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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 <프랑켄슈타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잔혹동화는 이번에도,

by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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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를 통해 델 토로 감독을 처음 알게 된 나는, 이번 <프랑켄슈타인>의 성긴 내러티브가 의도된 계획으로 보였다. 내게 익숙한 1995년의 <프랑켄슈타인>만 해도 빅터의 스승이 크리쳐의 정신을 구성하고, 약혼녀가 살해당해 크리쳐의 반려자로 만들어진 뒤 자살하는 등 서사 자체가 살떨리게 충격적인 작품이었던 데다가, 원전이 나온 뒤 영화와 게임, 애니메이션과 만화 등 수 없이 많은 작품에서 크리쳐와 창조자의 관계가 변주되고 확장되어왔기 때문에, 델 토로의 이번 작품에서 서사를 구성하기 위해 담아낼만한 재료들은 차고 넘칠 것이었기 때문이다.


델 토로 감독은 잔혹산 서사를 기가 막히게 서정적으로 구성하는 감독이다. <쉐이프 오브 워터>에서도 그런 점이 탁월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이번 <프랑켄슈타인>에서는, 굳이 1장과 2장으로 장 구분까지 해놓고서도 서사가 휑하니 비어있다. 마치 두 사람이 만나는 북극의 대지처럼. 빅터가 크리쳐를 추적하는 동기조차도 의문스럽다. 빅터의 입장에서 크리쳐는 자신을 마치 개미처럼 쉽게 짜부러트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화룡점정에 해당하는 북극으로의 여정에 있어 그가 어떤 감정을 품는지가 서사적으로나 연출적으로나 납득이 쉽게 되지 않는다. 크리쳐에 대한 복수심이 그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에는, 빅터는 이미 충분히 과오를 반성해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빅터가 저택과 함께 크리쳐를 버리기로 했을 때 반성인지 충동인지 모를 감정으로 크리쳐를 구하려고 다시 안에 들어가다가 폭발과 함께 그의 다리를 잃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또 작중 내내 엘리자베스 하를랜더가 그에게 팩트폭격을 가하고, 빅터가 그녀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설복당하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에, 북극행 이전에 형성된 빅터의 공허가 어떻게 그를 북극으로 다시 이끌게 되었는지 전달되지 않았다.


'창조자의 오만에 대한 처벌과 그가 버린 피조물의 증오'라는 기가막히게 근원적이면서도 복잡하게 뿌리와 가지를 뻗어 온, 이미 앞선 창작자들의 기여가 산더미처럼 쌓인 이 작품을 델 토로가 지금 다시 채택하였을 때, 사실 현대적인 변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만의 따스한 시선을 기대했고, 텅 빈 서사에도 불구하고 소재 자체에서 풍기는 강렬한 매력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이토록 서사적으로 느슨한, 불필요하게 지루한 구석까지 많은 영화가 강렬학 눈길을 끄는 것은 변함없는 그 갸냘픔 아름다움이었다. 아버지의 권위 앞에 놓인 아들과 어머니의 위태로움, 어머니를 잃은 소년의 불안과, 아버지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에의 여정. 그것이, 단숨에 잔혹한 광기로 변모하는 장면. 그리고 여기에 미아 고스의 그 위태로움까지. 온통 이 작품은 현실의 불안을 공들이지않고 섬세히 재현하고 있다. 이렇게 힘을 빼고도 눈과 귀를 끌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리할 수 있는 것은 잔혹한 것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그의 탁월한 묘사 때문인데, 이번 작품의 크리쳐는 역대 크리쳐 중 가장 원전에 가깝다고 평가되는 모양. 그런데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날것 그대로 잔혹함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을 불안하고 위태롭게 만들어놓고는 크리쳐에게서는 연민을 진하게 느끼게 한다. 프롤로그에서 북극의 얼어붙은 바다에 갇힌 범선으로 두 손으로 밀어내는 모습처럼, 크리쳐는 그가 가진 힘이나 영원한 생명력에 비하여 너무나 큰 운명적 고통을 부여받은 존재로, 그가 인간과의 관계를 얻어가는 과정이 모두 애잔하고, 위태롭다. 그래서 아름답다.


연출적으로 빼어나지도 못한 마지막 빅터와의 대화가 생명의 불이 꺼지는 묘사와 함께 순식간에 끝나고, 크리쳐는 홀로 바다에 서 태양을 맞는다. 그가 '아버지' 빅터와의 첫 만남에서 태양의 빛을 받았던 것처럼. 그런데 이상하게도 묘하게 여운이 깊다. 이상하다. 괜히 다시 보게 된다. 왤까. 왜 나는 이 크리쳐를 놓지 못할까. 그냥 델 토로 감독의 팬이라서 그런 걸까, 자문을 해보아도 알 수 없다.


남은 것은 영원의 삶을 부여받은 존재 하나. 길고 긴 시간 속에 수 많은 이들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견뎌야 할 뿐인. 그가 대지에 홀로 섬으로써 그는 이제 비로소 아버지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이제 그는 앞으로, 세상 속으로 나아가 이 삶을 견뎌야 한다. 그의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숙명을 말이다. 그 운명에 대한 불안을 알기에 어쩌면, 이리 오래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 것일까. 그것 참, 묘하다. 나이 먹을만큼 먹고서 인조인간 괴물의 눈물에 이렇게 흔들릴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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