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동안 서촌 주민이 되었다.
우리, 서촌에서 살아볼래?
우리 부부에게 '동네'는 살고 싶은 집을 고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신혼집을 구할 때에도 '좋아하는 동네에서 살자'가 첫 번째 공통 조건이었다. 우리가 좋아하고, 살고 싶어하는 동네의 공통점은 산책의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매력적인 로컬 가게들, 공원, 아기자기한 풍경들은 일상에서 예상치 못한 영감과 활력을 준다.
지금은 성수동에 살고 있는데, 만족도가 꽤 높은 편이다. 2023년 하반기에는 전세가 만기될 예정이라다음 집을 알아봐야 하는데 어디에 살면 좋을지 고민이다. 지금 동네도 좋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여러 동네를 경험하면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주거 형태도 꼭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나 한옥처럼 다른 유형의 주거생활도 경험해보고 싶어졌다.문득 다음 동네는 종로구나 서대문구이면 어떨까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테이폴리오(Stayfolio)에서 문자가 왔다. '재야'라는 숙소가 오픈했다는 소식이었다. 서촌에 있는 주택이고 단기 숙박보다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장기 숙박에 어울리게끔 설계된 공간이라 한 번 살아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넌지시 남편에게 "우리 서촌에서 살아볼래?"라고 물었더니 남편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좋지!"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 동안 서촌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서촌에서 살아보기로 결정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서촌이란 동네가 실제로 살아보면 어떨지 동네를 탐구하는 목적과 주택이란 주거형태가 우리에게 맞을지 궁금했다.
서촌에서 일주일 동안 살아보면서 지킬 생활 규칙도 몇 가지 정했다. 아침에는 사과 먹기. 하루에 한 번 이상 동네 산책하기. 동네 시장에서 장을 보고 요리하기. 매일 로컬 상점에 가기 등등.
서촌 살이를 하기 전에 계획한 내용들
서촌살이의 이유
우리의 삶, 주거 실험 첫 번째 프로젝트. 서촌의 삶과 주택의 삶을 살아보면서 이 동네가 우리에게 잘 맞는지, 그리고 주택에서 우리가 살 수 있을지 경험하기 위해서 서촌살이를 하기로 했다.
서촌에서 하고 싶은 것은
동네 빵집에서 아침에 먹을 빵사기
무포장으로 통인시장에서 장보기
퇴근 후에 나를 위한 시간을 갖기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매일 발견한 것을 일기 쓰기
매일 서촌의 가게 한 곳은 꼭 가보기
나를 돌보는 삶을 살아보기
11시 취침. 8시 기상.
하루에 물을 충분히 마시기
장을 봐서 요리를 할 것. 과식하지 말고 채소, 과일을 충분히 먹을 것.
점심 저녁에는 산책을 할 것
야근하지 말 것
일요일, 첫째 날은 가볍게 동네 한 바퀴.
숙소 체크인은 오후 5시였다. 어두워지기 전 서둘러서 갔는데 동네를 산책하다 보니 그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거리를 걷다 가게 유리창에 '미원 안됨, 다시다 안됨, 나 윤경이 엄마다'라고 쓰여 있는 <밥+> 식당이 인상적이었고, <쁘띠통>이라는 스위스 빵집응 발견하고 다음날 아침에 먹을 치아바타를 샀다. 작지만 아늑한 멋이 있는 사진책방 <이라선>에도 들렸다. 걷다보니 배고파져서 서촌의 여러 가게에서 음식을 포장해 와서 숙소에서 먹었다. <효자동 초밥>, <연희김밥>, <서촌 닭강정 공장> 조합은 꽤 성공적이었다. 세 가게가 서로 가까이 있어서 사 오기도 편했다.
월요일, 둘째 날 점심엔 동네 카페.
