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근무는 해외 여행이 아니다
나는 서른이 되기 직전 12월에 지원한 여러 공기업들 중 한 곳에 서류전형, 필기와 면접을 거쳐 합격했다. 같이 합격한 동기들을 보니 필기 경제논술 답안을 적어도 세 장 이상씩 쓰고 그래프를 그린 경우도 있었는데, 나는 글씨체로 내용을 깎아먹는 악필인데다 분량도 짧았지만 세계은행 JPO 시험을 준비하면서 공부했던 내용과 그해 베스트셀러였던 경제도서 내용을 언급한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인터넷으로 입사 원서를 낼 땐 증명사진도 승무원이나 아나운서 프로필 사진을 찍는다는 좀 비싼 사진관에서 돈을 좀 들여서 새로 찍었는데, 학부 때 학교 사진관에서 정장인지 캐주얼인지 아리까리한 옷을 입고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으로 서류전형에서 계속 물을 먹었던 아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여러 군데 붙어서 골라 갔다는, 뭘 좀 아는 대학 동기의 증명사진을 봤더니 배경의 그라디에이션부터가 달라서 충격을 받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평소의 나답지 않게 입에 경련이 일도록 양 옆으로 활짝 벌려 미소를 지으며 찍은 증명사진은 입사 후 사람들이 못 알아보았다는 부작용은 있었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에서 마인드 콘트롤에 도움이 된 것 같다.
회사에 들어가니 여러 군데 붙었지만 여기를 선택했다거나, 다른 회사를 다니다 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개중엔 당시 공기업들이 지방으로 많이 이전할 때라 타 공기업을 다니다 온 경우도 있었는데, 지방으로 이사하기 싫어서 해외를 왔다갔다 해야 하는 회사를 선택했다는 것이 얼핏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동기들이나 선후배 중에는 부모님의 직장 때문에 해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경우도 있었고, 아예 해외에 한 번도 나가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하나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 다양성이 하나의 결을 이루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보수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지방 출신이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듯이, 옛부터 지방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이름 있는 학교와 남들이 알아주는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향해 왔다. 하지만 지방 출신이 서울에서 산다는 건 방학이나 명절 때마다 본가를 오가기 위해 몇 시간씩 기차를 타야 한다는 말이었고, 기숙사에 살지 못한다면 하숙이나 자취를 해야 했으므로, 그로 인해 빈궁해진 시간과 홀쭉한 지갑으로 인해 연애고 아르바이트고 동아리 활동이고 여러 가지 지장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개인적인 실패가 전적으로 지방 출신이기 때문은 아니다.) 지방의 각 도시로 KTX가 다니는 지금, 고향으로 향하는 이동시간은 짧아졌을지 몰라도 이동에 소요되는 비용은 훨씬 더 증가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김승옥의 소설 중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라는 작품이 있다. 바닷가 출신의 누이가 도시에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은 후 고향으로 돌아오고, 그 어머니가 딸을 위로하기 위해 밀국수를 끓이고, 그 앞에서 누이는 왜 저를 태어나게 했어요, 하고 운다. 사실 학교에서 배울 땐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고향을 떠나 몇 년간 서울에서 공부하고 일할 때 종종 생갔났던 구절이다. 지방에서 돈을 벌어 자식들을 서울로 보내고, 자식들에게 용돈을 보내주고 먹을 것을 부치며 그들이 상처입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위로해주는, 늙어가는 부모님처럼 점점 가난해지는 나의 고향. 그리고 일상을 공유하지 않게 된 가족. 러시아에 혼자 살 땐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이하 쓸쓸한 구절들을 되새김질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궁상맞았다.
대학교 기숙사 배정에 떨어졌을 때, 내게도 서울에 몸을 누일 방 한 칸이 있긴 했다. 창문을 열면 반대쪽 건물 창문이 보이는, 좁은 공간 때문에 계단을 올라가 잠을 자야 했던 곳. 더 열악한 환경에 있는 학생들도 많겠지만 그건 '잠만 자는 곳'이지, 어떤 의미에서도 '집'이란 느낌이 드는 곳은 아니었다. 1학년 교양 글짓기 시간에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자택 차고 지붕에 누워 눈을 감고 주변의 소리를 들으며 묘사한 내용이었다. 글 내용보다도 서울이라는 비싼 도시에 차고까지 딸린 집에서 사는 그와 방 한칸에서 사는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많이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기억이 난다. 러시아에 주재원으로 나가기 전에는 월세를 아끼기 위해 돌쟁이 아이를 데리고 부엌이 곧 마루인데다 화장실에 곰팡이가 핀 좁은 빌라에서 반전세를 살았다.
나는 지방에서 서울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모스크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핀란드로 점점 내가 태어난 곳에서 멀어지며 살아 왔다. 어쩌면 서울에서도 가진 것이 적었으니 그렇게 여러 번 훌훌 떠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활동무대는 해외라도 지금까지는 한국에 본사를 둔 회사들의 소속으로 일을 해왔으니 글로벌 노마드라고 말하기도 뭣하지만. 요즘은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 때문에 해외와 아주 관련 없는 부서로 입사하더라도 주재원으로 나가게 되는 경우도 종종 본다. 지역에 따라 편차는 있겠지만 해외생활의 비애는 가족이나 친지들을 자주 볼 수 없는 점, 한국 음식을 먹기 어려운 점, (체류지역의 의료수준 및 언어 장벽 때문에) 아파도 제대로 된 병원 진료를 받기 힘든 점, 아이에게 한국어와 문화를 가르치기 어려운 점 등이 있을 것이다. 또한 해외생활 자체는 취향에 맞더라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또다른 나라로 짐을 싸서 옮겨야 한다는 점이 힘들 수도 있다. 그건 한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이야기이고, 벽에 마음껏 못을 박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고, 아이의 방에 페인트칠을 하거나 마음에 드는 가구나 그릇을 사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을 터놓을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는 이야기니까. 내가 러시아를 떠나올 때 친구 빅토리아의 엷은 미소와, 아이의 보모였던 올가 아줌마의 탄식과, 아이의 어린이집 단짝이었던 미로슬라바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면서 느낀 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여우의 이야기처럼 길들인 상대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나 때문에 가족들이 이런 감정을 평생 겪어야 한다는 건 어쩌면 형벌일 지도 모른다. 짧은 교감의 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떠나야 하고 또 다시 짐을 싸야 한다는 것, 끊임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건 젊거나 미혼인 사람들에겐 흥미로운 경험이겠지만 책임져야 할 배우자나 자녀들이 생기면 쉽지 않은 결정이다. 요즘엔 맞벌이도 많고 국내에서도 장거리 부부를 하는 경우도 종종 보지만, 함께 하든 떨어져 있든 누군가의 희생으로 귀결되는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해외 근무는 소중한 경험이지만 겉보기에 멋져 보인다고 선택한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집 때문에 산전수전 겪은 이야기를 했는데, 다음에는 러시아에서의 육아와 병원 방문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다.
*표지 사진 : 한국에서 직장 다니느라 바쁜 부인 대신 장모님과 함께 육아에 전념하던 남편이 찍은 2013년 가을 서초동 그래피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