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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쓰기는 쓰기가 아니다.
‘애쓰기’이자 ‘거시기'다

누구나 책을 쓰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아무나 쓸 수 없는 6가지 이유

책 쓰기는 쓰기가 아니다. ‘애쓰기이자 거시기!

누구나 책을 쓰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아무나 끝까지 쓰기 어려운 6가지 이유   

  

책 쓰기는 책을 쓰는 행위다. 책을 쓰는 행위는 책을 만들어내는 노력이다. 책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책을 쓰려면 글을 써야 한다. 문제는 글을 쓴다고 책이 되지 않는다. 글이 책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주제나 핵심 메시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실천하며 보고 느낀 점들을 일정한 논리적 구조와 체계에 따라 목차를 정해서 꿰어내야 한다. 일관된 문제의식 없이 생각날 때마다 썼던 글이라도 그 글을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나 문제의식으로 녹여내는 이차 작업이 필요하다. 그 작업은 책 쓰기 방법이나 기교를 배운다고 쉽게 되지 않는다. 책 쓰기는 제목을 정하고 목차를 쓰며 본문에 해당하는 글을 어떻게 쓰는지 배운다고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애쓰기다. 책으로 엮을 수 있는 삶이 있는 사람, 그런 삶을 글로 녹여낼 의지가 있는 사람이 도전하면서 사투 끝에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고된 노동의 여정이다. 책 쓰기는 기술이 대신해줄 수 없는 온전히 내가 부담해야 되는 일부 정신노동이자 거의 전부 육체노동이다. 애쓰지 않고 나올 수 있는 책은 대필 작가가 써준 책일 뿐이다. 내 몸으로 살아온 삶을 내가 갖고 있는 언어로 녹여내는 고된 작업이다. 다만 글 쓰는 표현력이나 수사력을 익히면 도움은 된다. 그것도 글을 쓰면서 익힐 수 있는 것이지 눈으로 책을 읽는다고 저절로 내 몸으로 각인되는 게 아니다. 글쓰기든 책 쓰기든 안간힘을 쓰면서 몸으로 밀어가면서 토해내는 애쓰기다. 애쓰지 않고 쓰는 글이나 책은 쓰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쓰임을 받지 못한다. 특히 책 쓰기는 더욱더 오랜 시간 동안 버티고 견디면서 살아온 삶을 토해내는 애쓰기다. 책 쓰기는 쓰기가 아니다. 애쓰기다.      


책 쓰기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합적인 과정의 산물이다. 책 쓰기는 우선 ‘집짓기’다. 집을 짓기 위해 터를 마련하고 어떤 집을 지을지를 구상하는 것처럼 책 쓰기도 시작하기 전에 내 책 안에 어떤 독자를 불러들여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를 구상하는 설계도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둘째, 책 쓰기는 ‘생채기’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상처를 드러내는 과정이자 책을 쓰는 과정에서 오뚜기(오뚝이)처럼 넘어지면서 깨달은 역경을 경력으로 재창조한 ‘생채기’의 산물이다. 책을 쓰는 과정 자체도 좌절과 절망의 연속이다. 책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원고를 붙잡고 하얀 밤을 지새우며 받은 ‘생채기’ 위에서 핀 꽃이다. 셋째, 책 쓰기는 ‘돋보기’다. 책은 뻔한 일상을 청진기로 진단하고, 익숙한 현상을 색다른 눈으로 관찰하는 ‘돋보기’의 작품이다. ‘돋보기’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살아가는 삶도 책으로 쓸 수 있는 아이디어의 보고다. 넷째, 책 쓰기는 ‘청소기’다. 책은 내가 옳다고 믿었던 신념체계도 고정관념이자 습관적으로 살아오면서 생긴 타성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대오각성의 산물이다. 책 쓰기는 그래서 타성과 고정관념을 ‘세탁기’에 넣어 세척하고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통념을 없애버리는 ‘청소기’다. 다섯째 책 쓰기는 ‘필살기’다. 책은 ‘제각기’ 살아온 저마다의 색다른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녹여낸 독창적인 칼라와 스타일의 산물이다. 내 책에는 그 누구도 모방하기 어려운 나만의 ‘필살기’가 담겨 있는 이유다. 여섯째, 책 쓰기는 ‘이야기’다. ‘필살기’는 ‘이야기’가 만든다. ‘갑자기’ 당한 사건과 사고를 어떻게 극복해냈는지를 자세히 기록하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스토리가 생기고 그 소토리가 그 사람의 역사(history)를 만들어간다. 책 쓰기는 결국 내 삶을 스토리로 직조해내는 과정이다. 책 쓰기는 ‘집짓기’이자 ‘생채기’이며, ‘돋보기’이자 ‘청소기’이고, ‘필살기’이자 ‘이야기’다. 결국 책 쓰기는 한 두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거시기’다.           


