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젯밤 일찍 잠들었던 규호는 몇차례 뒤척였을 뿐 아무런 투정 없이 아침을 맞았다. 어슴푸레 눈을 뜨면서 부터 "엄마! 엄마!" 엄마를 찾거나, "더 잘래. 추워. 안아줘"라고 요구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규호가 잠이 깬 것을 확인하고 얼굴을 바짝 들이민 한호의 표정을 보고 활짝 웃었고, 하루의 가장 첫 동작부터 장난기를 가득 머금었다. 방 문을 열어 밖을 내다 보았더니 아빠는 말씀 묵상 중. 규호는 이불을 그대로 뒤집어 쓰고 살금 살금 미끄러져 아빠의 발치까지 다가갔다. 그러고는 갑자기 이불을 확 젖히면서 '와' 하고는 까르르. 제 스스로가 웃기다고 자지러졌고 이내 아빠 품을 파고 들었다. 아빠를 성공적으로 놀래켰다고 믿는 아침.
2. 누룽지 끓는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웠고, 계란 후라이, 사과, 김치를 더해 간단하게 아침을 먹던 중 한살림 택배가 도착했다. 와르르 내용물을 쏟아 확인하니 그것들이 모두 김밥 재료인 것을 부리나케 눈치채는 아이들. 곧장 누룽지를 밀어 놓고 부엌으로 달려가서 준호는 시금치 봉투를 뜯고 한호는 맛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밥에 참기름, 식초, 소금을 넣어 버무리고 계란도 휘휘 저어 풀던 일사천리. 규호는 당근을 보더니 "엄마, 나 이것 갖고 캠핑장 가서 토끼한테 줄래"라고 이야기 한다. 작년 봄에 갔던 캠핑장에 토끼가 있었고 당근을 사서 먹이로 줬는데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좁은 부엌에서 무엇을 하는지 제각각 분주하고, 그렇게 모은 재료들로 역시 제각각 모양의 김밥을 말던 시간. 바닥은 참기름 때문인지 유독 빛이 나고 공기는 고소하게 가득 찼다.
3. 형들이 태권도장에 간 오후, 무료한 듯 배회하던 규호가 장난감 주사기에 물을 담아와 내 팔을 겨누었다. 물 몇 방울 떨어지는 것 즈음이야 괜찮지만 그래도 욕실에서 쏘는 게 낫겠지. 규호를 욕실로 데려갔다. 규호는 천장을 향해 한껏 물을 쏘고 다시 낙하하는 물을 바라 보면서 "엄마, 엄마, 별이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있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물이란 것은, 시원하고 투명하고 빛나는 그 물질은 항상 최고의 놀이감이다.
4. 한호, 규호가 승호에게 매달려 썰매를 탔다. 특별한 놀이 방법이랄 것도 없이 그저 승호의 내복을 꼭 붙들고 있으면 승호가 총총 달리며 아이들을 끌어 주는 것이었다. 형 덕분에 동생들이 까르르 웃는 것처럼 엄마 귀에 즐거운 소리가 있을까. 승호의 내복은 얼마나 늘어났는지 헐렁하게 쳐져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늘 하루 펼쳐진 4형제 모습의 조각들, 나는 때때로 멈추어서 이 웃음과 환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이것이 모두에게 가능한 것일까 헤아려 본다. 모든 놀이와 활동의 시작은 아이들의 생기, 도전, 반짝반짝 반짝이는 내면의 열망, 함께 할 수 있는 형제들로 부터 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단어들을 거치고 도착하는 곳에는 언제나 '허용'이라는 이름이 있다. 이불을 질질 끌며 거실로 나오는 것이 허용되고, 온갖 부엌 살림들을 꺼내어 이것 저것 섞어 보는 것이 허용되고, 물을 갖고 노는 것이 허용되고, 옷을 잡아 당기는 것이 허용되는 것.
규칙이 강조되는 집단, 단정함이 유지되어야 하는 공간, 융통성이 없는 시간 속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는 것들을 나는 허용하는 편이다. 한동안은 '방임'과 헷갈렸고 그런 질타를 두려워 하기도 했지만, 나는 '허용'이라는 개념에 안착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고 자라는 이 곳은 훈련생을 배출하는 사관학교도 타인들에게 번쩍번쩍한 대리석 바닥을 보여줘야 하는 모델하우스도 아니고, 다만 가정이므로. 가정이므로!
하나님나라의 자녀인 나는 어떠할까. 하나님나라를 규칙과 율법에 얽매여 고소당하고 정죄받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혹은 사랑과 용서 안에 허용되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나는 하나님의 훈련생이 아니라 자녀이고, 눈치 보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 자녀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방식의 관계일 것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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