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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과 시간, <서브스턴스>

현재의 감각들, 과거의 기억들

by 공존

1. 과거를 버린 여자

이야기는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현재'를 지배하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버림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젋어서 누린 최고의 영예.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안착한 그녀라는 별. 모두에게 사랑받던 최고의 스타 엘리자베스. 쉰 살이 된 그녀는 아직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브라운관에서 미소를 보이지만, 명예의 거리 위 그녀의 이름이 세월과 함께 잊혀지고 무감각해지듯이 '현재'의 감각을 통제하는 TV에서 그녀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음식에 대한 욕망과 맛에 대한 감각을 화면 듬뿍 뿜어내는 제작자에 의해.


이 상실이 그녀에게 뼈아픈 것은 늙어감을 받아들이고 이제는 자신의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자족감, 혹은 자존감을 그녀는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거를 잃은 여자다. 헐리웃 스타로 살아온 30년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가족도, 친구도, 함께 늙어갈 반려동물조차도. 그녀의 텅 빈 집을 지배하는 대형 브로마이드 사진처럼,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된 그녀의 과거-오늘의 접함만이 그녀에게 존재한다.


그녀의 '오늘의 영광'을 상징하는 대형 브로마이드는 엘리자베스의 자기 인식을 대변한다. 자신의 과거를 말해주는 다른 여러 오브제 없이 오로지 가공되고 과장된 사진만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은 단순한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나 선망 그 이상으로 그녀가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오로지 현재에 대한 감각으로 치환하여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영광은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으며, 그 기억은 오늘의 그녀를 설명하고 규정할 어떤 힘도 갖지 못한다. 엘리자베스는 오로지, 지금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유지한채 나이들어있는, 그 사진 속의 모습으로서만 존재한다.


왜 그녀가 이처럼 과거의 기억을 모두 소실하고 오로지 현재의 감각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나이 50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페미니즘 관점에서는 이것이 남성권력에 의해 부과된 아름다움과 젊음에 대한 착취로 인해 생겨난 강박으로 풀이될 것이고, 자본주의 비판론 관점에서는 헐리웃이라는 자본주의시장에서 노동상품으로서 자신을 팔면서 살아온 그녀가 상품가치를 상실하게 된 시점에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는 처지를 인식했던 것으로 풀이될 것이다. 마치 성냥공장에서 쫓겨난 성냥팔이 소녀처럼.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권력구조에서의 희생양으로 이해되기에는, 그녀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또한 페미니즘이나 반자본주의 코드로 읽는 것은 수와 엘리자베스의 갈등을 희석하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이런 해석보다는, 그녀 자신이 이 '감각의 세계'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린 장본인이었으며, 이 감각의 세계에 대한 그녀 자신의 집착으로 인하여 의미있는 과거의 기억들과 그것을 구성할 요소들마저 스스로 '폐기한' 것으로 읽는 것을 나는 택했다.


즉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에서 엘리자베스는 이미 '수' 그 자신이다. 엘리자베스는 과거의 기억을 부정하고, 오로지 현재의 감각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엘리자베스에게 닥친 위기는, 과거를 모두 버린 그녀에게 현재의 '감각'이 사라질 상황이 되었단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각 모두 잃은 그녀는, 그녀 자신을 설명하고 규정할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한다.


2. 감각의 불균형

양치를 한 뒤에 귤을 먹으면 귤은 쓰게 느껴진다. 우리는 귤이 달콤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귤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는다. 얼마쯤 뒤에 귤을 다시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이것이 감각과 기억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기억은 과거에 존재하고 감각은 현재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감각만이 존재하는 이는 양치 뒤에 먹게 된 쓰디쓴 귤을 당장 쓰레기통에 넣어버린다. 그 뒤에 찾아올 허기는, 눈 앞의 무엇이있든 그것을 입에 게걸수레 밀어넣음으로서 해결된다.


'수'가 된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로 살아온 과거를 잊고 마음껏 감각의 세계에 빠져든다. 엘리자베스 자신이 과거를 버렸기에 수 역시 엘리자베스라는 '기억의 주인'에 대해 '안정제'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예상된 파국으로 수와 엘리자베스는 함께, 순조로이 걸어들어간다. 극 초반, 하비가 뽐내던 게걸스러움이라는 감각은 곧 엘리자베스의 것이 된다. 과거를 감각하지 못하는 엘리자베스에게 있어서 '수'로서 보낸 아름답고 행복한 일주일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녀에게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의 감각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육체에 대한 감각이 안정제 착취와 함께 무너져내리면서, 가장 강렬하게 그녀를 충족할 수 있는 감각은 식욕 뿐이다.


