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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전달하는 것이다

전달자와 전달력, 좁힐 수 없는 거리에 대한 철학적 성찰

전달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전달하는 것이다:

전달자와 전달력, 좁힐 수 없는 거리에 대한 철학적 성찰


비 오는 어느 날 카페에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따뜻한 커피 향이 감도는 자리에 소설가 배수아, 아리스토텔레스, 존 듀이, 마이클 폴라니, 자크 데리다, 조자 레이코프가 한 자리에 모여 앉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계적인 석학들이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 기획하는 전달자의 존재이유와 그들이 발휘하는 역할에 비추어 볼 때 왜 어른들은 자신의 경험적 지혜를 전달하지 못하는지를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소설가 배수아의 언어의 틈새,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존 듀이의 하나의 경험, 마이클 폴라니의 암묵적 지식, 자크 데리다의 차연, 조자 레이코프의 체험적 은유에 비추어 어른의 전달력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방향과 왜 어른은 전달에 실패하는지를 저마다의 철학적 신념과 개념을 근간으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기획해 보았다. 오늘 사회자는 이 토론의 기획자인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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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생태학자: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며) 이런 비 오는 궂은 날씨에도 소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평생 동안 ‘어른의 전달력’에 대해 연구하고 개발해 왔습니다. 그런데 깊이 파고들수록, 삶으로 축적한 실천적 지혜를 올바르게 전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다른 삶으로 깨달은 실천적 지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해명하고 싶었습니다. 우선 자신이 주장하는 핵심개념에 비추어 어른의 전달력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방향을 간략하게 제시해 주시고, 왜 어른은 전달에 실패하는지,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담은 핵심 개념에 비추어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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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틈새는 의미가 새롭게 잉태되는 창조적 공간이다


배수아: (찻잔에서 피어나는 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잔잔한 목소리로) 음... 제가 《당나귀들》에서 언급한 ‘언어의 틈새’라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바로 그 틈새에, 어른이 전달하는 힘이 가야 할 방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른들이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적 지혜라는 건 사실 너무나도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데다, 어떤 건 말로는 도저히 다 드러낼 수가 없거든요.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다 전하지 못하는 미묘한 차이들, 말과 말 사이의 숨은 의미, 그리고 듣는 사람이 스스로 채워야 할 여백들이 늘 남아 있는 것처럼요.


기쁨, 슬픔, 성공, 실패… 이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엔 아주 복잡하고도 미묘한 ‘지혜의 덩어리’가 됩니다. 문제는 이 지혜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감정이나 직관, 맥락, 그리고 비언어적인 부분까지 모두 포함한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언어의 틈새’가 생길 수밖에 없는 거죠. 아무리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말을 한다 해도, 우리가 가진 언어가 이 모든 것을 다 담아내진 못해요. 언어라는 건 본래 선형적이고, 개념적으로 배열되지만, 사람의 경험은 훨씬 입체적이고 모호한 지점이 많잖아요. 말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감정이나, 순간 번득이는 직관 같은 걸 굳이 말로만 다 표현하려 들면, 도리어 깊이나 풍부함이 옅어지고 껍데기만 남기도 해요.


그래서 어른들이 이 틈새를 외면하고, 자기 경험을 완전히 언어로 전달하려고 애쓰다 보면 종종 답답함이나 좌절을 느끼게 돼요. ‘나는 분명히 다 설명했다는데, 왜 못 알아듣지?’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결국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아서일 수 있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저는 이 ‘언어의 틈새’야말로 어른들이 꼭 바라봐야 할 가치 있는 공간이라고 봐요. 이 틈새 덕분에 듣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경험을 돌아보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적 공간’이 자연스럽게 열리거든요.


어른의 지혜는 정답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의 마음속에 또 다른 질문을 싹 틔우는 씨앗 같은 게 아닐까요. 오히려 언어가 완벽하지 않기에, 그 부족함 속에서 더 깊은 성찰과 진짜 소통이 이루어질 기회가 생깁니다. 그래서 어른이라면, 자신이 전달하는 말의 틈과 여백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여백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힘을 실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듣는 사람이 그 틈을 스스로 메우고 자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용히 안내해 주는 것도 어른의 역할인 것 같아요.


