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를 잇다
지난 주말 대학로 예그린씨어터 소극장에서 하는 어쿠스틱 뮤지컬 <우리들의 사랑>을 보고 왔다. 뮤지컬 <우리들의 사랑>은 전설의 가수 3인방, 故 김광석, 유재하, 김현식이 가수 지망생인 이초희의 꿈을 돕기 위해 천국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스토리로, 특이하게 모든 배우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한다. 노래, 연기, 악기연주까지. 배우들의 재능과 노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무대였다.
인터미션 없이 150분이라는 시간이 처음에는 길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개인적으로 공연하는 곡들을 대부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노래들이 나올 때는 '내가 이 노래를 라이브로 듣다니!' (물론 원곡자가 부른 건 아니지만, 라이브로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감격스러웠다.) 하면서 더 몰입해서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5명의 배우들의 노래실력을 말할 것도 없고, 연기하는 데에 있어서도 진짜 전설의 가수 3명이 지상에 내려왔나 싶을 정도로 싱크로율이 비슷해 기분이 묘했다. 셋이서 한자리에 모이면 어떤 대화를 할까 상상해봤는데, 시크한 맏형 김현식과, 삼촌 같은 분위기의 둘째 형 김광석, 완벽주의자 막내 유재하까지. 실제로 동시대에 살았든 이 셋이 모이면 정말 심상치 않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유재하는 비록 앨범 하나만을 남기고 갔지만, 그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이 히트를 친 대단한 아티스트이다. 음악에 대한 완벽주의가 깊었기 때문에,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시간도 남들보다 더 길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랑하기 때문에> 앨범의 수록곡들은 다 각양각색의 매력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시적인 가사와 그 분위기 맞는 섬세한 멜로디. 1집만 들어도 유재하의 음악적 스펙트럼과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느낄 수 있다. 극에서도 그런 부분(성격적인 측면)을 잘 드러내게 연기를 해준 것 같아서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유재하 역을 맡은 배우님도 굉장히 매력적이셨다. 수줍은 척하면서 할거 다 하는 스타일이랄까. 노래와 연기뿐만 아니라 피아노, 기타, 트럼펫(?) 등의 여러 악기를 다루시는 걸 보고 새삼 존경스러웠다.
김현식과 유재하의 에피소드도 좋았다. 초희와 지언이 함께 우정을 다지며 불렀던 "그대 내품에" 가 천국에서의 김현식과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에 오버랩 되는 장면이 있었다. 실제로 김현식은 유재하가 하늘나라로 간 뒤 그의 명곡이었던 "그대 내 품에" 부르며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 같은 길을 걷는 친구는 부모님 만큼(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의미와 삶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되었다.
예쁜 가사로 만들어진 "내 마음에 비친 나의 모습" , 외길 속에서 고민하는 사람의 고백 같은 "가리워진 길" , 신나고 흐뭇해지는 "지난날" 등등의 노래도 좋았다. 김현식과 김광석 노래와는 다르게 대부분 분위기를 밝게 띄우는 역할은 유재하의 음악이었고, 극의 재미 포인트도 대부분 유재하의 몫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음악을 듣다보면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필자는 유재하를 이 극의 '최애 캐릭터'로 선정하게 되었다.
김광석 노래를 듣기 시작한 때는 중학생 때였다. 프리뷰 글에도 썼듯이, 그가 만든 노래는 그 각각마다의 사연과 떠오르는 특정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기에, 완전히 그 노래에 공감할 수 없어도 계속 듣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그의 삶을 연기하는 뮤지컬을 통해서, 그 노래들을 만들고 부른 김광석이란 사람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두껍고 울림이 있는 김광석 역의 배우님 목소리가 작은 공연장 안을 가득 메웠다. 특히 기억나는 장면으로 후반부 초희와 아이들의 소극장 콘서트를 같이 기획하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후배들에게 자신의 과거 첫 콘서트 이야기와 그 때에 불렀던 "내 사람이여"라는 곡을 다시 불러주는데, 기타 하나만으로도 어떻게 그렇게 멋짐을 표현할 수 있는지... 듣는 내내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김광석이 그 시절(소극장 첫 콘서트의 기억) 을 추억하고, 그리워 하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다.
극에서의 김광석은 굉장히 인자하고 자상한 캐릭터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유로워 보여서 좋았다. 조곤조곤하고 안정감 있는 목소리,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특히 초반에 불렀던 김광석의 "맑고 향기롭게"는 처음 듣는 곡이었지만, 노래는 물론, 그때의 분위기 떠올라 지금도 가끔씩 찾아 듣게 되는 곡이 되었다. 또 뮤지컬이 다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는, 후유증 탓인지 김광석 1시간짜리 콘서트 영상을 찾아서 봤었다. 정말로 통기타와 노래 하나만으로 무대를 채우는 데에도 여유로움이 느껴지더라. 중간중간 조용히 멘트도 치면서 해맑게 웃으시는 데, 이상하게 그리워지는 삼촌 같은 미소였다.
김현식 노래는 히트곡 몇개만 알고 있어서, 좀 낯설게 느껴진 캐릭터였다. 그러나 웬걸, 알고 보니 좋은 노래들이 너무 많았다. 천재성을 넘어 고독함에서 나오는 노래의 분위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노래들이 약간 맹수가 울부짖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진짜 술병 들고 골목길을 거닐면서 노래했을 것 같은 가수 중 한명.
그래서 극에서도 제일 고독하고 힘든 캐릭터 같기도 했다. 하지만 맏형의 포스로 어떤 노래든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걸 보고 대단하다고 느꼈다. 확실히 대가라는 별명이 그에게 어울리는 이유는 남들보다 음악성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노래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릴 수 있는 가수이기 때문인 것 같다. 주인공 초희가 전설 3인방을 만나기 전, 비 오는 다리 위에서 불렀던 "비 오는 어느 저녁" , 동료와 술을 마시면서 과거를 회상하던 노래 "나 외로워지면" , 모든 관객들이 환호했던 마지막 엔딩곡 "비처럼 음악처럼" 까지. 전율이 돋을 정도로 가슴을 파고드는 순간들이 기억에 남는다.
김현식 노래들은 항상 슬프고 고독한 노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흥겹고 신나는 노래들도 몇개 있었다. 대표적으로 "사랑 사랑 사랑" , "골목길" 등이 생각난다. 나중에 음원으로 다시 들어보니깐, 김현식 밴드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음악 하는 걸 반대하는 주인공 초희 아버지와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초희. 그녀의 상황을 알게 된 3인방은 처음에는 음악을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결국엔 그들이 그랬듯이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 그녀를 도와주게 된다. 현재 치열한 대중음악 사이에서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하겠다는 초희의 다짐은, 과거에 그들이 했던 자신만의 길에 대한 열정과 매우 닮아보였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니 그녀도 언젠간 그들처럼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믿고 싶다. 이것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될 것이다. 이 극의 주인공도, 너도, 그리고 나도. 모두가 존중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