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여행 4편
코스 | 나룻부리항 – 어류정항 – 보문사 – 민머루해변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가 놓이면 주민들의 생활은 편해지지만, 섬 고유의 풍경과 문화가 빠르게 변할 거라는 것을 알기에 여행자에게 마냥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강화도와 석모도를 잇는 다리가 들어선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여러 번 강화도를 여행했지만, 석모도까지 들어갔던 것은 2007년 여름이 마지막이었다. 외포리 선착장에서 카페리호에 차량을 싣고 석포리 선착장을 통해 석모도에 들어왔었다. 20분 남짓, 배를 타고 여행했다는 말이 낯간지러울 정도로 짧은 거리지만 그 여정에는 낭만이 가득했다.
2007년 여름 바다를 막아 만들었다는 소금 밭은 텅 비어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염전의 규모를 조금씩 줄이다가 2006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소금 생산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흙이 머금고 있는 소금기를 빼고 농사를 지으려면 적어도 10년은 그대로 방치해 두는 수밖에 없다고. 전답이 될 줄 알았던 폐염전 자리는 석모대교가 놓이고 2년 후 골프장과 스파 리조트로 바뀌었다. 더 많은 것이 변하기 전에 석모도를 기록해 두기로 했다.
초겨울의 나룻부리항
석모대교를 건너 석포리 선착장이 있는 나룻부리항(석포항)으로 향했다. 석모대교가 개통되기 전 강화도 외포항 사이를 오가는 여객선이 다녔지만, 이젠 여객 항구의 기능을 잃고 가끔 낚시를 하거나 갯골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됐다. 1980년대 선착장에서 마을 아낙들이 땅과 바다에서 수확한 쌀과 나물, 젓갈류를 판매하던 재래시장은 현대식 어시장으로 재정비했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 상인도 손님도 없는 나룻부리항 어시장은 유기견과 길고양이 몇 마리가 지키고 있었다. 닫힌 줄 알았던 식당 문을 열고 주인장이 가게 앞에 쌓아 놓은 순무를 다듬으러 나왔다. 쓸쓸할 정도로 항구가 조용하다고 했더니 식당 주인은 ‘다리가 놓이고 석모도를 쉽게 오가게 되면서 관광객이 늘었지만, 여름휴가철을 제외하고 평일에는 한산한 편’이라고 했다. 가을에는 나룻부리항부터 어류정항까지 해안 간척지의 둑을 따라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도보 여행자들이 많았는데 날씨가 추워져 그 마저도 줄어든 것 같다고. 기온은 낮지만 하늘이 맑으니 속도를 늦추면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식당 주인이 알려준 길을 따라 걸었다. 썰물 때라 바다는 검은 갯벌을 드러내고 고깃배들은 갯벌 위에서 겨울잠을 잠자고 있었다.
바다와 논 사이, 바다와 저수지 사이에 핀 갈대를 해치며 천천히 걸었다. 한쪽에는 갯벌이 끝없이 펼쳐지고 한쪽은 농사를 마친 논과 저수지가 교차되어 나타난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숨어서 휴식을 취하던 새들이 푸드덕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보문선착장 방향으로 가는 길에는 드넓게 칠면초군락지가 펼쳐졌다. 초록색으로 피어나 여름을 지나면서 차츰 붉은색을 띠다가 늦은 가을이 되면 짙은 자주색으로 변하는 칠면초는 ‘바다의 단풍’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 계절의 칠면초는 낙엽을 떨구듯 색을 덜어내고 보호색으로 무장한 채 갯벌에 묻혀 있다. 보문선착장을 지나 어유정항으로 향하는 길, 풍경이 좋은 곳마다 바다를 향해 창을 낸 카페와 펜션이 눈에 띈다.
물고기가 노니는 마을과 염전이었던 자리
물고기가 떼를 지어 노니는 마을이라 해서 어유정이라 불리는 어유정항 주변은 소금 생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1957년 윤현상이라는 사람이 바다를 매립해 240ha 규모의 거대한 염전을 세웠고, 바닷물을 건조해 연간 4000톤이 넘는 천일염을 생산했다고 한다.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지역에서 나는 소금은 물맛이 짜지 않아 소금에서도 단맛이 나는데, 한때 이 지역 사람들은 주머니에 소금을 한 움큼 넣고 다니며 술안주로 먹었을 정도로 질 좋은 소금이 생산됐다고 한다. 강화도 새우젓이 유명한 것도 이곳의 소금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최상급의 소금을 생산했지만, 치솟는 인건비와 생산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2006년 염전은 문을 닫았다. 염전이었던 자리에는 2019년 골프장과 스파 리조트가 들어섰고, 소금기가 빠진 땅은 농지로 변했다. 이제는 어류정 저수지 바깥에서 허물어져가는 소금창고와 염전이었음을 알리는 표지판에만 과거의 시간이 남아 있다.
