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 287일 차
여기서는 남편이 딸내미 주양육자인데, 오늘은 남편의 생일이라 24시간 동안 자유를 주기로 했다. 딸내미 첫 소풍도 있고 아침 수업도 있어서 빠듯하긴 해도 괜찮겠지 싶었는데 내가 구멍을 뻥뻥 냈다.
소풍 준비물을 제대로 숙지 못해서, 스낵을 빠트리질 않나, 비치타월(돗자리) 대신 바디타월(목욕타월)을 챙기질 않나. 둘 다 딸내미가 바로 잡아줬다…. 별 것도 아닌 런치박스 싸놓고는 기념으로 사진 찍다가 딸내미를 울리질 않나. (사진 찍는 거 싫다는데, 가위바위보 해서 이기고 찍었더니 그때부터 학교 갈 때까지 30분을 울었다… 나중엔 소풍도 안 간다고…)
소풍 끝나고는 딸내미가 자기 모자를 줬는데 학교 앞에 떨어트리고 와서 다른 엄마한테 연락받았고 (내가 받았던 거 기억도 못하고 모자 없어졌다고 딸내미한테 어쨌냐고 물어봤다. 딸내미가 엄마가 안다고 하는데 안 믿고…),
나중에는 남편 생일 케이크 사 오는데 딸내미가 소중하게 들고 온 거 마지막에 엎어 버리기도 했다… 딸내미 눈치를 봤는데, ‘괜찮아’라고 해줘서 진짜 고마웠다. 이쯤 되면 누가 누구 보호자인지 모르겠다… ㅎㅎ
그래도 어떻게든 잘 버텼다. 새벽 5시 반부터 일어나서 딸내미 소풍 챙겨 보내기, 수업 듣기, 남편이랑 삼시세끼 챙겨 먹기, 딸내미 하원 이후 커버하기 다 해냈다. 해냈다. 빠듯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면 회사 다니면서는 일상이었다. 진짜 여기서 삶이 많이 편해지긴 했다.
딸내미 소풍 장소에도 잠시 들렀다. 학교 근처의 축구장에서 했는데, 학부모들도 잠깐 들러도 된다고 해서 갔다. 피곤해서 갈까 말까 고민했는데 안 갔으면 어쨌을 뻔했나 싶었던 게, 절반 정도 되는 학부모들이 와 있었다. 일단 오늘 행사 지원하는 부모들만 5명 정도 되고, 내가 있을 때 잠깐 들른 부모들도 4-5명 정도 있었다. 심지어 재택근무 중에 잠시 들르고. 아무튼 미국 사람들 엄청 가정적이다.
소풍은 좀 독특했다. 소풍이라기보다 축구장의 프로그램에 단체 등록한 느낌이었다. 그늘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해 두고, 중간중간 장애물 달리기, 자루 쓰고 달리기, 줄다리기, 페이스 페인팅, 스티커 타투 등 다양한 액티비티를 했다. 땡볕에 애들이 좀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들 재밌어했다. 재밌을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들이었고 ㅎㅎ 엄마가 있어도 딸내미가 주변 애들이랑 스낵도 나눠먹고, 같이 춤추고 놀고 하는 걸 보며 다 컸구나 싶었다.
남편도 하루를 잘 보낸 것 같다. 갖고 싶은 게 없고 외식도 싫다고 해서 24시간 자유를 줬는데, 엄청 즐긴 것 같았다. 씻지도 않고 하루 종일 집콕하면서 ㅎㅎ 나는 나중에 정말 뻗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다들 행복했으니 됐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