결국, ‘언어의 틈새’는 어른의 지혜가 완벽하게 전달될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듣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지혜를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기도 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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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지혜는 심사숙고 끝에 내리는 과감한 결단과 행동의 산물이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 배수아 작가님 말씀 듣고 나니까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 같았어요. 역시 언어의 깊이는 정말 끝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럼 이번엔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실 차례인가요?


아리스토텔레스: (온화한 미소를 띠며) 지식생태학자님, 그리고 여기 모이신 지혜로운 분들, 이런 사색의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제 생각에 어른의 전달력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방향은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의 계승에 있다고 봅니다. 어른의 지혜는 책에서 얻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에요.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일을 직접 겪으면서 올바른 선택을 하고, 더 나은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쌓이는 ‘실천적인 지혜’죠. 이론이나 기술에 기반한 지식과는 달리, 실천적 지혜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실천적 지혜는 딜레마 상황이나 여러 가지 해답이 가능한 회색지대에서 빠른 숙고 끝에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고 과감하게 실행하는 능력이다. 매뉴얼이 통용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성공지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 다양한 변수가 미지수가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하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과감한 결단과 시행착오를 통해 판단착오를 줄여나가는 방법 밖에 없다. “이렇게 하는 게 옳다” 하고 단정하기보다는 “나는 이런 고민 끝에 이렇게 행동했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 하고 자신만의 경험과 생각을 솔직하게 들려주는 게 더 의미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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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또는 어떤 고민 끝에 문제를 해결했는지, 그 실질적인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게 바로 바람직한 전달 방식이에요. 많은 어른들이 자신이 힘들게 얻은 지혜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실천적 지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암기하는 지식처럼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숫자 공식이나 역사적 사실처럼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진리로 여겨서 “내가 해봤더니 이게 맞아” 식으로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의 처지와는 점점 멀어지죠. 실천적 지혜는 항상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건데, 틀에 박힌 답처럼 내놓아버리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와닿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예전에는 이랬어, 그러니까 따라만 해”처럼 결론을 강요하면 더더욱 그렇고요.


어떤 문제의 해법을 설명서처럼 알려주고,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밀어붙이면 전달은 실패하기 쉽습니다. 실천적 지혜의 핵심은 ‘이렇게 하면 된다’는 기술적 답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는 무엇이 옳을까?’에 대한 고민이에요. 그래서 누군가가 직접 판단해 볼 기회를 앗아가면, 결국 진짜 지혜는 전해지지 않게 되죠. 게다가 어른이 자신이 지혜를 배웠던 예전의 환경과, 지금 듣는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또 실패해요. 과거에 통했던 방법이 오늘날에는 의미 없을 수도 있는데, 무작정 “내가 해보니까 이게 답이야”라고 하면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기 힘들죠. “내가 왕년에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 잘 통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에요.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진짜 현명한 전달은 ‘물고기 잡아서 주는 법’이 아니라 ‘물고기를 스스로 잡을 수 있게 돕는 법’을 알려주는 것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물고기만 그냥 주거나, 잡는 방법만 무조건 따르라고 하면 실제로 지혜가 전해지진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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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경험은 하나의 완결된 경험적 성취감이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 와우,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의 지혜로운 말씀까지 들으니 정말 이 자리가 더 풍성해지는 것 같아요! 배수아 작가님의 ‘언어의 틈새’와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의 ‘실천적 지혜’는 전달력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음은 존 듀이 선생님의 하나의 경험에 비추어 전달력의 본질과 핵심에 비추어 전달자가 왜 실패하는지 여쭤보겠습니다.


존 듀이: (활기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지식생태학자님, 좋은 토론의 장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전달자는 궁극적으로 제가 《경험으로서 예술 1》과 《경험으로서 예술 2》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의 경험(an experience)’을 창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은 그냥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어떤 만족스러운 해결에 이르는 ‘완결된 과정’을 ‘하나의 경험’입니다. 예를 들어, 산책을 하는 것도 그냥 걸어가는 게 아니라, 특별한 풍경을 발견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그 경험을 되새기는 모든 과정이 통합될 때 비로소 ‘하나의 경험’이 되는 거죠.


