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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이라는 카르마

에에올을 통해 보는 엄마와 딸, 그 끈질긴 인연에 대해 

뒤늦게야 이영화를 보았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아쉽게도 스크린이 아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 봤는데, 정말이지 방향키 한 번 누를 틈 없이 몰아치는 영화였다. 가끔 너무 징그러워서 화면을 손으로 가린 적은 있어도 '10초 앞으로'를 누른 적은 없다. OTT 시대에 이 말은 최고의 찬사다. 


이 영화의 훌륭함이나 인생에 대한 철학은 이미 많은 곳에서 다뤄진 바 있으니 나까지 보택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놀라웠고, 즐거웠으며, 이 영화 관람 자체가 나에게는 엄청난 경험으로 남았다. 아마도 오래오래 곱씹으며, 때로는 다시 결제를 해서 보는 일도 있지 않을까 싶다.  


엄마와 딸, 그 애증의 관계 


이 영화는 여러 개의 (어쩌면 무한개의) 평행 우주를 보여준다. 그 여러 갈래에서 주인공 에벌린은 까칠한 세탁소 주인을 비롯해 천재적인 프로그래머이거나 전세계적인 영화배우이거나 사무실을 청소 직원이거나 철판 요리사로 살고 있다. 이토록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그녀이지만, 이상하게도 딸 조이와 함께 등장하는 평행우주에서는 늘 같은 지점에 서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매우 적대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즉, 에벌린이 죄수라면 조이는 간수이고, 에벌린이 변호사라면 조이는 검사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알파버스'에서는 천재 프로그래머인 에벌린이, 요원인 조이를 너무 몰아부치는 바람에 조이가 파괴적인 '조부 투바키'가 되어버린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은 어느 우주엘 가든지 서로에게 날을 세우리라는 것이 거의 확실할 정도. 

오히려 현생이 가장 사이가 좋을 걸지도


이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 중에서 엄마와 딸이라는 이름으로 두 사람이 엮이는 것이 얼마나 보통 일이 아닌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감정들이 얼마나 골이 깊은지도. 엄마 에벌린은 수 많은 선택을 해왔고 그 결과 수 많은 평행 우주들이 만들어졌다. 그 우주들 중에는 에벌린과 조이가 모녀관계가 아닌 우주도 무더기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엄마와 딸이 아니라 하더라도 에벌린과 조이는 반드시 만난다. 그리고 그 모든 우주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나 역시 딸을 키우고 있는 엄마 입장이라 그런지, 조이보다는 에벌린의 마음에 더 잘 이입이 되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엄마'보다는, '엄마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한 딸'에 더 공감이 됐다.  


엄마의 눈에 비치는 요즘 애들 

딸 조이의 알파버스 캐릭터인 '조부 투바키'의 패션은 화려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이걸 보면서 들었던 내 생각은,  '분명 본인은 멋있다고 생각하겠지?'라고 것이었다. 

나는 그 생각을 내 딸을 보면서도 했었다. 엘사 드레스를 뻗쳐 입던 6살 때에도, 굳이 상하의와 양말까지 노란 색으로 맞춰 입고서 학교에 가던 8살 때에도, 안된다고 말했는데도 빨간 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는 지금도, 아이는 아마 본인의 그러한 패션 감각을 매우 신뢰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6살 때 엘사 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보여주면 벌써부터 '그 사진 제발 지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패션 센스를 전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조부 투바키가 열심히 옷을 바꿔입고 나올 때마다, 나는 그런 것들로 자신을 주장해야 하는,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떠오른다. 내면에 있는 감정과 생각들을 주체하지 못해서 저렇게 뻗쳐 입어야만 하는 그 시기 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들과는 달라야 하는 저 때 말이다. 자신에게 무엇이 어울리는지 알지 못한 채로 용기만 있는 저 시절 말이다. 


그런 무모한 패션 센스는, 엄마 눈에는 그저 조부 투바키처럼 보인다. (물론 영화 속 저 의상들은 다른 함의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이 글에서는 잠시 외면하기로 한다.) 그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저런 꼴로는 밖에 내보낼 수 없다. 역시 엄마와 딸은 상극이다.  


중 2병을 대하는 엄마의 자세 

이 영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돌 에피소드'. 세상만사 다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조부 투바키는 결국 아무 인간도 살지 않는 행성으로 가서 돌로도 살아본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돌이 되어서도 삶의 의지를 전혀 찾지 못한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에벌린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는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중2병이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돌이라니. 정말 어디서부터 이 돌맹이 녀석을 가르쳐야 한단 말인가. 답답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양가감정은 부모들이 느끼는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알다시피 이런 중2병스러운 이야기를 허투루 들어서는 안된다. 간혹 그 중2병은 한 세계를 파괴시킬만큼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만들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부 투바키는 자신의 세계를 파괴시킬만한 것을 만들어 냈다. 이름하여 베이글. 



