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왜?"
"으응. 애기가 지금 3일째 39, 40도라-,"
70이 내일 모레인 엄마는 이모가 하시는 식당에서 한창 저녁 장사를 거들다가 나의 전화를 받으셨다. 나는 조금은 멋적게, 그리고 아이가 아픈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양 말했다.
"어이구 큰일이네."
"열감기인데 뭐. 있는 일이지."
"그렇긴 해-. 그럴 땐 옷 다- 벗겨."
"아 옷까지 벗겨놔야 하나?"
"어-. 예전에 너희는 그렇게 열감기는 없고 그랬는데?"
"아니 뭐. 지금 열감기가 유행이라는데. 그땐 없는 감기가 요즘 유행하고 뭐 그런 거지."
"어- 그건 그려."
"아니 근데,"
나는, 그리고 차분하게 용건을 말했다.
"아니- 지금 응급실도 다녀오고 병원 계속 들락거리니까, 나 어릴 때 윤소아과 가던 생각도 나서."
"어허허허."
엄마는 내 생각을 이내 알아차리고, 너털웃음을 터트리셨다. 어린 시절에 누가 안그랬겠냐만은, 나도 제법 병원을 들락거렸다.
"너도 아프긴 많이 아팠지. 주사 맞고는 못걷겠다고 픽 쓰러지고."
"쓰러져?"
"어- 주사 맞은데가 근육이 뭉친 거지. 그러다가 또, 금새 일어나.“
밤에 열이 펄펄 끓어 부모님이 잠을 못주무시고 지새우던 기억도, 그러다가 아침에 병원을 가던 기억도, 퍽 어린 시절이었음에도 생생하다. 엄마는, 내가 말을 꺼내자 바로 어제 일이었던 것처럼 구체적인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을 하나 하나 읊으신다. 너무나 어릴 때의 일이라 즐겁던 추억, 슬펐던 추억은 많이 남아있지 않은데도 아팠던 그 밤의 기억들은 유독 생생하다. 아이에게 아픔은 그만큼 강렬한 인상인 때문일까.
그때 살던 집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소아과가 있었다. 나는 퍽 소아과의 단골손님이었다. 어릴 때라 알약을 넘기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굳이 가루약을 물과 함께 삼켜야 했는데, 그건 제법 잘했다. 쓴 걸 참으면 되는 일이니까. 두살 위의 누나에 대한 승부욕 때문인지 주사는 안아프다고 버텼다. 둘째의, 남자아이의, 그런 기질들을 가지고 잘도 엄마를 병원으로 끌고 다녔다. 엄마에게서 병원을 자주 들락거렸다는 말이 단번에 나올만큼.
4살 정도까지는 큰아버지가 사시던 낡은 한옥집의 건넛방에 살았다. 나이를 먹어 다시 가보니 그늘지고 습한 것이 아이가 잔병치레로 면역력을 키우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때나, 10살때쯤 처음 아파트로 이사를 가보기 전까지는 내내 단칸방에서 부모님이 누나와 나를 키우셨으니, 우리가 아프던 날이면 두분은 잠을 설치던 것도 동반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와 누나도 코골이 아버지 덕에 잠을 설친 날도 적지는 않다.
의료기술도 지식도 지금처럼 발달되어 있지 않았고 그 이상으로 정보란 태부족이었던 그 시절에 툭하면 열병을 앓으며 칭얼대던 나를 바라보던 그 때의 젊은 엄마는 얼마나 불안했을까. 나는 십사리 열이 내리지 않다가 이윽고 경련까지 와 제 엄마를 놀래킨 아이를 끼고 응급실에서 한 없이 긴 시간을 보냈다. 아이는 강아지나 진배없는 몸집으로 MRI 기계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아이 엄마가 봤더라면, 아마 까무라치기 일보직전으로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MRI 다음엔 뇌파검사로, 두번의 진단검사에 아이는 진정제를 맞고, 깨어나는 일을 반복했다. 그 모든 것은 무던한 나에게도 퍽이나 가슴아픈 광경, 그리고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게 반복되는 기억들은, 엄마에 대한.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것들. 엄마는,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
"어허허허."
엄마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리고 장성한 아들로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내 아이를 기르며 생겨나는 일들을 하나 하나 나누며 과거의 엄마가 나를 기르며 겪은 일들을 알아가고 있음을, 넌지시 전하는 것이 어쩌면 다일까. 세상엔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 돌이킬 수 없는 일들도 있다. 그러나 세상엔, 그냥 말 한마디로 천냥 빛 그 이상의 보답이 되는 일도, 조금쯤은 있다. 자식을 키우며 그 감상 하나하나에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얹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일에 속한다. 나는 그저 내 아이를 기르며 깨달아가고 있다. 얼마나 마음을 졸였으며 얼마나 절절히 사랑을 하셨는지.
먼저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있던 아내는 열 경련을 다스리기 위한 수액주사를 빼겠다고 용을 쓰던 아이를 말리다가 바지며 브레지어가 아이의 피로 흠뻑 젖었다. 아이가 워낙 울며 보채니 응급실의 담당 간호사는 한 명의 환자의 한 명의 보호자라는 원칙을 깨고 아빠인 나까지 병실에 들였다. 자정을 넘겨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다가 자기 가슴에 번진 아이의 핏자국에 아내는 또 많이 놀랐다.
아픈 아이를 바라보는 것이 그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이의 피로 가슴을 적시는 것과 같은 고통을, 세월에 켜켜히 쌓아올린 끝에 자식은 성인이 되고, 부모님의 품에서 달아난다. 아이의 핏자국이 남긴 온기가 식어가는 것과 같은 공허함은, 나에게도 찾아올까. 그러니 나에게 아픈 아이를 보며 엄마를 떠올리는 것은 그처럼 어쩌면, 내게도 남아있는 핏자국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지금까지 나를 품어주었던 온기를 떠올리는 일과 같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픈 아이를 끌어안고 그 상처를 보듬어줄 때의 온기를.
자식이 부모님의 품을 떠났을 때 서로의 살점이 맞닿던 곳의 온기는 서서히 식어가고, 그곳에 남은 핏자국을 보며 나는, 우리는, 영영 그 존재를 그리워하며 남은 삶을 산다.
평소 내내 뒹굴며 잠을 자던 아이는 그날 내 팔베개를 하고 세시간 가까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잠에 들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아침을 맞이하려 아이를 품에서 꺼내어 눕히고 침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