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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게트 Apr 15. 2018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사

비가 오는 것 같다. 천둥이 치는 것 같고, 조금은 쌀쌀한 것 같다. 온다, 친다, 이렇다, 저렇다….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없는 이유는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어서다.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는 내겐 흐릿한 느낌만 남았다. 비오는 날의 젖은 공기와 천둥이 칠 때 느껴지는 대기의 울림, 이따금 스치는 한기. ‘…것 같다’는 어미 없인 문장을 끝맺을 수 없는 내게, 세상은 내 존재만큼이나 희뿌연 느낌으로만 남았다. 술 때문인지 담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간에 생각보다 시시한 일이었다. 잠깐 붕 뜨는 것을 느낀 이후엔 그토록 지겹던 적막이 찾아왔다. 환생의 문이나 악마가 인도하는 불구덩이, 신의 품속과 같은 것에 기대를 걸지 말았어야 했는데. 기대할 것 없던 생에서의 마지막 기대마저 스러졌다. 사후(死後)는 고작 이 정도다.

이곳엔 파리가 많다. 주변의 공기가 쉼 없이 울려댄다. 아마 저것들은 굴러다니던 소주병 위로 엎어진 내 몸을 덮고 있을 것이다.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파리의 날갯짓은 기분 좋은 소란으로 느껴진다. 간만에 5평짜리 단칸방을 가득 메운 객들이 반갑다. 말할 수 있었다면 말도 걸었을 테다. 가장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고 가장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던 것들. 이를테면 밥은 먹었는가? 잘 잤고? 잘 지내는가? …. 같은 것들. 동사를 문장의 척추라고 하던데, 그 가운데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동사들은 일상의 척추다. 저 물음을 주고받을 사람이 있다는 건 살만한 인생이란 뜻이다. 그건 일상을 지탱할 여력이 있는지, 버틸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하고 챙겨줄 사람이 남았다는 증거다.

밥 먹었냐고 묻는 이가 없어서 곰팡이 슬어가는 김치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고, 잘 잤냐고 묻는 이가 없어서 새벽같이 파지를 챙기러 나갔다. 단칸방은 방의 주인을 닮아 언제나 고요했다. 파지 줍던 노인에게 정붙이라고는 창밖에 핀 목련과 밤길에 마주치던 길고양이 뿐이었다. 나는 목련과 고양이에게 정을 붙일 정도로 다정했지만 결코 다감할 수는 없었다. 이따금 체납 고지서를 전하러 오는 이들의 헛걸음에 미안했지만 사과하진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우체통에 고지서를 꽂아두고 문을 두드려 인기척만 낸 뒤 옆집으로 달려갔다. 그들을 붙잡고 “내 돈이 없고 몸이 편치 않소, 미안하오.”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일상을 들여다보는 이가 없는 생에서 드러낼 일 없던 감정은, 들여다보지 않던 우체통에 쌓인 고지서들만큼이나 의미 없었다.

적막을 견딜 수 없을 땐 TV를 틀었다. 뉴스에선 죽은 사람들 얘기가 많이 나왔다. 노인, 단칸방, 고지서, 곰팡이 핀 김치.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저것은 나의 죽음이라고. 내가 술상에 올려뒀던 김치도 지금쯤 허연 곰팡이로 뒤덮여 곤죽이 됐을 테다. 일상을 지탱하는 동사들을 입에 올리고 귀에 얹을 일이 없는 이들의 죽음은 이다지도 닮아있다. 밥은 먹었는가? 잘 잤고? 잘 지내는가?…. 살아생전 이런 물음을 던진 적 없던 이들은 죽은 이를 둘러싸고 시신인도절차와 가족관계 파악을 의논한다. 그리곤 방치돼 부패한 시신과 반찬들의 딱한 처지를 물어댄다. 산 사람에게 일상의 안부를 빌어주지 않던 세상은 성심성의껏 죽은 이의 명복을 빌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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