             

책 쓰기는 집 짓기다:

책 쓰기는 기본기를 닦으며 터와 구조를 잡아가는 집짓기.     


소설가 안정효는 《글쓰기 만보》에서 초고는 집 짓기에, 고쳐 쓰기는 실내 장식에 비유했다. 집을 지으려면 우선 어디에 집을 지을 것인지, 집을 짓는 목적이 무엇인지, 집을 지으면 그 집에 누가 살 것인지, 짓고 싶은 어떤 스타일인지를 알아야 건축 설계사가 짓고 싶은 집에 대한 설계도를 그릴 수 있다.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원시인들이 은신처를 마련하기 위해 주변에 가용한 도구와 재료를 활용해서 짓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집 짓기는 모두 설계도면을 근간으로 시작된다. 책 쓰기 이전에 글짓기도 집 짓기와 비슷하다. 글을 쓰기 전에 이 글을 쓰는 목적과 문제의식은 무엇인지, 독자에게 전달하고 글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지, 누가 이 글을 읽을 것인지, 어떤 스타일의 글을 쓰기 시작할 것인지, 그리고 글은 어떤 논리적 흐름으로 갖고 자신의 주관을 펼칠 것인지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물론 초기에 이런 문제를 완벽하게 밝힌 다음 쓰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정도 거친 프레임을 갖고 우선 시작해서 글을 쓰는 과정에서 보다 분명한 목적의식과 메시지, 그리고 타깃 독자가 결정될 수도 있다.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해서 글을 쓰려고 하다가 한 줄도 못 쓰고 난처함에 빠지는 경험을 누구나 한두 번은 해보았을 것이다. 실제로 글은 쓰면서 글의 다양한 소재가 연상되어 쓰기 전에 갖지 못했던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책 쓰기는 글쓰기와 좀 다르다. 글쓰기는 한 가지 주제로 구도를 완벽하게 설계하지 않고도 완주할 수 있는 단거리 경주다. 반면에 책 쓰기는 쓰고자 하는 책의 전체 컨셉과 방향을 정하고 누구를 위해서 왜 책을 쓰려고 하는지, 쓰고 싶은 핵심 메시지와 그것들의 관계를 어떻게 구성해서 쓸 것인지를 어느 정도 정하고 쓰는 마라톤 경주다.     



쓴 글을 여러 개 모으면 책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글을 써 놨어도 일정한 논리체계와 구조 없이는 한 권의 책으로 꿰어지지 않는다. 집을 짓기 전에 결정해야 될 수많은 요소들, 왜, 누구를 위해서, 어디에 집을 지을 것인지, 그 집 내부 구조는 어떻게 할 것이며, 집 전체 모습과 스타일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고서는 집 짓기를 시작할 수 없다. 글짓기는 집 짓기와는 다르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슨 내용으로 글을 쓸 것인지를 개략적으로 정한 다음 글을 쓰면서 더 선명하게 정립할 수 있다. 하지만 책 쓰기는 글짓기와 다르게 집 짓기처럼 초기에 결정해야 될 사항이 어느 정도 결정되지 않고서는 시작할 수 없다. 물론 책을 쓰는 와중에 타깃 독자를 바꿀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책을 쓰는 목적과 핵심 메시지, 그리고 이들 간의 논리적 관계와 구조도 더불어서 바뀔 수도 있다.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가능성도 집 짓기의 설계도처럼 책 쓰기의 구도가 어느 정도 정해졌을 때 책을 쓰는 과정에서 목적과 타깃 독자를 바꿈으로써 관련된 다른 책의 구성요소도 더불어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책을 글과 다르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시작할 수 없다. 공략하고 싶은 핵심 주제를 누구를 위해서 왜 쓸 것인지가 결정하지 않은 채 수많은 글을 작가 마음이 끌리는 대로 쓸 수 있다. 하지만 그 많은 글이 자동적으로 한 권의 책으로 엮이지는 않는다. 책은 써 놓은 글을 그냥 묶어서 물리적으로 합치는  노력이 아니라 일정한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을 정한 다음 전해주고 싶은 핵심 메시지를 염두에 두고 비교적 오랫동안 글을 일관되게 써서 화학적으로 버무리는 과정이다. 건축 자재를 다 합치면 그냥 집이 되지 않듯이 쓴 글을 다 합친다고 한 권의 책으로 탄생되지 않는다. 누가 내가 글로 지은 집 속에 들어와서 살 것인지, 그 사람의 취향이 무엇인지를 알고 집주인의 취향을 저격하는 책 쓰기를 시작하려면 시작하기 전에 집 짓기에 필요한 설계도처럼 책 쓰기를 위한 설계도가 필요하다. 책 쓰는데 필요한 기본, 책을 쓰는 목적과 이유, 책에 담고 싶은 핵심 메시지와 타깃 독자, 책의 스타일과 구조를 만들어내는 일은 책 쓰기의 기본기에 해당된다. 기본기를 탄탄하게 닦을수록 튼실한 책 쓰기가 이루어질 수 있다.  