꽃게와 새우, 병어와 밴댕이가 많이 잡힌다는 어류정항에는 쉼 없이 드나드는 고깃배들을 지휘하는 등대가 있고, 끄트머리에 정자가 있다. 정자에 올라 고요한 바다를 보니 방파제 끝에서 섬처럼 앉아 낚시를 즐기는 이들이 보인다.
바다를 향해 고정된 시선, 보문사와 민머루해수욕장
석모도에 들어설 때부터 목적지는 보문사였다. 자연 암벽 밑에 석실을 마련하고 그 안에 감실을 지어 나한상을 모신 석굴 사원이며, 절 뒤편의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에 조각된 마애석불로 유명하다. 보문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 성지로 선덕여왕 때 창건한 절이다. 양양 낙산사, 금산 보리암과 함께 대한민국 3대 관음 도량으로 불리는데, 관음 도량이란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으로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소망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전해진다.
일주문을 지나 극락보전에 이르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된다. 세 걸음 걷고 허리를 펴길 반복하며 극락보전에 서 주변을 돌아보니, 달라진 것이 많다. 용왕전 앞에는 금빛으로 치장한 용 두 마리와 오백나한전, 와불전, 석굴사원 앞 3층 석탑 모두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경내를 둘러보며 잠시 숨을 고른 뒤 극락보전 옆 계단을 따라 눈썹바위로 향했다.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가파른 계단을 따라 고개와 허리를 숙이고 20분가량 오르니 눈앞에 마애석불이 나타난다. 합장을 하고 뒤돌아 부처님 시선으로 아래를 굽어보니 그 사이 해가 많이 기울었다. 멀리 물러났던 해안선도 조금씩 육지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서둘러 절을 빠져나와 민머루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어류정항 곶 너머에 자리 잡은 민머루해수욕장은 석모도 유일의 모래해변이다. 약 1km에 걸쳐 백사장이 펼쳐지고, 썰물 때면 수십만 평의 갯벌이 드러나 해수욕과 갯벌체험을 동시에 즐기기 좋다. 해질 무렵이 되자 갯벌에 물이 차오르듯 낮에는 비어 있던 해변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몇몇은 서둘러 텐트를 치고, 몇몇은 짧은 일몰의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느라 분주하다.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모를 선 아래로 태양이 사라진 후에도 붉고 푸른 쇼가 한참 동안 계속됐다. 강화도와 연결되는 다리가 놓인 뒤 석모도의 많은 것이 변했지만, 민머루해수욕장에서 본 해넘이는 그대로였다.
오래된 풍경 위에 쌓이는 새로운 시간
불편한 채로 머물렀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구불거리는 해안선을 따라 좁게 이어지는 도로, 천천히 데워져 오래도록 온기가 머무는 온돌, 사색의 공간을 남겨둔 절집, 숨이 턱 끝까지 차야 겨우 닿는 산의 정상 그리고 섬과 섬 사이 좁은 바다를 잇는 배 같은 것들. 하지만 이색적인 풍경에서 낭만 찾는 여행자의 바람과 달리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사람들은 편한 것을 찾아내고 소비한다. 석모도에도 새로운 것이 많았다. 보문사 앞바다에는 미네랄 온천이 생겼고, 강화도를 마주 보는 동남쪽 해안에는 골프장과 리조트가 들어섰다. 사계절 꽃이 피는 수목원이 생겼고 자연 속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글램핑장과 자연휴양림, 카라반 리조트도 생겼다. 하지만 새로운 것 사이사이 시간이 뭉텅이로 고여 있는 공간들이 있기에 술안주 삼아 주머니에 소금을 넣고 다니던 염전의 시대가 끝난 것이 마냥 아쉽지만은 않았다. 새로운 것은 섬을 다시 찾게 하고, 오래된 풍경은 여행자를 섬에 더 오래 머물게 한다. 석모대교를 건너며 품게 된 서운함을 서쪽 바다 끝에 묻고 왔던 길을 돌아 천천히 섬을 빠져나갔다. 구불구불한 도로가 뒤 따라오며 배웅한다.
Info
강화나들길은 강화도는 물론 석모도, 교동도, 주문도, 불음도까지 아우르는 도보여행길이다. 모두 20개 코스로 310.5㎞에 달한다. 강화도의 빼어난 풍광과 유구한 역사를 즐길 수 있어 트레킹은 물론 자전거 라이딩을 하기에도 좋다. 석모도에는 석포리 선착장에서 북쪽의 삼산면 방향으로 이어지는 ‘석모도 상주 해안길(19코스)’과 석포리 선착장에서 남쪽 해안선을 따라 보문사까지 이어지는 ‘석모도 바람길(11코스)’가 있다. 배차 시간이 촘촘하지 않지만, 대중교통으로도 여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