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빌려와 놓고
시집을 빌려와 책상 앞에 와 앉았다.
국문과 친구들이 동서고금의 시를 B급으로 패러디하며 끝없는 개그 격돌을 벌일 때마다 속절없이 웃고만 있었던 지난날의 내가 떠올랐다.
“국문과 녀석들이니 당해낼 수가 있나!”
이른 열패감과 무력함에 사무쳐 있을 시간에 시집을 한 자라도 더 봤으면 하잘 것 없는 반격이나마 시도해볼 수 있었을까? 아니오. 지난하고 하찮은 시도에 10년은 비웃음을 당했을 것.
어디엔가 잘 살고 있을 친구들에게 뒤늦은 결투장을 보내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몇 달 전부터 시집이 읽고 싶었다. 이상하게 손이 가다가도 금방 떨어지던 시집들. 시집은 다 그런가 봐 싶었는데 누군가들이 읊어주는 시들에는 또 그렇게 가슴이 눅눅해졌다.
플래너를 꾸준히 쓴다는 건 자기에게 맞는 플래너를 만날 때까지 억겁의 플래너를 떠나보냈다는 의미라던데 그렇다면 나는 억겁까지는 아니더라도 열 권의 시집 정도는 정면으로 승부를 펼쳐봤던가? 에 까지 생각이 미치며 약간 반성하는 마음으로 오늘 도서관에 가 시집을 하나 골랐다. 우연찮게도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라는 제목의 시선집이다.
시와는 ‘다시’ 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옛 친구들, 시답기 짝이 없는 헛소리들과 많은 은유들로 숨기고 또 내보였던 애정의 마음들이 떠올라 그 시간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뻔한 얘기나 쓴다고, 니가 아직도 이모양이다고 저 녀석들이 낄낄거리는 것 같아서, “아잇참!!” 하고 이 뻔한 얘기를 다 지워버리고 싶다.
#단정한100일의반복
#시
#낄낄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