다행히도 에벌린은 조부 투바키의 이야기를 정성 껏 들어준다. 이건 딸 아이가 아직 사춘기를 겪지 않고 있는 나에게는 많은 가르침을 준 장면이기도 했다. 나중에 아이가 "엄마, 나는 차라리 돌이 되고 싶어."라고 말하는 날이 오면, 같이 이 영화를 봐도 좋겠다. 


엄마에게도 스무 살이 있었단다 

에벌린은 '자신이 될 수 있었으나 되지 못했던' 모습들을 두루 경험한다. 그녀는 쿵푸를 자유자재로 하는 멋진 영화 배우이기도 했고 라이벌의 비밀을 알아차린 요리사이기도 했으며 (조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여인을 사랑하는 여성이기도 했다. 그건 분명히 에벌린이 놓친 수많은 가능성이었다. 

반면 20대인 조부 투바키는 그 모든 가능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쉴 새 없이 모습을 바꿔가며 눈 앞에 나타나는 그녀를 보다보면 약이 오르기도 한다. 에벌린이 잃어버린 가능성을, 그녀는 낭비하듯 써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에벌린은 자신이 놓쳐버린 가능성이 아쉽고 아까운만큼, 딸 조이가 어서 착실한 미래를 결정해서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내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좋은 음식을 먹으라고 잔소리를 했던 것이겠지. 에벌린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놓쳐버린 가능성이 지금, 조이에게 가 닿았다는 것을. 그리고 부디 자신과는 다른, 조금은 괜찮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든 부모들의 마음은 그렇다. 부디, 나보다는 나은 인생을 살기를. 


하지만 이제 막 자신의 인생을 시작하는 조이의 입장에서는 '엄마보다 나은' 이라는 기준이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이 마음은 딸 조이가 엄마에게 보여주는, 존경의 한 편린이기도 하다. 딸의 눈에는 엄마의 삶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뜻이므로. 물론 자신의 남다른 점을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감추려하는 건 분명 아쉽고 서글프지만, 그 누구보다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했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엄마를 좋아했으며, 존경했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엄마라면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실낱같은 믿음이, 그녀를 무한에 가까운 평행 우주를 너머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눈알이 하나 더 필요해

에벌린은 딸 조이를 구하기 위해 이마에 눈알을 하나 붙인다. 그건 지금껏 살아온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하되, 조이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눈을 뜨겠다는 결심과도 같아 보인다. 아마도 너의 신발을 신듯이 너를 100%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세계 속에서 내 관점을 가지고 살겠지만, 너만을 위한, 너를 이해하기 위한 눈을 하나 떠 보겠다는 의지. 

엄마라는 건 그런 존재다. 내 아이만큼은 도무지 객관적으로 봐지지가 않는 존재. 스노우 같은 건 명함도 못 내밀 필터가 엄마의 눈에는 존재한다. 그 필터는 사춘기 즈음에 깜박거리다가 스무살 쯤 되면 아예 꺼져버린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하나 배웠다. 그 때가 오면 눈알을 하나 더 달면 된다. 그 눈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항상, 항상 너와 함께 있고 싶을거야 

나는 젊음을 바쳐 딸을 낳고 키웠다. 그 사이 관절이 많이 약해졌고 기미도 늘었으며 기억력도 나빠졌다. 반면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피어난다. 얼굴에는 잡티 하나 없고 늘씬한 다리는 근육으로 탄탄하다. 장도 건강해서 아침마다 쾌변을 하고 조금 피곤하더라도 잘 자고 일어나면 곧바로 쌩쌩해진다. 나는 그런 아이가 부럽다. 가끔은 시기질투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 나의 젊음이 흘러 흘러 아이에게 가 닿았다는 것을. 몇 년 후에는 내 찬란했던 20대가 아이의 삶에 피어날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싫지 않은 이유는, 다름아닌 그 젊음을 누릴 사람이 바로 내 아이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 딸이기 때문에. 나는 내 젊음을 아이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선물로 준 것이다. 찬란하게 어리석을 수 있는 기회, 오색찬란한 옷을 뻗쳐 입다가도 한순간에 회색 빛 돌이 될 기회, 자신의 세계를 베이글처럼 만들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나는 아이에게 선물로 주었다. 가능하다면, 그리고 아이가 허락한다면, 나 역시 오래오래 아이와 함께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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