하나의 경험은 소극적 경험(Passive Experience)과 적극적 경험(Active Experience)으로 나뉘는데 소극적 경험은 그냥 외부적 자극이 제공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감각적 깨달음입니다. 이에 반해 적극적 경험은 주체가 문제 상황에 직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탐구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면 지나가다 단풍이 들어가는 풍경을 보고 직관적으로 소리 지르며 감탄하는 게 소극적이고 1차적인 경험이라면 그 경치의 아름다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풍경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과정이 적극적 경험이고 2차적 경험입니다.


제가 생각해 볼 때 진정하 전달자는 듣는 이가 ‘소극적 경험’에 머무르게 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인 하나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지혜를 구성하도록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경험의 재구성자입니다. 전달자는 자신의 지혜를 일방적으로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가 그 지혜를 통해 스스로 문제에 직면하고, 탐구하며, 해결에 이르는 ‘하나의 경험’을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이건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실제적인 참여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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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적 지혜를 나누는 전달자는 듣는 이가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탐구와 문제 해결의 과정을 통해 의미 있는 배움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시행착오조차도 하나의 소중한 경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거기서 배움을 얻도록 격려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제가 생각해 볼 때 전달자가 실패하는 이유는 ‘소극적 경험’만을 강요하거나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경험적 지혜를 단순히 정답이나 해야 할 일 목록처럼 주입할 때 실패합니다. “그냥 내 말대로 해”,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와 같은 방식은 듣는 이의 능동적인 사고와 참여를 막고, 수동적인 태도만을 유발합니다. 듣는 이는 어른의 지혜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겉핥기식 이해에 그치게 되는 것이죠. 어른들이 경험에서 얻은 여러 파편적인 정보나 교훈을 무작정 늘어놓을 때 전달은 실패해요. 이것들은 듣는 이에게 의미 있는 ‘하나의 경험’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그저 무의미한 지식의 조각들로만 남아요. 마치 재미없는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요. 듣는 이는 어떤 맥락에서 그 지혜가 나왔는지, 왜 그 지혜가 자신에게 필요한지 공감하지 못하게 되죠.


