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우리가 건너온 것은 땅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라트비아의 매끈한 아스팔트 위에 에벤에셀을 세웠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환희가 아니라 기묘한 정적이었다.
60여 일 동안 우리를 따라다녔던 거친 엔진 소리와 덜컹거리는 노면의 진동이 멈춘 자리에는, 낯선 평화로움이 공기처럼 내려앉았다. 차에서 내리자, 발밑의 아스팔트가 낯설 정도로 매끈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지구의 8분의 1을 가로지르는 1만키로미터의 길 위에서 우리는 수없이 자문했다.
‘우리는 왜 이 고생을 자처하며 길 위에 서 있는가?’
처음에는 그저 대륙을 횡단했다는 기록이 갖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광활한 대지를 한 뼘씩 에벤에셀의 바퀴로 읽어 내려가며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가 건너온 것은 척박한 시베리아의 땅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견고하게 쌓여있던 ‘두려움’이라는 벽이었음을.
러시아는 때로 우리에게 불친절했다. 고압적인 공권력은 우리의 발을 묶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비포장도로는 에벤에셀의 몸체를 사정없이 흔들어놓았다.
그러나 그 거친 광야 위에서 우리가 진짜 마주한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스파스크달니 소녀들의 친절, 아마 자르 라만의 바냐, 치타 알렉시의 샤슬릭, 난민 청년 보루꾸의 수줍은 우정,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맞잡은 탈북 형제들의 거친 손마디까지.
그들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세상은 뉴스 속보처럼 무섭기만 한 곳이 아니며, 진심은 언어의 장벽보다 훨씬 더 깊고 멀리 전달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에르미타주의 황금 보물보다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낡은 신발에서 더 큰 위로를 얻으며, 우리는 비로소 깨달았다.
사람보다 귀한 예술은 없고, 길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게로 흐른다는 그 명확한 진리를.
하지만 오늘,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것은 우리가 바퀴를 굴렸던 그 광활한 지평선 너머로 이제는 포성이 들려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나온 그 평화로운 길들이 차가운 전선(戰線)으로 변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저릿하다. 그 소식을 들은 날,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정세가 풍경을 바꿀 수는 있어도, 그 땅 위에서 우리가 나눈 따스한 진심까지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을.
자작나무 숲의 깊은 침묵과 이름 모를 이가 건네준 차 한 잔의 온기가 여전히 그곳에 머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기록은 이제 가고 싶어도 쉽게 갈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린, 그 평화로웠던 대륙에 보내는 나의 가장 늦고도 간절한 안부 인사다.
60여 일간의 치열했던 기록들은 이제 우리 영혼에 단단한 근육이 되어 남았다. 러시아의 붉은 먼지를 털어내며 우리는 광야에서 배운 삶의 노래를 가슴에 품고 비로소 진짜 여행자가 되었다.
이제 에벤에셀은 유럽이라는 새로운 무대를 향해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우리의 항해는 다시, 시작된다.
에벤에셀은 우리를 데려다준 게 아니라, 우리를 바꿔놓았다.
<추신>
그동안 부족한 저의 러시아 여행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에벤에셀과 함께한 60일간의 만 킬로미터 여정이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과 공감 덕분에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에벤에셀은 러시아의 거친 흙먼지를 뒤로하고, 새로운 풍경과 이야기가 가득한 유럽으로 향합니다.
더 생생하고 깊이 있는 유럽 편 연재를 위해 잠시 숨을 고르며 원고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기다려 주시는 그 귀한 마음에 보답할 수 있도록, 조만간 대륙의 새로운 심장부에서 건져 올린 첫 문장을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독자님들 모두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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