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삭의 배웅,우빌린카 국경의 "Stop!This is my house"
마지막 안식, 성이삭 성당의 위용 앞에 서다
러시아 땅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주일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우리는 이날 외부 성당을 찾아 나가는 대신, 우리가 머물던 미르 선교센터 안에서 선교사님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소박한 거실에서 부르는 찬송가 선율은 지난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의 여정을 되감는 영혼의 기록이었다.
예배를 드린 후 우리는 구해군성을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인 성이삭 성당을 찾았다.
성이삭 성당의 천장을 가득 채운 성화들은 압도적인 규모와 화려함으로 인간이 신을 향해 드릴 수 있는 경외심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특히 고개를 들어 바라본 거대한 돔 천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였다.
정교한 금박 장식 사이로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내려앉아 있고, 그 주위를 둘러싼 성인들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캔버스를 뚫고 나올 듯 생생했다.
수십 미터 상공에 그려진 이 세밀한 예술품들을 마주하며,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우리 여정을 이토록 촘촘히 인도하고 계심을 다시금 확신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스텔톤의 상트 시내는 마치 거대한 예술 작품처럼 우리의 발아래 펼쳐져 있었고, 우리는 그 찬란한 풍경을 배경으로 정들었던 러시아와의 마지막 인사를 준비했다.
따뜻한 밥상과 보르구가 건넨 마음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기 전, 우리는 지난 여정 동안 우리를 품어준 미르 선교센터 식구들과 현지 동역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시내의 한식당 엄마네였다. 낯선 이국 땅에서 고향의 맛을 정성껏 차려내는 그곳에서, 우리는 그동안의 신세를 갚기 위해 선교센터 식구들과 지인들을 초대해 귀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잡채와 제육볶음이 가득한 밥상을 함께 먹는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를 넘어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고단했던 여정을 위로하는 가장 따뜻한 의식이었다.
쪙과 나는 한 분 한 분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고, 정성껏 대접한 이 한 끼가 대륙을 횡단하며 우리가 받은 사랑에 대한 아주 작은 보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후가 되어 센터로 돌아오니 에티오피아 청년 보르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민 신분으로 낯선 땅에서 꿋꿋하게 선교 훈련을 받던 그는, 우리가 너무 좋은 사람들이라며 아프리카산 바나나와 러시아 보석함을 선물로 건넸다.
그 어느 값비싼 선물보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별의 정표였다. 우리는 그의 신분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상트의 마지막 밤을 갈무리했다.
요소수와의 사투와 국경으로의 질주
새벽 4시, 상트의 무거운 공기를 뚫고 에벤에셀이 마지막 엔진음을 내뱉었다. 우리는 라트비아 국경을 향해 남서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마지막까지 순순히 길을 내주지 않았다. 국경 근처 주유소에서 요소수 경고등이 들어왔고, 직접 구입한 비상용 요소수 뚜껑이 열리지 않아 가위와 칼을 동원해 땡볕 아래서 땀범벅이 된 채 씨름해야 했다.
그 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내내 통행료 1원 받지 않고 길을 내주었던 러시아의 넉넉한 인심을 뒤로하고, 우리는 마침내 러시아와 라트비아가 맞닿은 우빌린카 국경 검문소에 닿았다.
“Stop! This is my house!” 쪙의 기선제압
국경은 기다림의 지옥이었다. 6시간이 넘는 대기 끝에 마침내 우리 차례가 왔다. 그런데 무표정한 러시아 세관원이 흙먼지가 잔뜩 묻은 투박한 군화를 신은 채 에벤에셀 내부로 들이닥치려 했다. 그 순간, 조용하던 쪙이 비명처럼 외쳤다.
“Stop! This is my house. Take off your shoes!”
순식간에 정적이 흐르고 군인의 발이 허공에서 멈췄다. 당황한 세관원은 멈칫하더니 이내 군화를 벗고 양말만 신은 채 엉거주춤하게 수납장을 뒤졌다.
우리는 냉장고와 서랍을 미리 다 열어 보여주며 기선을 제압했고, 낯선 이방인 여자의 기개에 항복이라도 한 듯 세관원은 쿨하게 통과 사인을 보냈다.
여권에 찍힌 붉은색 OUT 도장. 그 인장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러시아 여정이 공식적으로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
“여보 우리 정말 해냈어.” 짧은 한마디에 만 킬로미터의 인내와 두 달간의 투쟁이 응축되어 있었다.
차단기가 올라가고, 에벤에셀의 바퀴가 비로소 라트비아의 땅을 밟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토록 광활했던 러시아의 대륙이 어느새 등 뒤로 물러나 있었다.
이제부터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유럽의 길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두 달간의 거친 호흡을 뒤로하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문장으로 채워질 대륙의 심장을 향해 조용히 액셀을 밟았다. 드디어, 유럽이다.
추신.
약 두달간의 만 킬로미터 러시아 여정을 함께 응원해 주신 독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계셨기에 에벤에셀은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에벤에셀은 이제 새로운 풍경이 가득한 유럽의 길을 준비하려 합니다.
유럽 편 연재가 시작되기 전까지, 저의 또 다른 고민이 담긴 매거진 <태어난 속도와 살아야 할 박자>에서 다시 뵙기를 소망합니다.
곧 더 깊어진 시선과 아름다운 유럽의 첫 문장을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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