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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Dec 13. 2020

불행해질 권리

책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었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디스토피아 소설은 예나 지금이나 조지 오웰의 <1984>다. 그렇지만 <멋진 신세계>도 <1984>에 비견될 만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올더스 헉슬리의 작품을 먼저 읽었다면 내 마음속 최고의 자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둘 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기술의 발전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은 예로부터 존재했다. 반대론자들도 있었지만, 기술의 발전이 제공하는 단기적인 혜택 앞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술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그 편이 훨씬 편리하고 안전하며 높은 만족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빅데이터가 우리 몸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여 발생 가능성이 있는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줄 것이다. 유튜브가 나의 취향을 파악하여 내가 좋아할 콘텐츠만 골라주겠다고 하면, 나는 내 행동 패턴이 분석당하는 것을 용인할 것이다. 기술 발전이 장기적으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이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식이라면 언젠가는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모든 인간의 데이터를 관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도래할 사회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 모든 인간이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육아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되며 삶에 회의 따위는 느끼지 않게 된다면 그 사회를 유토피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멋진 신세계>는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소설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행복과 미덕의 비결이다. 불가피한 사회적인 숙명을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만드는 훈련, 모든 습성 훈련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48p)

사람들이 모여서 무리를 이루면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위계가 발생한다. 계급 질서 하에서 사회는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듯 보이지만 기득권을 차지하지 못한 계층에서는 조금씩 불만이 생겨난다. 그리고 어떠한 계기로 인해 그것이 폭발하여 혁명이 일어나곤 했다.


사회 변혁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계층 구조에서 아래쪽을 차지한 자들의 축적된 분노다. 그래서 통치자와 최상위계층은 하위 계층이 주어진 위치와 역할에 만족하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들은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사회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역할에 불만을 품고 계층 구조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마음 속 생각까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영원한 '사회 안정'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멋진 신세계>는 인간의 몸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통제할 수 있는 사회를 이야기한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계급에 맞게 획일적으로 양육되며,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도록 태어날 때부터 세뇌 교육을 받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로소 '사회 안정'이 지속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물리-화학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죠. 그뿐 아니라 엡실론들까지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입니다. (128p)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을 호칭하면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정말로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설계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알파-베타-엡실론 등으로 계급을 나눴을까. 기술이 발달해도 결코 위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인가? 


어쩌면 인간이 수행해야 하는 '일'이 존재하는 이상 귀천은 생겨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계급을 철폐하더라도 시스템을 관리할 통치자는 있어야 하므로 완전한 평등사회는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기득권이 생겨날 뿐이다. 사회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위선을 향한 헉슬리의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363p)


<멋진 신세계>는 '자유'에 관한 소설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막상 자유가 주어지면 '불안'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차라리 구속당하는 삶을 택한다. <멋진 신세계>는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를 빼앗기는 전체주의 독재 사회를 묘사했다. 인간은 누군가가 자신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느낌을 받으면 저항한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도 시스템에 저항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진정 위험한 것은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실제로 다가올 미래에서는 누군가가 걸어와서 우리의 자유를 빼앗지 않을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도록 만들 것이다.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기는채도 모른 채 자유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빅브라더가 아니라 빅데이터가 사람들을 통제할 것이다. 빅데이터는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있으므로 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멋진 신세계>의 야만인처럼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가. 솔직히 말하면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소설 속에서도 야만인의 자유로운 삶은 오래 가지 못했다. 고도로 정보화된 사회에서 데이터가 주는 안락함을 포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당연하겠지만 데이터를 거부하고 아날로그 생활을 하는 게 정답도 아니다. 따라서 미리부터 미래에 대해 논의하고 디스토피아의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기술을 현명하게만 사용한다면 말 그대로 '멋진 신세계'가 도래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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