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루 Dec 11. 2020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

책 『노예의 길』

제1장 : 버려진 길

지난 수십년간 세계는 자유주의의 신조에 따라 위대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자유주의는 자신이 거둔 성공 속에서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나치즘과 파시즘이라는 사회주의의 결말을 분명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사회주의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자유를 위해 경제적 자유를 포기하자고 외치고 있지만, 과거 어느 시기에도 경제적 자유 없이 개인적, 정치적 자유가 있어 본 적은 없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핵심 가치를 경시하게 되면 사회는 퇴보할 것이다. 


제2장 : 위대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이상은 유토피아에서나 실현될 수 있는 사회다. '진보주의자'들은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정반대의 양극을 대표한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만, 실은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동일한 경향성에 따른 결과이며 독재로 귀결될 뿐이다. 사회주의적 이상은 결코 개인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 즉 사회주의는 자유의 길이 아니라 노예의 길이다.


제3장 :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회주의를 정확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주의의 궁극적 '목적'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구분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목적은 더 큰 평등과 안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있다. 사회주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계획경제 시스템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계획'이라는 수단이 사회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어중간한 계획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완전한 계획을 위해서는 독재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계획' 대신 '합리적 경쟁'을 주장한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는 자유주의가 경쟁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장을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합리적' 경쟁을 추구하므로, 유효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환경이라면 다른 방법(예컨대 정부 개입)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경쟁이 올바르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시스템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국가도 경쟁이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계획경제의 파괴성을 알면서도 '진보주의'를 지지하는 까닭은 완전경쟁과 중앙명령 사이에 어떤 '중도'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큰 오해인데, 경쟁이든 계획이든 이 두 가지는 모두 100%로 시행하지 못하면 시원찮고 비효과적인 도구가 되고 만다. 따라서 경쟁과 계획을 혼용하는 것은 둘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한다. 하이에크의 표현에 따르면 계획과 경쟁은 '경쟁을 위한 계획'이라는 형태로만 결합될 수 있으며, '경쟁에 반하는 계획'이라는 형태로는 결코 결합될 수 없다. 


제4장 : 계획의 '불가피성'?

일각에서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모든 산업이 독점으로 귀결되고 경쟁이 불가능해질 것이므로 계획경제로 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생각이다. 오히려 '독점'을 유발하는 것은 기술 발전이 아니라 정부의 규제다. 정부가 산업 보호, 특정 계층 보호 등의 명목으로 시행하는 각종 규제가 독점 기업을 양산한다. 오히려 각종 규제를 철폐할 때 경쟁이 회복될 수 있다. 또한 기술 발전으로 사회는 점점 복잡해질 것인데, 단순한 구조에서야 '계획'이 작동할 수도 있지만 산업구조가 복잡해질수록 '계획'은 불가능해지고 경쟁만이 효과적 대안으로 남을 것이다.


계획사회에서 하나만을 분리해서 생각했을 때는 많은 것들이 모두 달성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계획에 대한 열광자들이 생긴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계획을 지지하는 것은 자신의 매우 제한적인 견해에 입각한 데 따른 결과이며, 그들이 최우선으로 여기는 특정한 목적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장한 결과일 뿐이다. 사실 이들은 자신의 신념에 사로잡혀서 자신이 모든 것을 공정하게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위험한 자들이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경제학자는 결코 자기 자신이 조정자에게 필요한 지식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경제학자가 원하는 것은 바로 '전지전능한 독재자'가 필요 없으면서 그와 같은 조정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즉, 시장경제 시스템)이다. 


제5장 : 계획과 민주주의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주의를 옹호한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개인이 정해진 한계 안에서는 다른 사람의 가치나 선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선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하며, 이 영역 안에서는 개인의 목적체계가 최고의 선이라고 믿는 것이다.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른바 '사회적 목적'이란 단지 많은 개인들의 동일한 목적에 불과하다. 사회주의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개인들의 선호를 통합하여 집단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명백한 환상이다. 실제로는 각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들의 패권 다툼을 유발할 뿐이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하에서만 작동 가능하며, 민주주의는 수단일 뿐 궁극적 가치는 개인의 자유다. 


제6장 : 계획과 법의 지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계획의 지배 하에 둘 것인가, 아니면 법의 지배 하에 둘 것인가? 계획사회는 본질적으로 민주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계획당국은 사람들의 실제적 필요들이 발생함에 따라 이 필요들 가운데 의식적으로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계획당국은 형식적 규칙에만 의존해서는 답을 얻을 수 없는 의사결정들을 끊임없이 내려야 하며, 이런 결정들을 내릴 때 서로 다른 사람들의 필요들 사이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중요성을 구분해 놓아야 한다. 이는 자의적이지 않을 수 없으며, 결국 특정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누구의 이익이 보다 중요한지 결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법에 의한 지배는 특정한 사람들을 결코 우대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누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법의 규칙들이 활용될지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법은 진정한 의미에서 '편파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의 지배가 효과적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법의 규칙이 예외 없이 누구나에게 항상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은 실질적이기보다는 형식적이어야 하며, '특별법'은 법 질서에 손상을 입힌다.


