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박해천 저)를 읽고
아파트, 그 욕망의 공간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 특히 아파트가 갖는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의 대표성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아이들의 자기소개가 "XX아파트에 사는..."으로 시작하며, 자기 집 평수에 따라 노는 무리도 달라지는 사태는 이미 꽤 오래 전의 일이 되었다. 아파트에 사는지 주택에 사는지, 자가인지 전세인지, 자세히는 어떤 아파트의 몇 평짜리 동에 사는지를 통해 그 사람의 전체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시점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파트별로 어떤 정치색을 갖고 누구에게 투표를 하는지까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쯤 되면 아파트는 단순히 주거 공간이 아닌 입주자의 삶과 가치관 전체를 대변하는 거대한 힘으로 기능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 힘은 부모의 경제적 여유에 따라 딱 아파트의 위치, 평수만큼 계급화되는 양상을 띤다.
그렇기에, 고질적 망국병으로 불리는 아파트 투기는 "내가 안 해도 남이 할 거니까"라는 초조함 아래서 끊임없이 성장했다. 급속한 경제발전 기조 아래서 하면 된다의 정신으로 맨땅에서 부를 일궈낸 중년의 세대는 아파트를 중심으로 부동산 불패신화를 만들어 갔다. 투기로 인한 부동산 소유 편중, 하우스푸어로 인한 내수침체 장기화 등 언제 터질지 모르는 대형 폭탄들은 "아파트 신"이 내리는 달콤한 불로소득의 유혹 앞에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고 말았다. 본래 인간에게 집이란 세계로 나가기 전에 영혼과 육신이 머무는 공간이며, 익숙하고 안전한 공간으로써 돌아갈 곳, 귀향처의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아파트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역할에 급격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중산층의 기준이 특정 지역, 특정 평수 이상의 아파트로 정의되면서부터 아파트는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아니라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세계, 더 높은 계급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물질적 근거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부동산 투기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파트의 꿈, '콘크리트 유토피아'
가진 자들에게는 양심의 가책보다는 불로소득이 주는 대가 없는 풍요가 더 소중했다. 그리고 서민들은 아파트로 대변되는 중산층에 대한 욕망으로 무리한 아파트 입주를 시작했다. 이로부터 촉발된 부동산 투기 현상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오늘날 아파트를 바라보는 대부분의 시선이었다. 그러나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이와 같은 아파트에 대한 기존의 시선을 넘어 무형의 시선, 아파트를 1인칭 화자로 설정한 시선, 소위 '영웅시대'를 살아온 어느 강남 1세대의 시선, 그리고 꽃무늬의 시선을 따라 아파트의 과거와 현재, 겉과 속을 탐색한다. 그 낯선 시선들 속에서 아파트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흐름과 긴밀하게 연결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인간 삶의 양상을 변화시키는 능동적 존재로 탈바꿈한다. 아파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역사를 쓰고 있었고, 사람들의 욕망의 대상을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걸맞은 취향으로 옮겨가게 만들었다.
1부에서 저자가 아파트가 유도한 독특한 시각 문화의 확산을 여러 시선의 입을 빌려 픽션으로 구성했다면, 2부에서는 픽션을 뒷받침하는 당시의 아파트 상황을 정보전달의 형식으로 알려준다. 1962년 M아파트라고 불리던 마포 아파트의 탄생에서부터, 마포, 용산, 동부이촌동, 잠실, 압구정, 분당, 그리고 용인으로 이어지며 지속되는 '포스트 강남'의 모델하우스까지를 훑으며, 동시적으로 진행된 가족 형태, 라이프 스타일 변화와 아파트의 진화를 사진과 함께 풀어낸다. 좌식생활에서 입식 생활로, 아궁이 부엌에서 시스템키친으로, 시장보기에서 대형 마트 쇼핑으로 아파트가 불러온 개인과 가족, 사회의 시대적 변화 양상을 추적하다 보면 1부에서 아파트가 자신의 시선으로 토로한 욕망과 불만, 야심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실체를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