   

책 쓰기는 생채기다-:

책 쓰기는 오뚜기처럼 넘어지며 역경을 극복하는 아름다운 생채기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시인의 ‘농담’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책 쓰기는 즐거웠던 추억보다 아팠던 경험을 재료로 쓴다. 곤경으로 겪은 아픈 경험도 쓰다 보면 아름다운 풍경으로 각색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희덕 시인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하다. “‘쓰다’라는 동사의 맛이 항상 쓴 것은 아닙니다.” 나희덕 시인의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의 일부 구절이다. 지식채널 e의 ‘경험은 안주인이다’에는 “세상이 타락했다. 어린것들은 더 이상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잡것들이 너나없이 책을 내려고 한다”는 고대 로마 철학자 키케로의 말이 나온다. 이어서 반전이 시작된다. 잡것들에 해당하는 작가들이 등장한다. 1819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3세에 학교를 중단, 상점의 잔심부름과 농장일 등을 하다가 22세에 포경선의 선원이 되어 남태평양으로 떠난다. 포경선의 체험으로 소설 《백경》을 쓴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이야기다. 1883년 7월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죽기 2년 전까지 14년 동안 보험국의 관리로 근무했고 일을 썩 잘한다는 말을 들었다. 죽을 때까지 보험국의 관리로 일했던 체험을 녹여가며 창작과 직장생활을 함께 했던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거대한 조직 속에서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변신》, 《성》 등의 작품을 통해 그려냈다. 1804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나 35세 우체국장이 되려다 실패하고 대신 세관에 취직한다. 판에 박은 일들을 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세관에서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세관의 해묵은 서류철에서 <주홍빛 누더기 천과 대문자 A>를 만났고, 소설 《주홍글씨》가 탄생했다. 1812년 영국 포츠머스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감옥에 갔던 12세 무렵부터 공장에 다니면서 일해야 했다. 불우한 아동 노동자였던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에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의 신랄한 현실 묘사가 가능했다. 그래서 "경험은 글을 잘 쓰는 모든 이들의 안주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언으로 반전된다. 잡것들이 아니면 누가 작가가 되랴! 세상의 모든 책은 잡것들의 작품이다. 잡것들이 작가들이다.     



