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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소설가 말해주는
전달자의 10가지 역할

철학자와 소설가 말해주는 전달자의 10가지 역할


전달자는 삶의 지혜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개발, 창의적인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이런 전달자의 모습을 철학자나 소설가가 추구하는 핵심적인 주장이나 개념에 비추어 재정의할 때 전달자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전달자는 소크라테스처럼 무지를 깨우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져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기로 안내해 주는 마중물이자 메를로 퐁티처럼 몸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깨달음의 변주자이다. 전달자는 괴테처럼 어둠 속에서고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빛을 비춰주는 등불이자 톨스토이처럼 인생의 방향을 가리키는 지혜의 나침반이다. 전달자는 니체처럼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전하는 전복의 철학자이자 랑시에르처럼 배우는 사람의 의지를 촉발시키는 교육 혁명가이다. 전달자는 헤르만 헤세처럼 내면의 고요와 성장을 가꾸는 영혼의 조경가이자 비트겐슈타인처럼 삶의 경험과 지혜를 매개하는 언어의 연금술사다. 전달자는 들뢰즈처럼 우연한 만남을 통해 색다른 개념을 잉태하게 연결하는 우발적 마주침 디자이너이자 보르헤스처럼 삶과 상상의 경계를 탐험하며 의미의 다층적 미로를 그리는 미궁 설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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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크라테스의 깨달음의 불씨 — 삶의 지혜를 일깨우는 마중물


소크라테스는 직접 지식을 가르치기보다는, 질문을 던져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끄는 ‘질문 중심’의 전달법, 산파술을 개발한 철학자였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전달자’란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지혜의 불씨를 살려내, 각자가 자기 인생의 해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불을 붙여 주는 촉매제와 같다. 그는 그저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존재의 본질을 스스로 찾게 도와주는 ‘자기 발견’의 진짜 의미와 중요성을 일깨워 준, 지식의 산파술사라고 할 만하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아는 척’을 넘어 자신의 무지부터 먼저 인정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지혜의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조력자이자 이미 내면에 잠자고 있는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하는 마중물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우리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그 안에 숨어 있던 불씨가 점차 타오르게 만들어 주는, 일종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전달자는 정답을 바로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조용한 질문을 던져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든 불씨를 일깨워 주고, 그로써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인생에 어려움을 겪는 이에게 곧장 해답을 주는 대신 “정말 너를 너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스스로 생각해 봤니?”라고 묻는다. 이를 통해 상대가 마음속 답을 스스로 찾아가게, 다시 말해 내면의 소리를 꺼낼 수 있게 도와주는 질문술사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과 지루함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이들에게는 “너는 왜 지금 이 자리에서 늘 불평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것 같니?”처럼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런 식의 대화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삶의 자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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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메를로 퐁티의 신체적 각성 — 몸으로 익히는 경험적 깨달음의 변주자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지각’을 단순한 정신적 작용이 아니라 몸과 세계가 얽힌 살아있는 경험이다. 전달자는 단순히 관념적으로 깨달은 앎으로 삶을 재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몸이 개입되는 삶으로 앎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를 감각적 현실과 정신적 의미가 교차하는 접점으로 바라보고, 상대의 몸짓, 감정, 환경까지 아우르는 통합적 공감자로 기능한다. 몸이 개입되지 않는 관념적 앎은 암이다. “감각한다는 것은 언제나 신체와의 관련을 포함한다”(103쪽).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에 나오는 말이다. 신체성이 개입되어 오감각으로 지각할 때 비로소 사물이나 대상은 나의 의식 속으로 편입된 현상으로 재탄생된다.


객관적 관망의 대상이 의식적으로 지각되는 현상으로 탈바꿈되는 과정은 대상으로 침투된 신체성이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순간이다. 전달자는 책상에서 깨달은 관념적 앎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한 경험적 지혜를 행동하는 삶으로 증거하는 사람이다. 상실의 슬픔에 잠긴 이에게 “너의 몸이 느끼는 아픔과 무거움을 그대로 머금되, 그 몸짓과 숨결에 귀 기울여라. 슬픔은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세계가 교감하며 울리는 생명의 신호다”라고 권함으로써, 이성적 이해를 넘어 몸의 깊은 차원에서 슬픔의 진의를 체득하도록 돕는 사람이 전달자의 진정한 존재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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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괴테의 빛나는 지팡이 — 어둠 속에서도 길을 안내하는 등불


