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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Dec 16. 2020

감정의 물성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었다.


김초엽은 2019년 많은 문학상을 쓸어간 작가다.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 소설집을 많이 추천받았다. 나도 작년부터 읽어보고 싶었다. 일단 제목이 마음에 들었고, 작가의 이름도 마음에 들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책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다. 지난 주 계절 중간고사가 끝나고 본가에 올라갔을 때 서점에 들러서 바로 구매했다. 왠지 구매한 것만으로도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었다.


<공생 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등도 모두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감정의 물성>이다. 그 전까지는 대부분 우주가 배경인 SF 소설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그러한 컨셉이 김초엽 작가의 특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감정의 물성>은 유일하게 SF적인 요소가 없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다. 이모셔널 솔리드라는 회사에서 '감정의 물성'이라는 신제품을 내는데, 이는 인간의 감정 자체를 돌의 형상으로 조형화한 제품이다. 특정 감정을 조형화한 돌멩이를 손에 쥐고 있으면 실제로 그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주인공은 냉소적 태도로 감정의 물성이 전부 플라시보 효과를 이용한 상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 행복체, 평안체뿐만 아니라 우울체, 증오체 등을 구매한다는 점이다. '대체 돈을 주고 우울해지려는 사람들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그녀에게 직장 동료는 이렇게 말한다.


다들 쓰지 않아도 그냥 그 감정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거에요. 언제든 손안에 있는, 통제할 수 있는 감정 같은 거죠. ···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204p)


또한 그녀는 우연히 이모셔널 솔리드 대표를 만나서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왜 우울과 분노 같은 감정들이 팔려나가냐는 그녀의 질문에 대표는 비웃듯 웃으며 대답한다.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하다고. 영화가 우리에게 항상 즐거움만을 주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돈을 내고 영화를 보지 않냐고. 주인공은 인간은 감정 자체를 소비하는 게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반박하려고 하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껴 침묵하고 만다. 그리고 신파 영화를 보며 울다가 포스터를 구겨버리고 나간 어떤 사람을 떠올린다. 그녀는 이내 이렇게 생각한다.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215p)


나는 묘하게도 이 이야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내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허무주의와 맞닿아 있어서가 아닐까? 절대적 기준이 사라지고 상대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느끼는 무의미함. 또는 불평등한 계층 구조가 고착화된 현실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이는 나뿐만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20대들이 흔히 느끼는 감정이다. 고차원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가 덧없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돈을 주고 감정 그 자체를 기꺼이 구매한다. 그것이 우울 또는 증오일지라도.


물성은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가? 우울체를 잔뜩 사고 동시에 병원에서는 항우울제를 처방받는 보현의 모습은 흔들리는 20대의 실존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더라도, 그 안에서 사람들이 더 단절되고 더 외로워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1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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