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러시아에서의 직장생활 :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아이 병간호로 소진된 휴가

by Victoria

러시아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 나와 아이는 참 자주 아팠다. 면역력이 채 형성되지도 않은 어린 나이에 기관에 다니면서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어린이집을 옮길 때마다 아이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마음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는 자주 열이 나고 구토를 하거나 콧물·기침을 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에 아픈 아이를 데리고 외출할 수 없어 몇 번이고 사립병원 구급차나 왕진의를 부르기도 했었다.


구급차(скорая помощь)라고 하면 무슨 감기든 아이를 응급실도 아니고 구급차에 보내는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러시아의 사립병원 스꼬라야 뽀모쉬는 환자의 집에 내원해서 상태를 살피고 필요할 경우 혈액검사를 위해 피를 뽑거나 대응방법을 알려준다. 물론 진료비는 싸지 않다. 환율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 감기 때문에 병원을 찾았을 때 진료비의 열 배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분이라면 ‘갈매기’, ‘세 자매’ 등 희곡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의사였던) 러시아의 대문호 체호프의 단편작품들에서 종종 등장하는 엉터리 의사들의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추운 날씨에 큰 의료도구 가방을 들고 집집을 왕래하는 왕진의사들은 아픈 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빛과 소금 같은 존재였다.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올가 아줌마는 사립병원 왕진의사들이 받는 비용이 공립병원 진료비에 비하면 턱없이 비싸다며 혀를 차기도 했지만, 눈이 오는 날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데리고 신발에 덧신을 씌우고, 외투는 번호표를 받아 창구에 맡기고 병원 대기실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건 나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예전에 러시아에 근무하던 선배들의 경우 마음에 드는 의사가 있으면 주치의처럼 매월 보수를 주고 아이가 아플 때마다 조언을 얻거나 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요즘에도 가능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집에 어린이가 있다면 개별 병원 차원에서 연간 지정한 횟수의 진료 및 내원을 보장하는 류의 패키지 상품도 종종 판매되고 있으니 고려해볼 만하다.


내가 접한 러시아 소아과 의사(педиатр)들은 생약을 많이 썼다. 우리나라라면 아이가 아플 때 처방하는 약이 물약과 가루약 두 종류 정도인 것 같은데, 러시아는 아무리 단순해 보이는 감기 증상이라도 쓰는 약이 네다섯 개가 넘었다. 콧구멍에 뿌리는 바닷물 성분 스프레이, 소화제 캡슐, 기침을 멎게 하는 달콤한 시럽, 기운을 보하기 위한 영양제, 이제는 용도를 잊어버린 이런저런 약들... 아이가 아플 때마다 업무에 지장을 받으니 무조건 빨리 나으라고 주문을 외며 약국을 뛰어다녔다. 같은 이름의 약이라도 성인용과 어린이용이 따로 있거나, 용량이 틀리거나, 가루약과 알약이 따로 있다거나 하는 등 주의할 점이 많은데 나보다 러시아어도 서툴고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아이 일에는 그렇게 꼼꼼하지 못한 남편이 약을 잘못 사와 안 그래도 아픈 아이 때문에 바짝 신경이 곤두선 내 화풀이 대상이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한 번은 아이가 아파서 같은 거의 한두 달 간격으로 세 번 이상 같은 병원을 찾았다. 이쯤 되니 지사제, 해열제를 비롯한 어지간한 비상약은 다 집에 갖춰져 있었다. 러시아 어린이집은 감기 등 전염성 질환 증세로 3일 이상 결석을 하면 소아과 의사의 완치 증명(справка для детского сада, 026 양식)이 없으면 등원을 할 수 없다. 몇 번의 내원으로 나와 얼굴이 익숙해진 중년의 여의사가 정말 진지하게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머니도 알다시피 애가 계속 아프네요. 이렇게 자주 아픈 아이라면 면역력을 길러야 해요. 공기가 좋은 바닷가로 한두 달 요양을 가거나 기관에 보내지 않고 할머니나 누가 돌봐주면 안 되나요?

맞벌이하는 입장에 우리도 아침저녁으로 아이를 맡기고 찾는 수고를 덜게 아이를 집에서 키우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근무하는 동안 바쁜 일들이 연달아 있거나 출장을 가는 등 정말 위기상황일 때는 한국에 계시던 친정어머니가 두어 번 와서 도와주시기도 했지만, 장기체류비자가 없으니 90일 이상 오래 계실 수는 없었다. 또한 그나마 가까운 핀란드에 계신 시어머니도 가뜩이나 아이가 셋인 시누이네를 도와주느라 바쁘신 데다 본인도 직장에 다니시니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내 경우엔 형제도 없는 외동아이를 입주나 출퇴근 보모와 하루 종일 단 둘이 둔다는 게 그리 내키지 않았다. 또한 남편이나 나나 성장기에 집에 상주하는 도우미나 보모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우리가 없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우리 집에 머문다는 사실에도 크게 이질감을 느꼈다. 기관 생활을 하면서 뭔가 배워 오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또래 친구라도 있으니 러시아에 같이 놀 친척이나 친구도 없고 외동인 아이가 덜 적적해하리라는 것이 내 기대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이는 주로 내가 회사일 때문에 사나흘 간 바쁘고 나면 몸이 아팠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분이 고향을 떠나 가족들과 먼 곳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다면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비타민 매일 챙겨 드시고 옷을 따뜻하게 입으세요.


러시아 육아 팁 : 미취학 아동이 둘 이상이라면 보모를 쓰는 방법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관에 데려다주고 찾으러 가는 수고도 덜 수 있고, 또래 아이들과 접촉이 적어 전염병도 덜 앓게 되니까 말이다.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2016년 모스크바에서 정신병력이 있는 CIS 국가에서 온 보모가 돌보던 장애아를 살해한 일이 러시아 현지 뉴스에 크게 보도되기도 한 만큼, 믿을 만한 보모를 구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기존에 보모를 쓴 가정에서 소개를 받는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또한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갑자기 보모가 아프다거나 그만둔다고 할 때 대안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지방 출신의 비애와 글로벌 노마드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