결론적으로, 존 듀이 선생님의 통찰은 어른의 전달력이 ‘경험’이라는 강력한 학습 도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듣는 이가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탐구하며, 자신의 삶에서 의미 있는 ‘하나의 경험’을 만들어나가면서 높은 성취감을 얻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전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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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적 지식은 설명할 수 없는 앎이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 우와, 존 듀이 선생님 말씀까지 들으니까, 전달자는 자신의 경험적 지혜를 명쾌하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청중이 직접 하나의 경험을 통해 높은 성취감을 맛보게 하면서 스스로 경험을 재구성 과정에서 통찰을 얻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경험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이번엔 마이클 폴라니 선생님의 암묵적 지식이라는 개념에 비추어 전달력과 전달자의 본질과 핵심에 대해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이클 폴라니: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미소 지으며) 여러분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특히 존 듀이 교수님의 ‘하나의 경험’이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생태학자님, 저에게 전달력이 나아가야 할 이상적인 방향은 바로 제가 《개인적 지식》에서 말한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을 인식하고 이를 존중하는 데 있습니다. 레시피나 매뉴얼, 공식처럼 말이나 글로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명시적 지식과 달리, 암묵적 지식은 언어나 텍스트로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암묵적 지식은 오랜 경험과 학습을 통해 몸에 밴 주관적인 신념이나 철학, 그리고 열정이 녹아 있는 깨달음에 더 가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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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전달자는 바로 이 암묵적 지식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듣는 사람이 직접 그 지식을 체득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전달자가 가진 진짜 지혜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 ‘암묵적 지식’에 담겨 있습니다. 이 지식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듣는 사람이 직접 경험하고 몰입하며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 해요. 예를 들어, 어떤 기술을 가르칠 때 단순히 매뉴얼만 보여주는 대신, 옆에서 함께 실습하면서 몸으로 익히게 돕는 것처럼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은 ‘보여주기’나 ‘함께하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전달됩니다. 결국 진짜 배움은 지식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몸과 마음, 감각 전반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체득할 때 이뤄집니다. 이 과정에서 전달자는 언어적 설명만이 아니라,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방법까지 적극 활용해야 듣는 이가 지식과 자신을 유기적으로 이어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암묵적 지식 전달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지식을 명시적으로, 공식이나 매뉴얼처럼 전달하려는 태도 때문입니다. 전달자가 자신의 직관이나 노하우, ‘손맛’ 같은 부분까지 “이대로만 외워라”, “이렇게만 해라” 식으로 강요하면, 암묵적 지식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요. 이런 지식은 머리로 주입한다고 해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 반복적인 경험과 실천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거든요. 만약 전달자가 듣는 이에게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나 몸소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결국 학습은 이론 수준에만 머물고 맙니다. 마치 수영을 이론으로만 가르치고, 물에는 한 번도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결국 중요한 것은, 전달자가 지식의 복잡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특히 암묵적 지식이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차원에 대해 깊게 고민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가 스스로 ‘체득’하고 ‘내면화’할 수 있는 환경, 경험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 진정한 전달자의 몫입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전달이란 암묵적 지식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강요보다 예시와 함께하는 실천을 통해 다음 세대가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도록 이끄는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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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미끄러진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 와, 마이클 폴라니 선생님의 ‘암묵적 지식’에 비추어 본 전달자의 역할과 실패 원인을 들어보니까 설명할 수 없는 불분명하지만 내 몸에 각인된 지혜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걸 경험을 통해 전달할 방법을 개발하는 일에 매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번에는 자크 데리다 선생님이 주장하시는 ‘차연(différance)’ 개념에 비추어 논의를 이어가지 죠.


자크 데리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한번 쓱 훑어보더니, 나지막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좋습니다. 전달력이라는 주제에 대해 논하자면, 저는 필연적으로 제가 《Margins of philosophy》에서 주장한 '차연'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의 전달력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방향은, 바로 이 차연의 존재를 인정하고, 심지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차연은 차이를 명사로 보지 말고 부단히 의미가 미끄러지면서 변화를 거듭하는 동사로 보자는 문제의식에서 잉태된 개념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전달하려 할 때면, 상대가 그것을 곧바로, 완전히 이해해 주길 바라게 마련이죠. 하지만 언어라는 건 본래부터 완벽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없어요. 단어 하나의 의미는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 속에서만 만들어지고, 그 의미는 늘 조금씩 미뤄지거나(유보) 또 완전히 닿지 못한 채로 남아 있곤 합니다. 그러니까 언어라는 건 결코 딱 고정된 의미만을 지니지 않고, 늘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를 통해 구성되죠. 그래서 완전한 의미 전달은 결국 미래로 계속 미뤄지게 돼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 뜻은 늘 흔들리고, 한 가지 의미로만 해석될 수 없어 여러 방향의 이해가 가능해지는 겁니다. “딱 이거야!” 하고 정확히 전달되는 의미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셈이죠.