둘의 균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의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즉자적, 감정적, 순간적 판단과 욕구, 그에 대한 충족으로 채워져온 그녀의 삶은 엘리자베스와 수를 오가며 각각의 몸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만을 극도로 추구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둘 사이의 균형은 '현재의 감각'과 '과거의 기억'의 간극을 한 없이 멀리 떨어트려놓고 만다. 영화 속에서 몇주, 몇개월로 표현된 수의 '감각의 폭주'가 있든 없든 간에 찾아왔을 결말. 엘리자베스의 몸은 그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늙고 쇠약해져간다. 엘리자베스와 수를 사이좋게 파국으로 몰고 간 '감각의 불균형'을 간신히 지탱한, 아주 미약한, '기억의 균형' 그 너머로, 엘리자베스의 몸이 한계를 넘어 늙고야 만다.


3. 서브스턴스의 본질, 막을 수 없는 노화

서브스턴스의 본질은, 아무리 균형을 잘 유지했어도 본체의 노화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기억과 감각의 균형을 잘 유지했어도, 아무리 엘리자베스와 수가 완벽한 협력을 유지했어도, 엘리자베스가 늙는 것만은 막을 수 없다. 파국은 반드시 찾아왔을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수는 엘리자베스의 몸으로부터 완전히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방법으로 차근히 이야기를 풀어갔다면 극의 스릴이 반감되었을 테지만.


이야기 중반, 80세를 넘겼을법한 노인이 카페에서 만난 엘리자베스에게 말을 건다. 서브스턴스 클론으로 인해 너도 잡아먹히고 있냐고. 엘리자베스는 이내 그 노인이 그녀에게 서브스턴스를 소개한 젋은 남자 간호사임을 직감한다. 엘리자베스는 노인에게서 달아나지만, 노화와 죽음이라는 정해진 결말로부터 그녀가 달아날 방법은 없다. 어떤 시점에서든 엘리자베스의 몸이 고갈되었을 터이고, 이 때 수와 엘리자베스 모두가 온갖 수단을 쓰며 저항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화로 인한 본체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는 일. 그 둘의 각자의 설레발과 헛발질은, '몬스터 엘리자수'를 만들어낸다.


이야기 후반부에서 몬스터 엘리자수의 행적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상상과 착란인지 알기 어려운 구성을 취하고 있다. 연출이야 한바탕 피범벅 놀음이니, 호러 팬이라면 즐겁게 감상하면 되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에 집중을 하자. 이야기를 여성의 육체에 대한 착취로 본다면 이 결말은 여성의 육체 자체가 물화되면서 도구화를 넘어 왜곡되고 파괴된 신체에 대한 서사다. 기억과 감각, 과거와 현재의 갈등에 주의를 기울인 입장에서는 몬스터 엘리자수의 본질은 육체의 소멸, 죽음과 노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정신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감각과 기억의 불균형의 결과물일 수도 있고, 단순한 노화와 불운의 결과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내게, 영화 후반부의 착란은 더 이상 자신의 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완전히 감각의 세계로 퇴행한 노인의 어떤 실성한 모습, 노망이 든 추태에서 벌어진 망상으로도 해석된다. 이게 더 재미있는 해석은 아닐 테지만.


과거에 대한 부정과 부인, 현재에 대한 무제한의 탐닉, 그것은 더 이상 달아날 수 없는 노화와 죽음이라는 종말의 시간에 마침내 육체와 정신의 동시 파탄으로 나타났다. 종말 시점에서, '자기를 인식할 수 있는 감각'조차 완전히 사라지고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감각'으로의 도피를 반복한다. 이것은 그녀 자신이 과거를 버리고, 부정하고, 현재의 감각을 끝없이 탐닉해온 결과물, 혹은 응보다. 한 사람의 실성한 노파가 되어 스튜디오에 모인 사람들에게 한바탕의 불쾌감을 선사한 뒤 그녀는 이미 붕괴된 육체를 가지고 정처없이 길을 헤멘다.


그리고 한명의 노파가, 이해할 수 없는 몰골을 하고 거리에 쓰러졌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의 이름이 쓰여진 블럭 위에. 마지막 순간 그녀가 본 환상은, 아마도 성냥팔이 소녀가 죽는 순간 보았던 그 환상이 재현이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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