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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ther ruth May 01. 2023

모순되지 않는 이야기

[해일]을 읽고

산책클럽에서 읽은 시기: (2023. 2. 20~2. 22) 
 
 


 산 중턱 농장에 사는 키노는 저 아래 바닷가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삐뚤빼뚤 서 있는 집들은 이상하게도 바다 쪽으로 창을 내지 않았다. 어부의 아들인 지야를 사귀고서야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바다를 두려워 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헤험치며 놀면서도,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으면서도 그들은 바다를 ‘성 내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잔잔하던 때에도 무섭게 그려보곤 했던 해일이 정말 마을을 덮쳤다. 지야는 간신히 키노의 집으로 도망쳤지만 다른 모든 가족들은 순식간에 파도에 휩쓸렸다.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지야. 책의 거의 1/3 분량을 차지하는 동안 지야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럴 수 밖에 없으리. 키노의 아버지는 조급해 하지 않고 서서히 안정이 될 지야를 기다렸다. 
 “지야는 다시 행복해 질 수 없을 거에요.”라고 키노는 침울하게 말했다.
 그러나 키노의 아버지는 “아냐, 언젠가는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삶은 언제나 죽음보다 강하거든.”이라고 대답하면서. 물론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야 되겠지. 가족들을 잊지 못하겠지”라고 덧붙혔지만.
 


 
 불현듯, 지인의 결혼식이 떠올랐다. 언니가 혼주가 되고 동생은 신부이던 결혼식이. 어머니는 위독하셔서 병상에 계셨던 것이다. 언니도 동생도 설핏 눈물을 훔쳤지만 결혼식 자체는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어머니의 상황이 여의치 않은데 결혼식을 한다는 게 모순일까? 지독히 슬퍼했으면서 곧 더없이 행복에 겨워한다는 게 우리 몸뚱아리 안에서 공존 가능한 것일까? 잔인한 질문인데,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이런 경우가 얼마나 편만하게 도처해 있는지. 슬픔의 ‘크기’라고 한다면 표현 자체가 가혹하지만, 그러한 크고 작은 수많은 절망과 고통과 아픔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슬픔에 침잠하는 것이 유일한 애도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닫을 수 밖에 없으리. 매일 휘청이는 게 고통을 바르게 직면하고 살아내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 중에 기뻐하는 누군가에 대해 그의 고통이 거짓 아닌가, 가벼운 것 아닌가 의심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다만 그들은 어머니가 병상 중에 계시지만 ‘살아 계실 때 결혼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할 뿐이니까. ‘삶은 언제나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지야는 함부로 웃거나 헛말을 하지 않았다. 죽은 부모, 죽은 형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낙심하거나 울지 않았고 키노의 여동생 세쯔가 장난을 칠 때는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야는 마침내, 폐허가 되었던 바닷가 마을로 다시 내려 갔다. 키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야는 대답했다. “나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어.” 그리고 지야가 보여 주었던 집 안의 큰 방, 그 곳에는 바다로 난 창이 있었다.
   