어른의 지혜를 후대에 전하려는 마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 지혜라는 것도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이미 원래 의미와는 어딘가 달라지고, 새로운 해석이 일어납니다. ‘차연’이라는 생각에 비춰볼 때, 진짜 이상적인 전달자란 의미의 불완전함과 유동성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듣는 사람이 더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전달자는 자신이 나누려는 지혜가 단 한 번에 꽉 들어맞는 진리나 유일한 정답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해야 해요. 언어의 한계 때문에, 어떤 경험이나 깨달음도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즉시 수많은 해석의 길이 열리고 마는 거죠. 사실 이걸 이해하는 게 오히려 바람직한 전달의 출발선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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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작가가 했던 말과도 이어집니다. 많은 어른들은 언어 속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틈’이나 ‘여백’을 메우려고 하지만, 오히려 이런 빈 공간을 더 용기 내어 이용할 필요가 있어요. 언어는 분명히 힘 있는 도구지만, 동시에 담아내지 못하는 미묘한 틈이 늘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틈은 듣는 이에게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를 주기도 하죠.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 말이 왜곡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로만 생각해 괜히 실망하게 됩니다. 굳이 모든 걸 빠짐없이 설명하는 대신, 일부러 비워두기도 하고, 상대가 의문을 가질 만한 지점도 남겨둠으로써, 듣는 이가 스스로 곱씹거나 질문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만들어 가도록 이끄는 게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지혜를 일방적으로 주입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자기 상황과 맥락 안에서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의미를 다시 만들어내도록 도와주는 거죠. 어른이라면 ‘고정된 의미’를 심어주려 애쓰기보다, 끊임없이 의미가 새로워질 수 있는 지적 장을 열어주는 역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달이 실패하는 주된 이유는 언어와 의미가 완벽하게 닿을 수 있고, 고정돼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전하는 이야기가 상대에게 오차 없이 전해지고, 오직 하나의 정해진 뜻으로 이해되길 바랄 때 오히려 정말로 그 전달은 실패하게 되죠. 언어는 그 자체로 늘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 속에서만 의미를 얻고, 완성된 이해란 늘 어딘가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대의 오해나 재해석을 무조건 실패로 간주하고, 결국 소통에 벽이 생깁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경험을 변치 않는 진리, 일종의 ‘원본’처럼 여기고, 젊은 세대의 해석이나 반론은 애초에 인정하지 않을 때, 전달은 완전히 단절됩니다. 어른의 지혜란 결국 그 어른 고유의 경험과 시간, 맥락에서 비롯된 건데, 이를 타인의 삶이나 또 다른 세대의 현실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다면 반드시 어긋남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차연’이라는 생각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어른이 언어의 본질적 한계와 의미의 불안함을 제대로 인식하고, 듣는 이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해석과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열린 태도로 다가갈 때—진짜 더 깊고 풍요로운 소통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완벽한 전달이라는 건 어쩌면 환상일 수 있지만, 그런 불완전함 덕분에 오히려 끝없는 창조와 확장의 기회가 숨어 있게 됩니다. 전달은 결코 ‘일방적 도착’이 아니라, 언제나 계속되는 여정에 더 가깝지요. 전달자가 완전무결한 의미만을 전달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듣는 이가 자기만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언어와 의미의 경계를 흔들고 넓힐 기회를 건네줘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차연’이 우리에게 열어주는 진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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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자는 의미의 다리를 연결하는 은유 설계자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 데리다 선생님의 ‘차연’ 개념은 평소에 생각했던 ‘전달’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는 파격적인 신념이자 전달자의 역할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혁명적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달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서도 재고해 보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조지 레이코프 선생님의 의견을 들어볼 시간인가요? 전달자의 필살기, 체험적 은유법에 대해 설명해 주실 것 같아서 기대가 큽니다.


조지 레이코프: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데리다 교수님의 깊이 있는 통찰에 이어, 저는 우리가 ‘전달력’에 대해 생각할 때,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인지하는지부터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체험적 은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진짜 중요한 전달이란 듣는 사람의 경험 속에서 지혜를 다시 짜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단순히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각자 살아오면서 쌓아온 물리적 경험이나 사회문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추상적인 개념을 자연스럽게 ‘은유’로 풀어낸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시간’을 ‘돈’처럼 여기기도 하고, ‘사랑’을 ‘여행’에 빗대기도 하죠. 어른들이 주는 경험의 지혜도 이런 식의 은유 안에서 이해되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앞서 간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는 자라온 시대도 다르고 겪어온 일 역시 많이 다르다 보니, 똑같은 은유를 써도 그 근저에 깔린 경험적 토대가 달라서 생기는 오해가 늘 생깁니다. 그래서 올바른 전달이란 어른이 자기만의 은유만 내세우기보다는, 상대가 지금 어떤 은유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부터 살피고, 그에 맞는 새로운 ‘체험적 은유’를 찾아내서 지혜를 포장해 주는 데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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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적 은유의 관점에서 보면 전달자는 자기 머릿속 은유 체계에만 머무르지 않아야 하죠. 듣는 이의 생각과 문화, 그리고 살아온 맥락까지 한 걸음 더 들어가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체험적 은유’—즉, 비유와 그림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진짜로 지혜를 건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나눌 때는 듣는 사람이 지금 어떤 틀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젊은 세대라면 요즘 어떤 방식으로 추상적인 개념을 풀어내는지부터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요즘 젊은 세대가 ‘인생’을 게임 플레이에, ‘성공’을 멋진 자동차로 치환해서 비유한다면 이를 이해하고 따라가는 노력이 먼저입니다. 내가 쌓은 지혜를, 듣는 이의 경험과 문화에 맞춘 ‘체험적 은유’로 한 번 더 번역해서 건네야 잘 닿습니다. “옛날엔 말이야…” 같은 낡은 비유를 고집하기보다는, “요즘 네가 하는 ‘~’ 같은 거야”처럼 새로운 비유로 다가가야 공감도 잘 생깁니다. 예를 들어 ‘꾸준함’이란 주제를 설명할 때도 “소 팔아 쥐 잡는다” 식의 옛말보다는 “게임에서 매일 퀘스트 깨듯 계속해야 효과가 쌓이는 거야”라 표현하면 훨씬 더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죠.


