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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에깃들어 Jun 16. 2020

관계자 외 출입금지

어릴 적 살던 산동네에는 숲이 많았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던 숲 한 자락이 기억나는데, 철조망 사이로 구멍이 나 있어서, 자주 들어가서 낙엽을 밟고 나무 그늘을 지나, 절벽 끝에 가서 한강을 내려다보곤 했다. 아지트 같은 공간 위로 잠자리가 날았고, 나뭇잎을 타고 송충이가 흘러내렸고, 부서진 벽돌을 포갠 의자가 있었고, 저 멀리 강물 위를 뛰노는 햇살이 가득했다. 파리들의 윙윙거리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부스럭 낙엽 밢히는 소리, 비행기 가끔 위로 나는 소리, 바람이 벽을 기어 오리는 소리. 그 공간에 어느 날 철조망이 이어졌다. 어린아이들의 가슴높이. 하지만 나보다 키가 작은 아이들도 그 철조망을 손쉽게 뛰어넘었다. 나만 빼고. 나는 그 앞에 멈춰 섰다. 그건 운동신경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해진 것, 제한된 것들에 대한 체념, 순종. 겁이 많았던 걸까. 요즘도 가끔 그 장면이 꿈에 나온다. 아이들과 함께 달려가다가 지름길을 포기하는 순간. 막힌 담장. 철조망. 그리고 출입제한 표시. 꿈속에선 여전히 멈춰 선다. 꿈이라는 걸 아는 순간에도 차마 그 선을 넘지 못한다. 기억은 쉽게 조작되지 않는다. 과거도 여전하다.


바쁘게 사는 동안,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특별히 넘나들 선이 없었고, 길들이 넓게 뚫려 있어서, 오프로드를 찾아 달릴 필요가 없었다. 평행한 길들엔 평행한 차들이 있었고, 앞서거나 뒤처지는 이웃이 없었다. 더 많은 선들이 거미줄처럼 엉키었지만, 정해진 길을 가는 동안, 그 선들은 그저 가이드라인이었다. 안정되었지만, 고마웠지만, 다만 감동은 없었다. 무엇보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뛰지 않고 걸었다. 천천히. 뛰면 숨이 차서 멈추게 되는데, 걸을 땐 그저 지쳐도 힘들게 걸을 뿐이다. 그래서 시간은 가는데, 아마 지루했나 보다. 그래서 잠시 졸았나 보다. 타이어가 갓길 차선을 넘으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지만, 흥에 겨운 음악소리가 그보다 컸나 보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내가 관계자인 경우에도 그렇다. 아니 관계자라서 그렇다. 아슬아슬한 외줄 감정을 타고 좌심실에서 우심실로 이동을 한다. 온통 빨간 피가 가득하다. 기억이 새겨진 핏줄 구석구석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이동한다. 아마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서일까. 하지만, 내가 있어야만 할 곳이라서일까. 그런데 나는 안쪽에 있는 것일까, 바깥쪽에 있는 것일까. 불분명하다. 넘어온 곳인가, 넘어갈 곳인가. 그마저도 불분명하여 좀 전에 봤던 그 푯말을 찾아본다. 하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다.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도 불분명하다. 내일 아침이 되어야 판단이 될 듯하다. 확실한 건, 지금 관계자는 나뿐이다.


두려우면, 선을 긋는다. 초등학교 교실의 2인용 책상에서 처럼. 넘어오면 다 내 거라며, 짝꿍의 팔을 쳐내리던 토막살인미수의 추억. 적당히 넘어오면 다치니까, 그냥 훌쩍 넘어오길 바라는 마음. 38선이든 휴전선이든 총성 없이 훌쩍 넘어와 귀순하기를 바라는 마음. 하지만, 정작 자신은 마음을 경계에 내어두어 걸어지나 가는 사람들에게 밟히는 미련함. 관계자 외 출입금지. 사실 이것은 너무나 명확한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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