책 쓰는 경험도 상처 받은 얼룩을 무늬로 바꾸는 과정이지만 책 쓰기 자체도 스스로가 상처 받는 과정이다. 본래 목적이나 의도에서 벗어나 좌충우돌하기도 한다. 목적지로 가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경우도 있다. 마치 맹인이 길을 걸으면서 여러 장애물에 부딪치며 걷듯이 책 쓰기도 부딪침의 산물이다. 맹인 전화 교환원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출근한다. 그녀에게 누군가 물었다. 출근하기 힘들지 않냐고? “네, 힘들긴 힘들지만/여기저기 부딪치면서 걷기 때문에/그럭저럭……부딪치는 것이 있으면/오히려 안심이 되는걸요.”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가 걸어갈 수 있는 방법은 부딪치며 걷는 것이다. “부딪치는 사람이나 사물을/세상이 내민 거친 호의로 여기며/그것들은 오히려/그녀를 생생하게 긴장시키는 것/친근한 장애물/존재의 촉감/부딪쳐 오는 모든 것들에 자신을 맞부딪쳐/부싯돌처럼 상쾌하게 불꽃을 일으키면서/걸어가는 그녀.” 요시노 히로시가 쓴 동사 '부딪치다'라는 시에 나오는 말다. 책 쓰기는 한 번에 일사천리로 끝을 향해 달려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숱한 좌절과 절망을 먹으면서 힘든 사투 끝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상처다. 첫 페이지를 쓰기 시작해서 마지막 페이지로 가는 길도 정해져 있지 않다.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도 없다. 불확실성은 늘 곁에서 저자를 괴롭히고 불안감은 수시로 날아들며 하얀 밤을 새우게 만든다. 잘 풀린다고 생각해서 한 참을 썼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썼던 글을 다 지우기도 한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나희덕 시인의 ‘파일명 서정시’라는 시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글은 한 사람이 겪어온 삶의 고단함 사이로 어느 틈엔가 기회를 엿보다 자신도 모르게 내 몸 밖으로 걸어 나온 단어와 문장이 만들어가는 부산물이다. 책은 의도했던 글쓰기의 산물과 의도하지 않았지만 쓰기의 과정에서 우연히 떠오른 생각들의 합작품이다.   

  


책 쓰기는 돋보기다

책 쓰기는 청진기로 일상을 진단하며 비상함을 발견하는 돋보기.     


"창작이라는 것은 본래 왼쪽에서 뛰는 심장이 시켜서 하는 일입니다“(p.189).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 나오는 말이다. 창작을 돋보기로 확대시켜보고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본 결과 왼쪽 심장이 시켜서 하는 일이라고 정의한 신형철 평론가의 말은 탁월하다. 책 쓰기는 이처럼 자신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관찰해서 얻은 통찰로 아름다운 글의 무늬를 수놓는 과정이다. ”시곗바늘은 12시부터 6시까지는 우파로 돌다가/6시부터 12시까지는 좌파로 돈다/미친 사람 빼고/시계가 좌파라고, 우파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아무리 바빠도 벽에 걸린 시계 한번 보고 말해라. “ 김승희 시인의 ‘좌파/우파/허파’라는 시의 일부다. 똑같은 시계를 무수히 많이 봤지만 시계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일반인의 시각과 시계를 유심히 관찰하고 얻은 통찰력으로 촌철살인의 글을 쓰는 시인의 시각이 확연하게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뭐든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청진기를 들이대고 귀담아듣는 습관이다. 늘 보고 듣지만 돋보기로 확대해서 세심하게 들여다보며 들리던 소리도 의심해서 귀담아 들어보는 습관이 책 쓰기의 재료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원천이다. “이타심利他心은 이기심利己心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이타심이 아니다.” 황지우의 ‘산경山徑’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촌철살인이다. 타인에게 베푸는 사랑도 결국 돌이켜 보면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이타심도 이기심의 한 가지 전략이고 본 것이다. 타인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도 나에게 행복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 들어온 오만가지 생각 중에서 몇 가지만 수태되어 새로운 생각으로 탄생한다. 생각은 본래 짝을 찾아 줄기차게 맞선을 보고 추파를 던지고 사랑을 나누기 때문에 부모가 정확히 누군지 모른다”(p.55).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에 나오는 말이다. 책 쓰기는 수많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새로운 생각을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이다. 글쓰기에 동원되는 생각보다 책 쓰기에 동원되는 생각이 깊이나 넓이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화 또는 확장되어야 한다. 책 쓰는 오로지 내 생각만으로 완성할 수 없다. 독자에게 전해주고 싶은 핵심 메시지와 관련된 내 생각을 쓰는 과정이지만 그 과정에 관여되는 무수히 많은 생각은 오롯이 내 생각만이 아니다.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면서 내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사랑을 나눈 결과 탄생한 산물이다. 책 쓰기에는 저자의 핵심 메시지가 뿌리에서 솟아나 줄기를 이루고 그 줄기에 수많은 생각의 가지를 붙여 나가는 과정이다. 우연히 만난 인두 같은 한 문장을 근간으로 내 생각이 관여되어 또 다른 생각을 낳는 연속적인 과정이 바로 책을 써나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들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287쪽). 김연수의 《우리가 보낸 순간, 시》에 나오는 말처럼 내가 쓰고 있는 이 책도 누군가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미래의 책이고, 내가 쓴 한 문장이 독자에게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주는 인두 같은 한 문장이 될지도 모른다.  

