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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편린으로 끝날지라도

다섯살 생일상

by 공존

다섯살 무렵의 몇조각의 기억은 제법 선명하다. 어떤 것은 매번 반복된 일상의 기억이다. 엄마가 부엌에서 큰 냄비 가득 된장찌개를 끓여나오시면 내가 엄마 무릎에 앉고 엄마가 내 밥그릇에 된장국물과 두부를 넣어 비벼준다. 그것을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먹는다. 다섯살 아기에겐 된장과 두부를 잘 먹는다는 것조차 자랑거리였으니까. 또 어떤 것은 특별한 기억이다. 사촌누나들까지 함께 어울려서 놀이동산에 갔다. 나무 옆에 서보라며 엄마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여 나는 나무 옆으로 갔다가, 그대로 나무 뒤에 숨었다. 그러자 카메라를 든 엄마와 사촌누나가 우슴을 터트렸다. 나는 나무 사이로 다시 스윽 나와, 찰칵 하는 카메라 셔터 소리를 받았다. 앨범 속 사진처럼 기억은 선명하다.


딸의 나이가 그 사진 속의 나의 나이다. 지금부터의 기억은 아이에게 평생을 간다. 나는 아내와 싸울만한 일이 있을 때는 거침없이 소리도 지르는 편이다. 아내와의 동반생활 있어 얻게 된, 언성을 높이는 쪽이 빠르게 상황을 끝낸다는 경험칙을 따른다. 이런 장면의 몇몇은 내가 그랬듯 반복되는 일상의 기억으로서 평생 남게 될지 모른다. 오늘 딸아이는 집라인을 서른번 넘게 탔다. 짜릿하고 재미있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집라인도 어쩌면 평생 기억하게될지 모른다. 다섯살은 그런 시기다.


추석을 앞두고 딸의 생일날 아침, 나는 두 해 만에 아침에 아이 생일상을 차렸다. 수수팥떡을 만들었다. 어쩌면 오늘이 아이의 첫번째 생일상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첫돌과 두돌 때 수수팥떡을 만들었는데 그 첫번째의 수수팥떡이 레전드...수수가루를 미리 사두질 못해 마트에서 수수를 사와서는 그걸 믹서로 갈아서...레전드...두번째 수수팥떡은 손쉽게 만들었다. 매번 내 손으로 팥을 불리고 삷고 쑤웠다. 세번째 생일날엔 너무 정신이 없게 지나가서 하질 못했고, 이번에 네번째 생일이다. 여전히 바쁘지만, 바빠서, 엄두는 나질 않지만, 그래도 이번엔 혹시, 기억할지 몰라서. 그래서 작게 몇 알만.


추석이라고 유치원에선 아이 손으로 오물딱조물딱 송편 만들기 체험을 했단다. 그래서 꿀송편도 함께 받아왔는데 제 손으로 만든거든 어른 손으로 만든거든 달고 맛나다고 아이가 잘만 먹었다. 그러나 아빠의 수수팥떡은, 먹질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안먹을 줄 알았다. 미역국은 몇 술 뜨지도 않고 스프만 다 비웠다. 그래도 괜찮다. 다 먹으라고 차린 건 아니다. 그래도 미역국 안에 고기 두 조각은 먹어주었다. 다섯살 어린 몸으로 아침마다 유치원에 보내느라, 여덟시에 억지로 깨우는 아빠의 입장이다. 잠도 깨지 않은 아이가 생일상에 앉아서 몇 술이라도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그저, 나는 혹시나 기억할까봐. 편린에 지나지 않을 이 순간일지라도, 아이가 기억하는 첫 생일일까봐. 그런 생일날에는 비록 나물셋에 부침개 셋에, 불고기는 없었을지라 할지라도, 생일상의 의미는 있었으면 해서. 그래서 만들어주기로 했다. 작고 작은 그런 밥상.


글쎄 뭐, 가을에 태어난 아이라 가만히 두어도 알아서 잘 먹고 잘 클 팔자일 테지만은 그런 아이의 삶이라도 아빠와 엄마의 사랑에 결핍이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잊혀진다 할지라도. 잊혀지길 두려워하지 않는 모든 날들이 우리의 존재를 하나의 낱낱의 점에서 존재의 연속선으로 바꾸어내는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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