 언젠가 키노는 “아버지, 우리가 일본에서 태어난 게 재수가 없는 일인 것 같아요. 우리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화산이 치솟아 있잖아요.”라고 질문했다. 그때 키노의 아버지는 “위험 한가운에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아니? 죽음을 눈 앞에 두니까 우리는 용감하고 강한 거야.”라고 대답했다. ‘죽음을 자주 봤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아. 삶과 죽음이 서로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도 덧붙혔다. 
 [해일] 책을 덮으며 소감을 나눌 때 멤버 중 한 분이 지진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 했다. 포항, 울산 지역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마지막이라도 기도하자’고 ‘함께 있자’고 교회로 모여 들었던 엄마들에 대해. 그때 엄마들이 두려움에서 평안을 구하는 기도를 할 때 옆의 어린 자녀들은 천둥벌거숭이 처럼 뛰어 놀았다고 했다.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채 그저 교회에서 친구들을 만나 즐거웠으리. 간단하게 언급된 엄마들과 아이들의 이 대조적인 장면을 따라 그려 보면서 나는 무언가 공중에 있는 것을 보는 듯 같았다. 두려움과 환희가 섞이고 기도와 노래가 한 목소리가 되는. 
 죽음의 위험을 겪으면서 더 용감해 진다는 키노 아버지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엄습하는 두려움의 크기가 너무나 거대하다. 하지만 지야는 그 뜻을 올바로 이해한 것인지 고향을 버리지 않고 그곳에서 바다를 향해 창을 냈다.
 죽음의 소식이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 들었다 빠져나가고 있지만 무작정 도망하지 않고 교회로 모여든 엄마와 아이들. 그 추동력은 그들이 키노 아버지와 같은 경험과 지혜를 한 뼘 만큼이라도 가졌기 때문인지. 혹 그렇지 않더라도 그 이후에는 분명 갖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일]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 벅의 작품이다. 그녀는 선교사인 부모님의 품에 안겨 생후 4개월 때 중국으로 건너갔고 생의 전반기 약 40년을 중국에서 지냈다. 특히 격변하는 시기 동안 일본의 중국 침략을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자신의 묘비에는 한자로 이름을 새기도록 했다. 또한 [대지]를 비롯한 문학 작품들은 서구 사회가 중국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각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녀의 헌신과 사랑은 비단 중국에만 머물지 않았고 모든 동북아의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에게로 향했고 작품으로도 기록되었다.
 그 중 일본을 주제로 한 것이 [해일]이다. 일본을 화산과 해일에 갇혀 있지만 용기 있고 강한 민족으로 묘사한 것이다. 거의 중국인으로 동화되었던 그녀의 입장에서 침략국 일본에 대한 태도는 적대적일 수 밖에 없었으리. 그러나 결국은 미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혹은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했기 때문인지 우호적인 작품을 그려냈다. 그녀 스스로 모순이라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때때로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한아름 빌려오는데 한권 한권 읽다 보면 의도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일본 작품인 경우가 있다. 승호는 종이접기를 좋아하는데 ‘오리가미’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에서 유래된 것임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은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아마 곰곰 헤아려 본다면 대부분이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일본과 엮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 

 준호는 일본 그림책을 읽어주는 나에게 ‘엄마는 친일파. 엄마, 친일파예요?’라고 장난스럽게 묻기도 하는데 순간 갸웃 하지만 명백히 다른 분야이다. 역사적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잊어서는 안되며 잊을 수도 없지만, 그들의 (일부)문화와 재능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니까. 일본의 좋은 사람들과 좋은 점은 늘 귀감이 된다. 펄벅이 다양한 문화를 겪으며 살아간 방식이 이러할지 모르겠다.  
 



“좋아, 그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고민할 필요는 없어.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고, 무엇을 무서워 하면 우리는 항상 그것에 얽매이게 돼. 살아 있다는 것을 즐겨. 죽음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그게 멋있게 사는, 삶의 방식이야.” p.29
 
“아냐, 언젠가는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삶은 언제나 죽음보다 강하거든. 하지만, 처음에는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여기겠지. 아마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야 되겠지. 눈물은 우리 몸의 나쁜 감정을 씻어낸단다. 지야는 며칠 뒤에나 울음을 조금 그칠 수 있을 거다. ~ 그러면 지야의 마음도 서서히 안정을 찾아 다시 생각하기 시작할 거야. 그럼, 지야도 다시 살 수 있어.” p.62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돼. 지야는 예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함께 살았으니까, 이제부터는 죽은 그들과 같이 살아야 돼. 가족들의 죽음을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돼. 그래야 덜 애통하거든. 지야의 가족들은 지야가 살아 있는 동안 지야의 마음속에서 함께 살아 있어야 돼.” p.63
 
“삶은 죽음보다 강해.” p.75
 
“아버지 우리가 일본에서 태어난 게 재수가 없는 일인 것 같아.”
 ~
“위험 한가운데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아니?”
 ~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니까 우리는 용감하고 강한 거야.
그게 우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짜 이유지. 우리는 죽음을 자주 봤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조금 나중 죽든, 조금 일찍 죽든, 그게 무슨 상관이니?~ 우리는 위험 속에 살기 때문에 삶을 더 사랑하게 된 거야.” p.79
 
모든 가족들은 거기에 서서 지야가 벽의 판자를 미는 것을 봤다. 그들의 눈앞에, 밤바람을 맞아 부풀어오르고 휘몰아치는 바다가 나타났다.

“저는 우리 집을 바다 쪽으로 열어 두었어요.” p.131  




#산책클럽 #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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