    


책 쓰기는 청소기다

책 쓰기는 세탁기로 고정관념이나 타성을 흔들어 세척하는 청소기.     


책을 읽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다. 거꾸로 책을 쓰는 이유는 저자가 직접 체험을 통해서 깨달은 색다른 사유 과정과 결과를 독자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다.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는 깨달음과 교훈을 직접 체험으로 모두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다른 사람이 체험을 통해 배운 사유를 책을 통해 간접체험으로 배우는 과정, 그것이 바로 우리가 책에 끊임없이 접속해야 되는 이유다. 책은 평범함을 거스르는 비범함, 정상에 시비를 거는 비정상, 상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몰상식의 사유를 품고 있다.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 삶과는 반대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p.244).” 이성복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 나오는 말이다. 책 쓰기는 전문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예술적 시도가 아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문제의식과 살아온 삶의 역사적 흔적이 있다면 추진해볼 수 있는 예술적 도전이다. 책 쓰기는 현재 작가만이 도전해볼 수 있는 별도의 예술적 영역이 아니라 누구가 도전해볼 수 있는 평범한 예술적 영역이다. 다만 기존의 삶을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호기심과 내 삶을 성찰해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시도해볼 수 있는 창작의 영역이다. “어쩌면 우리는/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는 황규관 시인의 ‘마침표 하나’라는 시구절 처럼 지금까지의 삶을 성찰해보고 새로운 삶으로 출발해보겠다는 다짐과 결의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책 쓰기다. 내 생각도 고정관념이나 타성일 수 있으니 세탁기로 말끔히 세척해서 없애버리는 결단의 시작이 바로 책 쓰기다. 책 쓰기는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잉태하기 위해 지금 내가 머물러 있는 생각의 터전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청소기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 I》에서 사람을 속박에 묶어두는 관습과 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젊음에 어울리는 외경심, 오랫동안 숭배하고 가치를 부여해온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 자신들이 성장했던 땅,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손길, 숭배를 배웠던 성전 등에 대한 감사, 바로 그들의 최고의 순간 그 자체가 그들을 가장 단단히 묶고 가장 지속적으로 의무를 느끼는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해방은 이처럼 속박된 것에 마치 지진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12쪽). 나도 모르게 나를 묶어두고 무의식적으로 숭배하게 만드는 것에는 전통이 있을 수 있고 습관적으로 반복해온 관습이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생각을 붙잡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타성에 문제를 던져보고 그것이 여전히 나를 구속하는 당연함의 틀에 가두고 있는지를 따져보는 과정이다. 원래 그런 것, 당연한 것, 물론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글을 쓸 필요가 없다.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오랫동안 숭배해온 사회적 미덕과 가치가 과연 지금 여기서도 여전히 우리가 지켜나가야 하는 미덕과 가치인지를 의논하고 논의하면서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해방’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위대한 해방을 지진처럼 경험하는 순간은 “자기가 사랑해왔던 것에 대한 갑작스러운 공포와 의심, 의무로 불렸던 것에 대한 섬광 같은 멸시 그리고 방랑, 타향, 소외, 냉각, 환멸, 냉담에 대한 선동적이고 의식적이며 화산처럼 솟구치는 욕망, 사랑을 향한 증오심, 아마도 자신이 숭배하고 사랑했던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전 모독과 같은 행동과 눈초리, 아마도 자신이 방금 한 일에 대해 불타오르는 수치심과 동시에 그 일을 해냈다는 기쁨 그리고 승리를 알림으로써 느끼는 더할 나위 없는 내면적인 기쁨의 전율”을 경험“(13쪽)하는 시간이다. 책 쓰기는 바로 나를 제도와 시스템의 틀에 가둬놓고 기존의 사고방식에 가두고 있는 과정을 폭로함으로써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해방과 기쁨의 전율을 체험하는 순간이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서 기록하는 즐거운 노동이다.  