결국 전달자는 자신의 경험적 지혜와 상대의 현실 경험을 이어주는 단단한 ‘은유의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듣는 이가 삶의 교훈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경험하게끔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은유를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지혜가 단순한 추상적 정보가 아니라 생생한 경험으로 바뀌어 흡수됩니다. 전달자는 경험적으로 깨달은 지혜를 청중이 구체적인 현실에 비추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법을 창조하는 은유 설계자(Metaphor Designer)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전하려다 실패하는 이유는, 자기만의 ‘체험적 은유’가 보편적일 거라고 착각해 상대의 인지적 배경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노력이라는 개념을 “흙수저가 용 된다” 혹은 “고생 끝에 낙” 같은 식으로 비유할 때, 정작 젊은 세대는 “투자 효율”이나 “성과 관리” 쪽으로 은유하는 경향이 있죠. 이런 은유의 충돌은 서로서로 언어가 엇갈리는 것과 같아서, 결국 제대로 뜻이 전달되지 못합니다. 구체적 경험에 뿌리내리지 않은 추상적 말만으론 아무리 진심이 담겨 있어도 마음을 움직이긴 어렵죠. 사람의 뇌는 추상을 이해하려 할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만의 구체적 경험에서 끌어온 생생한 이미지를 찾으려 합니다. 만약 전달자가 이런 연결 고리를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듣는 이는 어렵고 지루하다고 여기거나 아예 마음을 닫아버리기 쉽습니다.


결국 ‘체험적 은유’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진정한 전달력이란 단순히 지식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듣는 사람의 ‘인지적 지도’ 위에 맞춰 지혜를 새롭게 빚고 연결하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상대의 눈높이와 경험에 딱 맞는 은유를 찾아 말을 건넬 때, 진짜 마음 깊이 스며드는 전달이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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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 지금까지 소설가 배수아의 ‘언어의 틈새’,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존 듀이의 ‘하나의 경험’, 마이클 폴라니의 ‘암묵적 지식’, 자크 데리다의 ‘차연’, 조자 레이코프의 ‘체험적 은유’에 비추어 전달력의 이상적인 방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왜 전달에 실패하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언어의 한계로 우리가 ‘하나의 경험’을 통해 축적한 ‘실천적 지혜’와 ‘암묵적 지식’을 ‘체험적 은유’로 표현하려고 노력해도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미끄러지면서 다른 의미로 태어나는 ‘차연’과 ‘언어의 틈새’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전달의 실패를 방지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언어의 틈새’에서 의미가 새롭게 잉태된 창조적 가능성을 열어놓고 청중으로 하여금 여백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기회를 주는 방법도 새로운 전달 전략이 될 수 있음도 깨달았습니다. 미완성이기에 완성을 향하는 노력이 계속될 수 있다는 희망이 전달자에게는 이전과 다른 노력으로 의미전달에 매진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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