괴테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깊이 탐구했던 점을 떠올려 보면, 전달자는 삶이 어두울 때에도 한 줄기 빛처럼 희망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절망에 빠졌을 때 누군가가 “어두운 밤이 길다는 건 새로운 날이 가까워졌다는 증거야”라고 용기를 건네면, 그 말 한마디가 다시 일어설 힘을 줄 수 있다. 전달자가 든 빛나는 지팡이는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앞길을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이다. 고통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건네는 말은 단순히 위로에 그치지 않는다. 자연의 순환처럼, 고난 또한 성장의 한 부분임을 일깨워주는 교향곡과 같다. “어둠이 짙을수록 별빛이 더 또렷하게 보이니, 저 너머를 바라보라”는 말처럼, 어둠은 또 다른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전주곡이다. 이전과는 다른 통찰을 얻으려면,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고요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다. 괴테의 ‘빛나는 지팡이’는 어둠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안내자이자, 고통 속에서도 미래를 긍정하며 역경을 이겨내게 해주는 삶의 지혜다.


병마와 싸우는 누군가에게는 “네 몸의 고통도 결국 하나의 계절을 지나가는 폭풍일 뿐이야. 자연이 언제나 다시 꽃피듯, 그 사실을 잊지 마”라고 이야기하며, 삶의 순환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해주는 사람이 전달자다. 병도 결국 내 몸에 머무르는 친구일 수 있으니, 이제 그 병을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고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고민해 보는 것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지혜다. 또 실패와 좌절에 빠진 예술가에게는 “밤이 깊을수록 별빛이 더 눈부시듯, 좌절의 순간이 네 예술을 더 빛나게 해 줄 거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진정한 전달자다.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내면의 불빛을 지켜내고, 그 불빛이 더욱 밝게 빛날 수 있도록 곁에서 용기를 전해주는 사람이 바로 전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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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톨스토이의 영혼의 나침반 — 인생의 방향을 가리키는 깊은 지혜


삶의 윤리와 영적 진정성을 끊임없이 좇았던 톨스토이를 떠올리면, ‘전달자’란 존재는 마치 흔들리는 영혼이 북극성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나침반 같다. 거센 폭풍 한가운데에서도 오로지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전달자는 삶의 본질과 가치를 놓치지 않도록 깊고 단단한 통찰을 건넨다. 어른이 어느 날 문득 길을 잃었다 깨달을 때, “네 내면의 양심과 진심에 귀 기울여라”는 목소리로 곁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이가 바로 그다. 흩어지는 자아와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이에게, 전달자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내면의 양심과 도덕을 따라 걸으라 권한다. 무엇이 진짜인지 헷갈릴 때,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그 모습 속에서, 톨스토이의 메시지는 변함없이 스며든다. “폭풍우 치는 밤에도 별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 네 양심의 빛을 꼭 믿으라.”


톨스토이는 평생 윤리적 진정성과 내면의 도덕적 나침반의 가치를 강조해 왔다. 전달자는 혼란 속에서 불안에 흔들리는 영혼에게 ‘내면의 북극성’이라는 희미하지만 또렷한 별빛을 건네주며, 참되고 순수한 길이 어디에 있는지 잊지 않게 해 준다. 인생의 기로 앞에 멈춰 선 이들에게 그 목소리는 다시금 속삭인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밤하늘의 별은 언제나 떠 있지. 네 양심이 그린 별자리를 따라 담대히 걸어가라.” 톨스토이는 수많은 소설 속에서, 부당한 권력 아래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힘은 정의를 좇는 네 마음에서 피어난다. 타인의 평가가 아닌, 네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를 신뢰하라.” 그 말 한마디가, 흔들리는 누군가의 도덕심을 한 번 더 북돋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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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니체의 초인의 메신저 —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가치를 전하는 전복의 철학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에 무조건 순응하는 ‘낙타형 인간’이나 기존 가치나 도덕적 규범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사자형 인간’을 넘어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낙타형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를 자문하면서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도덕과 규범, 부모와 사회의 기대와 우리 내면세계를 억누르고 지배하려는 목소리에 순응하는 삶이 맞는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 길이 ”아니” 라고 외치는 순간, ”나는 내 길을 가겠다“라고 선언하면서 사자형 인간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자는 싸워서 사회가 정한 낡은 가치와 도덕을 무너뜨렸지만 무엇을 위해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적 저항과 반항을 반복했다.


