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단편집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고 문득 생각난 안녕의 기억들
때는 2003년 여름,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여름이면 온 유럽이 불타오르는 요즘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숙소에 에어컨도 드물던 시절이라, 남유럽 폭염에 계획을 바꿔 북유럽으로 향한 배낭여행객 들도 종종 발견되던 해였다.
아이스크림 하나 가격이 한국의 학식 가격에 맞먹는 등 비싼 물가로 인해 고충이 있긴 했지만, 스물둘의 나는 고등학교 동창과 난생처음 타본 비행기와 바깥세상에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그때는 십여 년 후에 핀란드에 살게 될 줄 꿈에도 몰랐으니 핀란드 산타마을, 노르웨이 피요르드, 스웨덴 삐삐 박물관, 덴마크 인어공주 동상 등등 짧은 여행기간 내에 엄청난 이동시간과 교통비를 요구하는 일정을 짰더랬다. 여행을 위해 구비한 디지털카메라 용량이 모자라서 온라인 갤러리에 사진을 올리고 원본을 지웠는데, 얼마 후 그 회사가 예기치 못하게 문을 닫아 사진을 다 잃은 가슴 아픈 일도 있었더랬다
짧은 비행시간 중에도 밥을 세 번이나 줘서 자다 깨서 기내식을 먹었던 타이항공을 타고 스웨덴 아를란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흔히 삐삐 박물관이라 불리는, 유니바켄을 방문했다. 얼굴에 주근깨가 많던 벽안의 박물관 직원은 우리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이!"
Hey? 우릴 언제 봤다고 너무 친근한 인사말 아냐? "Hello"나 "Hi"도 아니고?
표를 건네주며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딱."
Tak이라고? 러시아어로 '기타 등등(И так далее, and so on)'의 '등'쯤 되는 '딱'? '자, 여기'(Вот так, like this)의 '자' 쯤 되는 딱? 아무리 북유럽이 실용성을 중시한다고 해도 너무 간결한 의사소통 아니야?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 로밍이나 현지 심카드 구매도 빠듯한 예산의 대학생 여행자들의 선택지는 되기 힘들던 시절, 두터운 북유럽 여행책자를 분철해 필요한 부분만 챙겼기에 간단한 현지 인사말이 한두 줄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딜 가나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같은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현지어로 외워서 사용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여행객들도 있겠지만, 그때의 나는 평생 두 번 다시 오게 될지 모르는 멀고 먼 어떤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알아가기보다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유럽 여행에서 가급적 많은 나라와 도시들의 좌표를 찍고, 계획했던 관광명소들과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여행책자를 다시 봤던가, 가는 곳마다 비슷한 인사를 들어서인가 어느 순간 스웨덴어로 "Hej"가 "Hi"와 같은 뜻이고, "Tack"이 "Thank you"란 뜻이란 걸 알게 되긴 했지만.
많은 세월이 흘러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가 의문문임을, 그러나 영어의 "How are you?"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TMI를 늘어놓으라는 뜻은 아님을 알려준다. "안녕히 계세요"와 "안녕히 가세요"의 차이를, 떠나는 자와 머무는 자의 입장임을 알려준다. "저는 ㅇㅇㅇ예요"를 알려주니 아이는 "저는 ㅇㅇㅇ세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자기는 소중하다나 뭐라나.
러시아어로 "안녕하세요"는 "즈드라스트부이쩨"(Здравствуйте, 조금 힘 뺀 건달 말투로 말하자면 "즈드라시쩨")이고, "안녕"은 한층 짧은 "쁘리벳"(Привет)이며, 아예 내가 너를 존대하는지 아닌지 알리고 싶지 않으면 영어식으로 "좋은 아침"(Доброе утро)이라고 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상대방을 지칭하는 동사를 사용해 무언가를 묻는 순간 상대방이 "너"(ты)인지 "당신"(Вы, 요즘은 범용의 존칭인 "선생님"쯤 될지도?)인지 드러나겠지만.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누가 봐도 "프렌즈"에 힌트를 받아 만들어진 것 같은 "남자 셋 여자 셋"이란 시트콤에 "안녕 맨"이란 캐릭터가 있었다. "안녕"이라는 짧은 인사에 얼마나 많은 의미와 뉘앙스가 포함될 수 있는지. 드라마 속 호감이. 가는 이성에게 건네는 쑥스러운 "안녕"과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한 블록 건너 듣곤 했던 "Ciao, bella!"(안녕, 예쁜이)라는 호객꾼인지 희롱꾼인지 알 수 없던 낯선 이의 인사말은 얼마나 다르게 느껴지던지. 대학원 기숙사 복도에서 내게 다짜고짜 "니하오"라고 했던 금발에 푸른 눈의 에스토니아 이웃에게 동양인이라고 초면에 그러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던 기억도 난다. 새로운 외국어 인사말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이 좀처럼 없는 요즘 생각나는 지난날 안녕의 기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