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다 외롭게 떠내려가야 하는 섬입니다.
박경리
민족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 '토지'의 작가로 '토지'가 없는 한국 문학사를 상상해 보면, 박경리란 인물이 한국 문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표류도
1959년 현대문학에 연재되어 호평을 받은 박경리의 장편 소설 <표류도>는 제3회 내성문학상을 수상했다.
내용
매우 지적인 다방 마담의 시각으로 작품이 전개된다. 명문대 출신 여주인공의 좌절된 사랑과 다방을 출입하는 군상들의 허울 좋은 모습이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작품.
2017년 말, 나는 연고도 없는 제주도에서 자영업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참 재미있다. 늘 내 앞에는 예상치도 못한 미래가 놓여있었으니까. 학창 시절 수학, 과학, 공학을 공부했던 내가, 넥타이를 졸라매고 강남역 그 개미떼의 아침 행렬에 끼어 출근하던 내가 카페 사장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자영업에 몰골하고 있던 무렵, 지인에게 책 한 권을 추천받았는데 그 책이 바로 박경리의 '표류도'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다방 마담이다. 시점이 현대로 넘어온다면, 주인공 '현회'는 카페 사장쯤 되지 않을까. 아무튼 '마돈나'라는 다방에서 마담 '현회'와 손님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지루할 틈도 없이 독자를 끌고 간다. 나 역시 자영업을 하며, 알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여러 가지 소문이나 추문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입장이었기에,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금세 '현회'가 될 수 있었다. 이야기에 빨려들어갔다.
그렇게 다방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쉴 새 없이 쫒아가다 보니 책의 후반부쯤에서 이런 문장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각각 떨어져서 떠내려가는 외로운 섬들입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인연이란 혈육이건 혹은 남이건 섬과 섬 사이의 거리, 그러한 원근에 지나지 못합니다. 내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외롭게 떠내려가야 하는 섬입니다. 이제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닐까요?"
"그렇죠. 섬은 한자리에 있는 섬이 아닙니다. 표류도니까요. 움직이니까요. 죽음 바로 직전까지 섬은 자기의 의지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이 문장은 읽어내리던 순간 강력하게 날아와 내게 박혔다. 그 때 나는 마치 m처럼 짜릿함을 느꼈던 것 같다. 이런 문장으로 날 더 때려달라 말하고 싶었다. 사람을 두고 표류하는 섬이라니. 책의 서사를 순간적으로 까먹을만큼 인상적인 문장이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팽팽히 타고 있던 썸을 끝내고 결국 이 페이지에서 완전히 반해버렸다.
p.s. 이 책을 읽다 보면 ‘인텔리’라는 단어를 상당히 자주 만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다른 소설에서도 ‘인텔리’라는 단어를 본 적이 있는데, 이런 것도 내겐 재미있다. 굳이 지식인을 ‘인텔리’라고 표현하는 게 마치 작가의 가벼운 지적 허영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말 그대로 그냥 좀 재미있다. 오늘날로 치면 ‘상징적인 표현이 많네’ 대신 ‘메타포가 가득하네’ 정도 되려나. 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