아침 8:22에 기상. 어제 <쁘띠통> 빵집에서 사온 올리브 치아바타와 우유에 시리얼 그리고 사과 1개를 야무지게 먹었다. 나의 지도앱에는 언젠가 가봐야지 라는 마음으로 저장해둔 장소가 정말 많은데, 그중하나가 <노멀 사이클 코페> 카페 였다. 마침 숙소와 가까이 있어서, 점심시간에 다녀오기로 했다. 이 카페는 운영 시간이 딱 정해지지 않아서 인스타그램(@normalcyclecofe_)을 보고 방문해야 한다. 카페는 3층에 있는데 사장님의 손 글씨가 적힌 커피 관련 메모가 여기저기 붙여져 있고 식물들과 오래된 가구들이 잘 어우러졌다. 뭔가 분위기가 엄숙(?)하게 느껴져서 커피 주문 후 얌전히 있었다. 전문가 포스의 사장님이 내려준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화요일, 셋째 날엔 통인시장으로.
통인시장에서 장을 보고, 신선한 제철 재료로 요리를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무색하게도 시장에서 장을 본 적이 없는 초보자는 뭘 살지, 얼마큼 살지 등등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결국 시장 앞에 있는 현대마트에서 딸기 한 팩, 떡국 떡, 물 한 통을 샀다. 유일하게 통인 시장에서 산 건, <러브마들렌>이라는 구움과자 가게에서 산 마들렌 3개. (장보기 미션이 실패한 느낌이라 주눅이 들어버렸다.) 점심은 대기업에서 만들어준 김치찌개에 구운 두부, 계란 프라이를 간단히 먹었다. 그래도 따끈한 밥에 김치찌개, 계란과 김 조합은 꿀맛이었다. 일을 하다가 창밖을 보니, 건너편 집에 하얗고 키가 어른만한 큰 삽살개가 보였다. 높은 울타리에 손을 턱 하니 올려놓고 마을 풍경을 구경하는 모습이 꽤 귀여운 장면이었다. 형철은 '이방인' 책을 읽고, 나는 일을 하다가 오후 늦게 어두워지기 전에 수성곡 계곡을 산책했다. 계곡의 작은 폭포가 꽁꽁 얼음에 언 모습이 꽤 작품처럼 보였다. 저녁은 뭐 먹을지 고민하다가 배민에서 <세검정 돈까스>를 시켜 먹었는데 와. 여기는 정말 맛집이었다.
수요일, 넷째 날에는 중국과 유럽의 오두막에서
오늘의 아침은 오뚜기 양송이 수프에, <효자 베이커리>에서 사 온 콘브래드를 먹었다. 후식은 시장에서 사 온 딸기. 틈이 날 때면 그림을 그렸다. 연필로 스케치 하기도 하고, 호미화방에서 사온 아크릴 물감을 꺼내어 꽃과 화병을 마음 가는 대로 그려보았다. 점심은 <중국>이라는 중국집에 갔다. 중국집 이름이 중국이라니, 이런 가게 이름은 처음 들었다. 아침 10시에 열고, 재료가 소진되면 문을 닫는다는데 후기를 보니 오후 1시 전에 문 닫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가게 앞에는 역시나 줄이 길었다. 후기가 좋은 볶음밥과 탕수육을 시켰는데 탕수육 튀김이 좀 얇으면서 새콤하니 신선한 맛이었다. 엄청난 웨이팅만 아니라면 또 먹어보고 싶긴 하다. 중국 집 건너편 거리에는 <시노라> 카페가 있는데 여긴 정말 서울에서 손꼽을만한 카페다. 마치 어느 유럽의 오래된 오두막에서 취향이 뚜렷한 카페 사장님이 음악을 틀어주고 커피를 내려주는 느낌이랄까. 이 근처에 살게 된다면 단골이 되고 싶은 곳이다.
목요일, 다섯째 날에는 건강한 로컬 식당에서.
비건은 아니지만, 비건 요리는 좋아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홍대 수카라 그리고 재료의 산책 요나님으로부터 제철의 채소로 만들어진 맛있는 식사를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큔>도 수카라 가게의 스태프들이 하는 곳으로 종종 식사를 하러 들렸던 곳이다. 이 날은 구운 채소와 비건 발효 버터 커리, 그리고 샌드위치 도시락을 테이크아웃해서 숙소에서 먹었다. 저녁에는 <안덕>이라는 한식집에서 만둣국과 콩전을 테이크아웃 해왔는데 국물이 맑고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형철은 두 가게가 모두 마음에 들었는지, 서촌에는 진정성 있는 가게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이런 가게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 동네에 살고 싶어진다.