   

⑤책 쓰기는 필살기다:‘책 쓰기’는 ‘제각기’ 지니고 있는 칼라와 스타일로 색다름을 드러내는 ‘필살기’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에게 말했다/"당신이 필요해요"/그래서/나는 정신을 차리고/길을 걷는다/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 읽기 위하여'라는 시다. 이 시를 이렇게 바꿔 쓰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독자가/나에게 말했다/“당신 책이 필요해요”/그래서/나는 정신을 차리고/책을 쓴다/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온몸으로 글을 쓴다/눈물까지도 두려워하면서/그것이 떨어지며/생각을 앗아가서는 안 되겠기에.” 필살기는 적당히 해서 나오지 않는다. 목숨 걸고 도전하면서 연마해야 비로소 나만의 칼라와 스타일이 드러나는 글이 드러난다.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생기는 필살기, 그것도 한두 번의 노력으로 생기지 않고 무수한 반복 끝에 맞이하는 반전의 선물이 필살기다. 독자가  원하는 당신의 책은 바로 나의 필살기가 담긴 책이다. 무수히 많은 책이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흉내내기 어려운 책이 바로 나의 색다름을 드러내는 책이다. 나의 색다름은 내가 살아온 삶을 온몸으로 증거 하는 책이다. “필사적인 노력에 신비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노력이란,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는, 처절한 세속의 일이다. 조금도 신비롭지 않은 그 노동이 멈추면 시인도 함께 소멸된다”(4쪽).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책에 신형철 평론가가 ‘펴내며’에 쓴 글이다. “진정한 시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성, 그러니까 단독성을 가져야만 한다. 오직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는 데 성공한 자기표현이니까 말이다. 결국 시를 쓰기에 앞서 우리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신의 반열에 오른 셈이다”(43쪽). 강신주, 《김수영을 위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단독성은 대체 불가능성이다. 김수영의 시는 다른 시인의 시로 대체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녹여낸 시다. 그는 몸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시로 쓴다. 시가 곧 그의 삶이다. 제각기 살아온 삶을 녹여낼 때 자기만의 단독성을 지니는 팔살기가 된다.     



작가가 삶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이전과 다른 시를 쓰기 위해서다. 몸으로 글을 쓴다는 것. 몸으로 언어를 녹여낸다는 것. 김수영의 시가 우리 몸에 박히는 이유이자 우리가 김수영을 잊을 수 없는 근원이다.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나 소설 그 자체의 형식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의 방식과 직결되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의 부연이 되고 전자는 후자의 부연이 되는 법이다. 독특한 시를 쓰려면 독특한 생활방식이 선행되어야 한다(190쪽). 《김수영 전집 2》에서 김수영 시인이 한 말이다. ”독특한 시를 쓰려면 독특한 생활방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은 ”독특한 책을 쓰려면 독특한 생활방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다. 독특한 생활방식은 다른 사람의 삶을 모방해서 창조해낼 수 없는 자기만의 생활방식이다. 자기만의 생활방식은 사실 엄밀히 말하면 언어로 텍스트화시킬 수 없다. 다만 자신 살아온 삶을 몸으로 보여줄 뿐이다. 언어로 담아내는 삶은 언저리에 머문 치열한 생각의 파편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글에 감응하는 이유는 글 속에 그 사람의 사투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텍스트가 있다. 이론과 지식에 전적으로 기대어 쓴 텍스트가 한편 에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이론과 지식에 선행하는 삶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힘으로 쓴 텍스트가 있다. 이론과 지식으로 쓴 텍스트에는 논리적 엄밀성이 있지만, 머리가 아니라 살갗으로 파고드는 떨림이 없다. 삶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한 후에 쓴 텍스트에는 논리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무게와 깊이를 담은 진심이 있다. 논리적 글은 두뇌로 쓸 수 있지만 진심이 담긴 글은 삶으로만 쓸 수 있다.” 노명우 교수가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 쓴 추천사다.     

 


⑥책 쓰기는 이야기다: 

책 쓰기는 ‘갑자기’ 겪었던 체험을 녹여내서 독자를 감동시키는 ‘이야기’다.     