사자형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니체가 마지막 제시한 인간상이 바로 아이형 인간이다. 아이의 삶은 놀이가 핵심이다. 무엇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놀이 자체를 즐기면서 사회가 정한 도덕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매순가을 놀이처럼 즐기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뭔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와 규율의 무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살아가는 게 아이의 정신이 지향하는 핵심 가치다. 니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창조적인 정신으로 자기 삶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을 초인이라 했고, 전달자의 삶이 바로 초인의 삶과 맞닿아 있다. “세상의 잣대나 기존의 가치가 너를 정의하길 기다리지 마라. 네 안에서 우주를 새로 쓰는 자가 되어라”라고 선언한다. 전달자는 변혁과 자기 극복을 촉구하는 혁명가로서, 기존 질서에 굴복하지 않고 내면의 힘으로 새로운 길을 열도록 도전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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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 배우는 사람의 의지를 촉발시키는 교육 혁명가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가르치려는 주제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도 학생들이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돕는 교사를 말한다. 스승으로서의 역할은 기존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무지한 자가 자신의 지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의지를 촉발시키는 데 있다. 《무지한 스승》은 우선 “모든 인간은 지적으로 평등하다”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유식한 스승이 무식한 제자에게 지식을 설명하거나 전수하는 과정이 아니다. 《무지한 스승》에서 가장 강조하는 말은 설명의 무한 퇴행이다.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제자는 설명을 또 들을 수밖에 없고 설명을 듣는 제자를 바보로 만드는 원흉이라고 생각한다. “우월한 지능을 가졌기 때문에 스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학생의 지적 능력에 맞추어 전달할 수 있고, 또 학생이 배운 것을 잘 이해했는지 검증할 수 있다. 이것이 설명의 원리다.


설명은 무지한 자를 깨우치고 열등한 위치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항상 열등에 위치에 머물러 있게 고착화시킴으로써 영원한 바보로 전락시키는 데 있다. 배움은 설명을 통해 이루어지기보다 스승의 의지와 제자의 의지가 만나는 곳에서 불꽃처럼 섬광의 깨달음이 일어나면서 발생한다. 진정한 전달자는 없는 능력을 키워주는 문제가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의 의지와 배우려는 사람의 의지가 만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나가는 교육혁명가다. 진짜 배움에 필요한 것은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려는 의지의 여부다. 뭔가를 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설명하는 스승은 불필요하다는 입장이 교육혁명가로서 전달자의 확고한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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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헤르만 헤세의 마음의 정원사 — 내면의 고요와 성장을 가꾸는 영혼의 조경가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문장이다. 전달자는 지금 이 자리에 머물고만 싶은 마음을 떨치고, 굳어진 습관과 고정관념의 틀을 스스로 깨뜨리려 애쓰는 내면의 잠재의식과 욕망에 불을 지피는, 일종의 타성 파괴자다. 헤세는 특히, 격변하는 외부 세계와 출렁이는 내면의 자연을 하나로 어우르며 진정한 평화를 찾으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걸어야 할 수행임을 강조했다. 전달자는 마음속 정원에 상처와 희망이라는 서로 다른 꽃씨를 심어, 성장과 치유가 가능해질 공간을 만들어 내는 존재다. 그는 조용히 속삭인다. “상처받은 땅에 물을 주듯, 너의 영혼에도 자비와 꿈을 심어야 해.” 마치 스스로 내면의 고요를 들여다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듯하다.


결국 전달자는 상처 위에도 희망의 씨앗이 뿌려져 싹틀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작은 싹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돌보며 내면의 평화와 성숙으로 이끄는 조경가와도 같다. 자아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에게 그는 말한다. 고통과 인내의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배움의 끈을 놓지 않으면 누구든 언젠가는 성장과 성숙의 경지에 다다른다고—마치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희망의 메아리처럼. 인간의 성장에는 언제나 갈등과 혼란이 뒤따르고, 때론 스스로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실감에 휩싸일 때도 많다. 그럴 때일수록 그는 다정하게 권한다. “네 내면의 정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렴. 그리고 잡초를 뽑는 데 시간을 들이면, 그곳이야말로 네가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는 첫걸음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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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다리 — 삶의 경험과 지혜를 매개하는 언어의 연금술사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를 결정한다. 전달자는 살아오면서 겪어낸 다양한 경험과 그로부터 생긴 실천적 지혜를 언어라는 다리로 후대에 이으며 전통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전달자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적확한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며 소통의 다리를 놓는 역할을 수행한다. 전달자는 누구보다도 언어를 벼리면서 바깥세상에서 보고 느끼며 깨달은 바를 창의적으로 표현, 후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내가 모르는 단어만큼 내가 모르는 세계가 존재한다. 전달자의 언어는 전달자의 생각을 품격 있게 표현하는 생각의 옷이다. 전달자가 아무리 좋은 경험을 많이 했어도 색다른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낯설게 표현할 수 없으면 타성에 젖은 언어로 천박하게 전달될 수밖에 없다. 전달자는 자신의 독특한 경험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 색다른 생각을 잉태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의 연금술사다.