금요일, 여섯째 날엔 북촌 데이트
유독 하늘이 파란 아침이었다. 서촌에는 새가 많은데, 창 밖 너머로 까치 부부가 아침 일찍부터 둥지를 짓기 위해 나뭇가지를 나르고 있었다. 우리가 머무는 이곳은 옥상 테라스가 있는데,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인왕산을 바라보는 것 자체로도 정화가 되는 기분이다. 아침은 간단하게 요플레와 사과 그리고 딸기를 먹고, 점심은 라면을 끓여 먹었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는 날이다 보니, 오후에는 반차를 내고 북촌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청와대를 지나 북촌까지 뚜벅뚜벅 걸어갔다. 마침 아는 분이 사진 전시를 기획했다고 하셔서 갔는데, 공간도 멋졌을 뿐 아니라 천경우 사진작가님의 작업에 푹 빠져버렸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bird listener> 였는데, 헬싱키의 어느 섬에서 조류학자와 함께 새소리를 수집하고, 그 소리를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어떤 모습을 가진 새인지 상상해서 그림 그리게 하고, 그 밑에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주는 소중한 사람의 이름을 쓰게 했다. 그리고 그 드로잉들을 모아서 책으로 만들었는데, 이 작품의 여정이 정말 매력적이라 느껴졌다. 나도 언젠가 이런 다정함이 느껴지는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촌을 걷는 김에 궁금했던 <서울공예박물관>까지 다녀온 날. 벌써 마지막 밤이라니. 우리의 마지막 만찬은 <유앤피> 피자로 정했다. 메뉴 중에 ‘인왕산 매콤 치킨 피자’가 있었는데 인왕산 이름을 붙인 것이 신기해서, 페페로니와 함께 반반 피자로 시켰다. 아쉬운 마지막 밤.
토요일, 이제 다시 원래 동네로.
서촌을 떠나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날. 아침 일찍부터 짐 정리를 하고 10시 반쯤에 나왔다. 차를 타고 가면서 오랜만에 높은 빌딩과 한강을 보니까 한적한어느 작은 동네에서 살다가 도시로 가는 기분이 들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일주일 동안 살아보면서 느낀 건 '서촌은 살아보고 싶은 동네'라는 것이다. 진정성 있는 작은 가게들이 많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주거유형으로써 '주택'은 잠깐 며칠 지내는 것만으론 실제 주택살이의 어려움을 체감하긴 어려웠지만, 아파트 층간 소음이 없고, 독립된 공간이라는 점, 바로 대문을 열면 바깥 공간이 펼쳐지기에 산책을 더 자주 그리고 쉽게 나가게 된다는 점이 좋았다. 우리는 다음은 과연 어디서 어떻게 지낼지 궁금해진다.
서촌살이의 작은 팁
- 서촌은 주로 월/화에 쉬는 곳이 많다. 보통 수~일 영업하는 곳이 많았다.
- 서촌 통인시장에 있는 <러브마들렌>에 가면 크런키가 가득 올라간 초코마들렌을 먹어보길.
- 비건 요리가 궁금하다면 <큔>을 가보길. 사람이 많으면 테이크아웃도 가능하다. (수~일, 11-16시)
- <안덕>은 평일에만 테이크아웃을 할 수 있다. (수~일, 12~18시)
- <중국>은 점심시간에 가면 줄이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오래 기다리고 먹으면 아쉬울 수 있으니 대기가 거의 없을 때 먹길 추천한다.
- 시노라 카페는 꼭 가보길 권한다. 중국 밥집이랑 가깝다.
추천하는 서촌의 동네 가게 (일주일 동안 먹었던 곳들)
- 카페 : 시노라, 노멀사이클코페
- 맛집 : 발효식료품 카페 큔, 안덕, 중국
- 배달 맛집 : 세검정 돈까스, 유앤피 피자집
- 빵집/구움 과자 : 효자베이커리, 쁘띠통, 모드니에, 러브마들렌
* 2022년 1월에 서촌살이를 했고, 1년 만에 서랍에 묵혀둔 글을 꺼내보았어요. 누군가 서촌 살이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꼭 한번 살아보라고 말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