조지 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저자들이 책을 쓰는 동기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순전한 이기심이다.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신을 무시했던 어른들에 보복하고 싶은 욕망으로 책을 쓴다. 둘째는 미학적 열정이다.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말의 아름다움과 말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자각하기 위해서다. 세 번째 글을 쓰는 이유는 역사적 충동 때문이다. 사물이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한 사실들을 발견하며 후대를 위해 이것들을 모아두려는 욕망에서 책을 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쓴다.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정치적 야망이 글을 쓰게 만든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네 가지 이유가 더 일정한 비율로 겹쳐 있다. 글의 종류에 따라서 특정 목적이나 이유에 더 부합되는 경우가 달라질 수 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서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쓴다고 했다. 책을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누가 어떤 목적의식으로 쓰는지에 따라서 책의 종류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니체가 말했듯이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면서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 깨달음을 자기 방식으로 정리해보기 위해서 쓴다. 조지 오웰이 이야기하는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이든 책 쓰기는 순전한 이기심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황지우 시인이 이야기했듯이 책을 통해 타자를 변화시켜보겠다는 정치적 야망도 결국 순전한 이기심, 나아가 미학적 열정과 역사적 충동에 기원을 둔다.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부딪친 삶의 사건과 사고, 그 속에서 내가 겪은 구체적인 사실을 진심을 담아 스토리로 엮어서 구성하는 책 쓰기가 바로 나의 일대기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수단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다른 모든 것은 잡담이고, ‘문학’이며 교양의 부족이다”(9쪽)라고 말했다. 책 쓰기도 내가 극복해낸 곤경을 이야기로 들려줄 때 독자는 공감하고 감동받는다. 자신의 몸으로 극복하지 않는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독자를 감동의 세계로 유도하기는 불가능하다. 독자가 알고 싶은 이야기는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생각은 어떤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 깨달은 결과다.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도달한 사유에 맞춰 거꾸로 체험을 구성할 경우 작품은 파탄을 면치 못한다. 사유로부터 경험이 도출되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지 않고 옷에 몸을 맞춘 것처럼 어색하다. 몸에 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듯, 경험에 사유가 뒤쫓아 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의 원리다”(228쪽). 김상욱의 《다시 쓰는 문학 에세이》에 나오는 말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 최승자 시인의 ‘삼십 세’라는 시처럼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딜레마 상황에서 분연히 내 몸을 통과한 글이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삼십 대가 사십 대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씨 뿌리는 이십 대도/ 가꾸는 삼십 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 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고정희 시인의 ‘사십 대’라는 시에서 폐부를 찌르는 깨달음을 주듯 책 쓰기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내 몸을 통과한 수많은 체험의 흔적이 남긴 얼룩을 무늬로 바꿔내는 작업이다. 책은 한 마디로 이야기를 수집하고 감동의 도가니 탕에 끓여서 졸인 다음 남은 진액을 독자에게 전해주는 선물이다.    



책 쓰기로 결심한 사람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지금 이대로 살지 않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단이 그 사람의 삶을 녹여내는 책 쓰기의 출발이다. “깊숙이 파고들어야 한다/흔들리지 않도록/심장 속을 꿰뚫어야 한다/견디기 위하여/살아나기 위하여/고정되어야 한다/말이 필요 없다/두들겨 박히면 박힐수록/나는 너를 걸어둘 수 있는/하나의 의미로 살아남는 것이다.” 용혜원 시인의 ‘못’이라는 시다. ‘못’처럼 건성으로 살았던 삶을 반성하고 깊숙이 파고들어야 색다른 깨달음의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고 심장에 메시를 꽂아야 독자가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다. 수없이 흔들어대는 나를 올곧이 세우기 위해서는 ‘못’처럼 두들겨 맞아도 더 깊이 박혀서 뿌리째 뽑히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버티고 견뎌온 삶을 녹여내는 자기 연마 과정이 바로 책 쓰기다.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것은 생리이며, 결코 인간적이라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다. 그것을 일방적인 구호나 쇼맨십으로 오해하는 짐승들!” 이성복 시인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 나오는 말이다. 짐승들과 달리 인간은 본능을 거스르며 힘든 과정을 참아가면서도 상대를 위해 내 몸을 던지는 숭고한 행동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책 쓰기는 순리와 본능적 욕구대로 살아가지 않고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시작하는 위험한 탐험이다. 내가 배고파도 내 배를 채우는 욕구를 따라가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양보하고 배려하는 행위가 사랑이다. 책 쓰기도 마찬가지다. 나를 드러내고 나답게 살기로 결심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는 모험이다. 책 쓰기는 수많은 창작 중에 나를 세상에 정직하게 드러내 놓고 나는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겠다고 공표하는 위험하고 힘든 혁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쓰기를 해야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나를 알고 사랑하려는 욕망이 강한 사람이다. 책 쓰기는 독자를 위해서 쓰는 이타심의 발 로지만 결국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기에 대해 진심 어린 시선으로 정직하게 시작할 수 있는 이기심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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