전달과정에서 말문이 막하는 까닭은 내가 보유하고 있는 언어 꾸러미에 들어 있는 어휘의 경우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전달자가 수시로 “표현되지 않은 생각은 어둠 속의 그림자와 같다. 언어를 찾아내 그것을 빛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너의 삶을 이어가는 다리다”라고 설명하는 이유다. 전달자의 품격은 전달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격, 언격과 직결된다. 전달자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언어다. 특히 틀에 박힌 언어로 누구나 알고 있는 익숙한 표현을 하기보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진정한 전달자다. 대체 불가능한 전달자가 되려면 자기만의 언어로 자신의 경험적 지혜를 의미심장하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전달자에게 언어는 경험과 지혜의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건너 미지의 세계로 도전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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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들뢰즈의 리좀의 메신저 — 색다른 개념을 창조하는 우발적 마주침 디자이너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말하는 리좀(rhizome)은 땅속줄기 식물처럼, 하나의 시작점이나 끝이 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면서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이 자유롭게 연결되고 접속되면서 우발적으로 마주치는 유동적인 사고 체계를 말한다. 학습이라는 개념이 우발적으로 건강과 전문의사라는 개념을 만나 학습건강전문의사가 되는 것처럼 리좀은 세상에 숱한 많은 개념들의 울발적 마주침으로 색다른 사유를 잉태하며 마주침이 깨우침을 낳는 노력을 말한다. 리좀에 비추어본 전달자는 위계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들이 자유롭게 연결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는 사람이다. 서로 다른 참여자들이 낯선 생각들이 자유롭게 충돌하면서 수평적으로 지식을 교류하고 재구성하도록 돕는 촉진자가 되는 것이다. 마치 땅속에서 다양한 줄기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얽히고설키며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처럼, 전달자도 고정된 루트가 아니라 다채로운 접속 가능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열어 놓음으로써 학습자 스스로 리좀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게 만드는 역할이다.


따라서 전달자는 기존 지식을 전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낯선 지식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열어주는 게 중요한 역할이다. 즉 전달자는 지식의 단수 전달자가 아니라, 지식의 끊임없는 흐름과 확장을 위한 유동적인 통로를 개척하는 사람에 가깝다. 한마디로 리좀 개념을 전달자에 적용하면, 전달자는 청중에게 지식을 소개하는 매개자가 아니라 지식과 사유의 역동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존재다. 복잡한 인간관계에 상처받은 이에게 “모든 경험은 단선적이지 않다. 전달자는 “너의 삶은 수많은 이야기와 연결되어, 무한한 의미망을 형성한다는 점을 기억하라”라고 용기를 건네주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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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보르헤스의 미궁의 설계자 — 삶과 상상의 경계를 탐험하며 의미의 다층적 미로를 그리는 안내자


보르헤스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한 다층적 미궁 속에 인간 존재의 본질을 숨기는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보여준 작가다. 보르헤스에 비추어 보면 전달자는 각자가 미로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도록 이끌며, 미궁 자체가 곧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다층적 구조임을 보여주는 데 있다. 기존 전달자가 교사가 특정 이론이나 역사적 사건을 완벽하게 정리해서 학생들에게 "이게 정답이야!"라고 가르치고 학생들은 그 길을 따라가서 정답만 맞추면 되는, 즉 정답만 찾으면 되는 직선주로형 교육을 강조했다. 반면에 미궁 설계자형 전달자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가르칠 때, 단순히 연대기를 읊는 게 아니라 여러 학자의 상충하는 해석, 당시 인물들의 다양한 입장, 그리고 현재 이 사건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 갈등하는 관점을 제시하고 학생들에게 "자, 너희는 이 자료들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니?", "어떤 결론을 내리고 싶니?" 하고 스스로 미궁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안목과 혜안을 기르는데 목적이 있다.


마치 다양한 실마리가 얽힌 거대한 미궁을 보여주고, 학생들이 각자 탐험하며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나가도록 이끄는 주안점을 둔다. 선생님은 길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의미를 탐험할 수 있는 미궁 자체를 설계하고, 필요한 순간에 잠시 힌트를 주는 '안내자'로 머무르는 것이다. 기존 전달자ᅟ근 전문가가 복잡한 개념을 아주 쉽게 풀어서 요약정리해 주는 강연에 초점이 있다. 반면에 미궁 설계자형 전달자 특정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담론을 이끌어갈 때, 하나의 확정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여러 철학적 개념들을 연결하고, 반론의 여지를 남기며, 새로운 질문을 던져 학습자를 미궁에 빠뜨리는데 초점을 둔다. 참여자들은 그 질문들을 따라가며 스스로 사유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양한 관점들을 넘나들며 복잡하지만 풍요로운 지식의 미궁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다층적인 사유의 길을 걸어가면서 질문의 미궁을 '설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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