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읽었다.
유발 하라리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저서들은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통찰력으로 넘친다. 유발 하라리는 다방면으로 지식이 많고 또 그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지적으로 얻는 게 많다. 나는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그리고 이번에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읽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 책들은 지금 가격의 3배로 팔더라도 구매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3권 모두 훌륭하기 때문이다. <사피엔스>가 인류의 기원과 역사를 설명했고 <호모데우스>가 인류의 미래를 전망했다면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조언>은 지금 현대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그 본질을 파헤치는 책이다. 570쪽 분량의 두꺼운 책이므로 내용을 짧게 요약하기는 어렵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들 위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유발 하라리는 지금 현대 사회가 아주 중요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 가지 중대한 문제에 봉착했다. 그것은 바로 핵전쟁, 기후변화, 그리고 기술 혁신에 따른 파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 혁신에 따른 파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든 지금 AI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어 머지않아 모든 면에서 인간을 능가하는 '초지능'이 탄생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AI 로봇이 인간에 맞서 싸우는 전쟁을 우려하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인공지능은 '의식'이 없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인간과 맞서 싸워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매우 낮다. 우리가 우려해야 하는 점은 사회와 '무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모든 면에서 인간을 초월하여 모든 '일'을 인공지능이 맡게 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백수로 전락하고 AI 시스템을 관리하는 소수 인간들만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에서 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단순히 실업 문제를 우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 즉 '이야기'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육체적으로 초라한 인간이 지구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집단적 상상력 덕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이야기'가 존재하기에 인간은 부족 단위를 넘어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야기란 신화, 종교, 이념 등을 말한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의지할 만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졌고 그로부터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았다. 중세 시대에는 종교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면, 현대인들은 '자유주의'라는 이야기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다. 자유주의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간단하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나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 나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을 때는 '내 마음' 가는대로 선택하면 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이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다.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에 맞서 싸워 승리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최선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재 자유주의는 생물학과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최근의 과학 연구들은 사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선언한다.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생각했던 그 무언가는 사실 복잡한 신경망과 뉴런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 말은 즉, 이대로 생물학과 인공지능이 더 발전하면 누군가가 우리의 '자유의지라고 믿었던 무언가'를 조종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에게 진정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고 나의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누군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면 자유주의는 의미를 잃는다. 그런데 인간은 이야기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개별적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상품이나 수단으로 다뤄지는(혹은 더 나아가, 인간이 상품이나 수단으로서조차 가치가 없는) 사회가 도래하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에 의지해야 할까?
유발 하라리는 위의 질문이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생물학과 인공지능의 발전은 우리가 막고 싶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과학 기술은 빠르게 발전할 것이고, 머지않아 모든 면에서 인간을 뛰어넘는 초지능이 탄생할 것이다. 인공지능이 우리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을 대신해주는 때가 되면 이미 인간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그러니까 늦기 전에 새로운 사회에 맞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유발 하라리가 제시하는 새로운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의 마지막 장에서 '명상'이라는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명상이란 온갖 형이상학적 사고를 떨쳐내고 실재하는 '나'에게만 집중하는 훈련을 말하는데, 불교 철학에서 주장하는 바와 유사하다. 그러니까 '인생의 무의미함'을 인정하고 궁극적으로 '이야기' 없이 살아가는 시도를 해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인간은 언제나 이야기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야기 없이 살아보려는 시도도 결국 또다른 이야기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사실 새로운 이야기가 무엇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를 논의하기도 바쁜데 최근 추세처럼 민족주의로 회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협력하여 포스트 자유주의를 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