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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그레이스콘 Feb 21. 2022

엄마 박완서의 부엌

호원숙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세미콜론, 2021)

엄마는 집에서도 한복 치마저고리 차림에 광목으로 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현대문학》이나 《사상계》를 보면서 잠시 누워 있던 엄마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호원숙, 세미콜론, 2021)



보름 전쯤, 사흘 새벽에 나눠 읽었다. 엉엉 울어본 것이 정말 오랜만이라 느껴질 정도로 눈물을 펑펑 쏟았. 작고 얇은 책이라 단숨에 읽어주마 덤벼들었던 것이 잘못이었던 듯, 마치 제대로 한대 얻어맞은 것 마냥 머리가 얼얼했다. 눈물 훔칠 때마다 안경을 내려야 하는 것도 힘들어, 아예 책을  앞에 가까이 들었다. 차라리 노안이 와서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난생처음. 눈물이 책장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간격만 두고서 읽어 내려갔.


그런데 우습게도 시간이 좀 지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만큼 울 일이었나 싶다. 책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정도로 내 기억력이 형편없다. 분명 책을 읽을 때는 온몸을 꼬집듯 사무치는 깨달음이 많았었는데, 고새 까먹었다. 아무래도 가장 바쁜 와중에 전공서 제쳐두고 일탈처럼 읽었던 수필집이라 카타르시스가 더 컸던 탓도 무시하진 못하겠다. 뭐하러 그렇게 울었었나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겨두고 싶은 생각들이 있어 적어둔다. 읽었으면 써야 한다.


사실... 호원숙 작가의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매스컴의 선전이 하도 요란해 일부러 외면했던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 10주기"라는 띠지가 박완서의 명성에 묻어가려는 출판사의 대단한 장삿속 같아 그냥 싫었다.  더구나 부제도 마음에 안 들었다.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라니. 평소 부엌에 담긴 여성 서사를 거부하는 편이라, 이도 저도 다 탐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읽게 되었다. 근거 없이 반감부터 가졌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 책의 곳곳에 나를 대입해 볼 부분이 많아 놀랐다. 가족과 인생에 대한 감상이 음식을 중심으로 서술되는데, 그 좋은 기억은 아버지가 퇴근해 들어오시던 '7시 30분'처럼 오롯하다. 마치 나도 그 시간 그 집 식탁에 앉아있는 것 마냥 생생하게 읽혔다.  


호원숙,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세미콜론, 2021, p.91

부제는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지만, 자신의 요리 일상이 번갈아 나와 마치 과거와 현재가 교차 편집되는 영화 장면처럼 흘러간다. 우연히 시작한 베이킹에 '혹시 내가 소질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는 장면은, 유튜브로 베이킹에 입문한(?) 나를 보는 것 같아 피식 웃음도 나왔다. 글을 읽으며 울다, 웃다, 오랜만에 나를 비울 수 있었다.


내가 혹시 베이킹에 소질이 있는 게 아닐까? 적어도 즐기고 있다는 게 든든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지루하다면 지루한 남은 인생에 즐길 수 있는 취미가 하나 늘어났다는 건 또 얼마나 좋은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생각은, 좋은 글을 읽는다는 건 문장의 수려함보다 그 '생각'에 반하는 것이란 점. 어떤 책에서 가장 감명받는 때는 내 생각과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게 될 때, 타인의 글에 나를 투영해 볼 수 있을 때인 것 같다는 사실을, 지 않으려 내내 되새겼다.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어쩜 제목을 이리 잘 지었을까, 그저 감탄할 수밖에.


호원숙,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세미콜론, 2021,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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