제7장 : 경제적 통제와 전체주의

많은 사람들이 '돈'과 '경제적 문제'에 대한 경멸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인생의 고귀한 가치들이 자본주의 논리에 편입되어 버렸다고 한탄하며, 사람들이 돈에 혈안이 되어 '경제적 목적'만을 추구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사실 순전히 경제적인 목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경제적이지 않은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하는 데 있어 그 수단의 범위를 조건짓는 경제적 요인들이 있을 뿐이다. 잘 생각해보자. 돈과 경제적 문제는 개인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보수가 돈으로 제공되는 대신, 공적 명예나 특권, 타인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 더 나은 주택, 더 나은 음식 등의 형태로 제공된다면, 이것은 단순히 그 수령자에게 더 이상의 선택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다. 누가 그 보수를 정하든 그가 보수의 크기뿐만 아니라 그 보수를 사용할 형태까지 결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자유경제냐 계획경제냐의 문제는, 우리에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결정하는 주체가 우리가 될 것인지 혹은 계획자가 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즉 우리의 경제적 추구가 통제당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체적 목적을 선언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이 항상 통제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8장 : 누가, 누구를?

더 큰 평등을 향한 추구라는 이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곤 한다. 기회의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실제로 경쟁사회에서 빈곤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기회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기회보다 훨씬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와는 다른 유형의 사회에서 더 큰 물질적 안락함을 누리는 사람보다 오히려 훨씬 더 자유롭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경쟁시스템은 아무도 누군가가 큰 부를 이루려는 시도를 금지할 수 없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이 사실을 간과하게 된 것은 단지 우리가 자유의 상태에 너무나 오래 놓여 있어서 '부자유'란 무엇인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경쟁사회에서도 불확실성 하의 상황과 환경 때문에 불운에 처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계획된 사회에서는, 아무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국이 그것을 의도하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살거나 못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증오와 파멸로 이끌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가 내세우는 '더 큰 평등'이라는 원칙은 실제로는 의사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며, 이 원칙이 실제로 우리에게 말해주는 전부는 부자들로부터 최대한 많은 것을 탈취하라는 것뿐이다.


제9장 : 보장과 자유

자유주의 사회는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데, 이 자유의 보장은 모든 직업에 확실한 소득을 보장하는 것과는 양립 불가능하다. 만약 이런 소득의 보장이 일부 사람들에게 제공된다면, 그것은 이로 인해 보장이 필연적으로 감소되는 다른 이들의 희생 아래 주어지는 특권이 되어버린다. 즉 특정 집단에 대한 보장은 타 집단에 대한 비보장이다. 적어도 당사자들은 그렇게 느낀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안전을 보장하려 할수록 오히려 사회적으로는 갈등과 불안정이 커질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자도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삶의 요건에 대한 보장은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제10장 : 왜 가장 사악한 자들이 최고의 권력을 잡게 되는가?

사회주의 하에서 경제활동을 '계획'하려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악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경제활동을 계획하려는 민주적 정치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재권력을 행사하든지 아니면 계획을 포기하든지 선택해야만 한다. 민주적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계획은 없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독재자는 사람들의 광범위한 합의를 이끌기 위해 도덕적 가치들을 포기하는 유혹에 빠지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긍정적 과제보다는 적에 대한 혐오, 부자들에 대한 질시와 같은 부정적 과제에 대해 더 쉽게 합의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현실에 적용되는 순간 과격한 집단주의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집단주의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덕적이지 않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반대자에 대한 가차없는 억압, 개인적 삶과 행복에 대한 무시는 본질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결과들이다.


제11장 : 진리의 종말

집단주의 하에서는 지적 자유가 억압받고 학문이 쇠퇴할 것이다. 학문을 탐구하는 모든 활동도 그 정당성을 의식적인 사회적 목적으로부터 도출해야 한다고 요구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적 자유의 본질은 그 어떤 사상이라도 그 누군가에 의해 자유롭게 제기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반대가 억압되지 않는 한, 동시대인들을 지배하는 사상에 의문을 던지고 새로운 사상을 기존의 주장과 선전을 검증하는 데에다 집어넣는 그 누군가가 항상 나타날 것이다. 서로 다른 지식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다양한 개인들의 상호작용이 바로 사상의 생명이다. 


제14장 : 물질적 조건과 이상적 목적들

과거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개별적 노력이 좌절당하더라도 비인적 힘들(예컨대, 보이지 않는 손)에 순종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이 비인적 힘들을 혐오하고 반기를 들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그 근거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규칙 혹은 필연성에도 순응치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궁극적으로 우리 문명의 파괴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힘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불완전한 합리주의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합리주의가 보지 못한 것은, 이 복잡한 사회가 파괴되지 않게 하려면 시장의 비인적이고 겉보기에 불합리한 힘들에 대해 순종해야 하며, 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마찬가지로 통제할 수 없고, 그래서 자의적인 다른 사람들의 권력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우리가 어떠한 이상적 목적을 얻기 위해 물질적 희생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곤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도덕적 기준은 향상되었는가? 집단주의 기조 하에서 사회는 보다 예민하고 민감해졌다. 현존하는 사회질서의 불공평함에 분노를 느끼는 데 있어 우리 세대는 그 어떤 세대도 능가한다. 그러나 우리가 개별적 행위를 통해 이러한 도덕적 기준들을 실천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도덕은 개인이 자유롭게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영역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의 이해관계를 희생하였을 때만 그 의사결정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애초에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선택할 수 없다면 결코 도덕적일 수도 없다. 즉 자유가 있어야 도덕도 존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