 죽도록 노력하고 노력을 반복하지만 성과를 달성해도 언제나 우울한 채 살아간다.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가 파놓은 홈패인 공간에서 무한 질주를 반복하지만 지갑은 늘 열려 있고, 성과는 달성했지만 성장은 일어나지 않는 자기 착취와 자아탕진의 악순환을 반복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패인 공간, 유목적 공간과 정주적 공간, 전쟁기계가 전개되는 공간과 국가장치에 의해 설정되는 공간-이 두 공간의 본성은 전혀 다르다”(907쪽). 홈 패인 공간은 닫힌 공간에 정주하며 누군가 닮아가려는 경쟁을 반복, No.1이 되려는 유혈 투쟁을 반복하는 모범생이 주류를 형성한다. 반면에 “매끈한 공간은 차원성이나 계량성보다는 방향성을 갖게 된다”(914쪽). 매끈한 공간은 열린 공간이기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도 잠재성이 내재되어 있는 유목적 사유가 자라는 터전이다. 매끈한 공간은 동질성보다 이질성을 지향하면서 대체가 불가능한 고유해지기를 통해 유일무이한 온리원(Only 1)을 지향하는 모험생이 부류를 형성한다.
홈패인 공간은 틀에 박힌 방식으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정형화된 배움이 일어나는 스튜디움 방식의 노선을 따르기에 사전에 어떤 배움이 일어날지를 예측하고 도달할 목적지를 결정하는 체계적 청사진을 설계한다. 홈 패인 공간은 국가장치가 애용하는 코드화된 장기 방식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구조적이고 규칙적인 노선을 따른다. 당연히 홈패인 공간은 수목형 구조처럼 수직적 위계를 선호하며 철도와 고속도로처럼 출발지와 목적지가 정해져 있어서 그 안에서 최대한의 효율적 논리를 추구한다. 모든 것이 내재화되어 있는 코드에 따라 움직이며 변치 않는 본질적 속성을 유지하고 있어서 궤도 이탈을 하는 현상이 나타나도 놀라지 않고 다만 당황할 뿐이다. 궤도이탈을 하는 비일상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기존 이론체계로 설명이 안 되는 예외적 사례이기에 간과하거나 무시한다. 반면에 매끈한 공간은 낯선 자극으로 다가오는 예기치 못한 깨우침을 기꺼이 수용하면서 뇌로 입력되는 모든 신선한 자극에 반응하는 푼크툼 방식의 노선을 따르기에 사전에 어떤 배움이 일어날지 예측불허라는 관점을 받아들인다. 매끈한 공간은 국지적으로 난반사로 일어나는 생성과정을 환영하며 대체불가능한 사건 속에서 발생하는 낯선 배치와 생성 자체의 단독성이나 특개성을 존중한다. 매끈한 공간은 수시로 낯선 배치가 부단히 일어나기 때문에 모든 생성과정을 시각적으로 파악하기보다 촉감적으로 다가오는 감각적 각성을 중시한다. 바둑처럼 탈코드화된 방식으로 정해져 있지 않은 길을 가면서 당면하는 상황에서의 낯선 상호작용과 배치가 만들어가는 우발적 접속, 즉 리좀을 통한 수렴적 연결을 중시한다. 출발점과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는 오솔길처럼 끝없는 낯선 관계가 형성되면서 가변적이고 잠재적인 특성이 질적으로 다양체를 무한히 만들어내는 과정에 당황하지 않고 당혹감을 느끼지만 놀라움으로 받아들인다.
대가들이란 영토 바깥으로 탈주하면서 탈영토화를 반복하는 사람이다
국가장치가 통제하는 홈 패인 공간과 전쟁기계가 작동하는 매끄러운 공간은 현실적으로 명확하게 개념적으로 구분되기보다는 실제적으로는 뒤섞여 있다. 우리가 마땅히 수행해야 되는 일은 “홈파기를 가로질러 새로운 매끄러운 공간으로 탈주”(p.953)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홈 패인 공간에서 안주하거나 안주하게 만드는 제도적 장치나 규율의 숨은 권력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면서 기존 영토에서 탈주를 반복하며 차이를 생성할 때 낯선 배치가 만들어질 때 탈영토화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홈 파기와 매끈하게 하기라는 조작에서의 다양한 이행과 조합이다”(953쪽). 한 번 파인 홈에 안주할수록 그 홈 파인 공간에서 탈주하기는 점차 불가능해진다. 파인 공간의 깊이가 다른 영토에서의 깊이 파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매끈한 공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는 절대로 믿지 말아라”(953쪽). 하나의 매끈한 공간이 또 다른 홈으로 파이기 전에 매끈한 공간이 담보하고 있는 무한한 잠재성을 발굴, 어제와 다른 방향성을 갖고 밖의 세계를 꿈꿀 때, 천 개의 고원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진정한 유목적 사유가 뼛속 깊이 각인될 것이다. 안주하고 정주하기 전에 탈주를 반복하면서 홈패인 공간으로 함몰되려는 관성적 역학과 싸우고 뚫고 나가며 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소수자로 거듭날 때, 우리는 비로소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을 넘나들며 알려준 작은 가르침에 깨우침으로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천 페이지 책을 챕터별로 요약한 다음 다시 한 장으로 요약한 장표
“어떤 연구자가 자신만의 고유한 영토를 만들어내려면 기존의 코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 없이는 자신만의 고유한 이론체계를 구축할 수 없다. 이른바 대가들이란 기존의 코드 안에 없는 것을 이용해 자신만의 고유한 영토를 만들어낸 사람들”(노마디즘 1, 218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