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에 앉은 의문의 남자
두 번째 집은 집주인을 아예 보지도 못하고 에이전트하고만 거래를 했다. 러시아 화가 쿠스토디예프의 그림 ‘차를 마시는 러시아 상인의 아내’(купчиха за чаем)의 주인공처럼 보기 좋게 통통하고 혈색이 좋은 에이전트가 "정말로 살 생각이 없다면 보지 않는 게 좋아요. "라고 경고를 하였다. 알고 보니 그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에이전트는 긴 계단을 허투루 오르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보여 주세요. "
에이전트와 함께 허덕거리며 다섯 층을 올라가 보게 된 집은 과연 10평 남짓한 작은 크기였지만 쾌적했다. 사무실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데다, 월세도 첫번째 집에 비해 미화 200달러 정도 쌌다.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점과 샤워부스가 부엌에 있을 정도로 좁은 집이란 설명이 마음에 걸렸지만, 쥐가 출몰하는 집에 사는 처지에 가릴 것이 뭔가. 부엌에 불투명 처리한 샤워부스가 있다는 것도 어차피 혼자 사니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러시아 주택의 경우 화장실과 욕실이 분리된 경우가 많고, 예전에 여러 세대가 같이 살던 공동주택(коммунальная квартира)이던 것을 소유권을 나누면서 개조한 경우도 많아 오래된 소형아파트의 경우 '부엌에 샤워부스'란 좀 이상한 구조도 드물지 않다. 참고로 러시아의 집들은 거실(гостиная комната)도 방으로 카운트하는 경우가 많아서 필요로 하는 침실(спальня)의 수에 1을 더한 수만큼의 방을 구하는 것이 좋다. 아니면 아예 침실 몇 개라고 조건을 정하던가.
얼마 후 나는 소형 세탁기, 전자렌지, TV를 빼면 이렇다 할것도 없는 이사짐을 옮기고, 트럭이 대문 안으로 못 들어가고 엘리베이터도 없다고 투덜거리는 짐꾼들에게 사정해서 운반비를 깎아 이사를 했다. 이제 드디어 홈 스위트 홈이 만들어지는가 했는데, 두 번째 집에 살면서 나는 난생 처음 러시아 경찰에 112를 눌러 신고를 해보게 되었다. 게다가 이상한 우연이 겹쳐서 실제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는데, 무슨 영문인지 한번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다.
어느 날부터인가 늦은 저녁에 퇴근하거나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집 앞 계단에 낯선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는 한쪽 발에 붕대를 감고 목발을 옆에 두고 있어 흡사 노숙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집들이 대각선으로 배치된 계단식으로 된 아파트라 한 층에는 우리집 뿐인데, 그 남자는 가끔 우리집 윗쪽이나 아래쪽 계단에 앉아있곤 했다. 하필이면 복도에 달린 형광등도 며칠 째 나가 있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더해져 관리실에도 몇 번 전화를 했는데 램프 재고가 없어서 못 바꿔준다는 말을 들었다. 시청 주거환경개선과 핫라인으로 요청을 하니 며칠 만에 겨우 불이 들어왔지만, 혼자 사는 처지에 모르는 남자의 존재는 문 밖을 나설 때마다 두려움을 자아내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열 시쯤 되었을까.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데 좀처럼 울리지 않는 초인종이 울렸다. 밖을 내다보니 짧은 머리의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
나는 떨리는 심장을 감추며 문을 닫은 채로 남자에게 물었다.
"물이 샙니다."
그는 아랫집에서 왔다고 했다. 저 남자가 아랫집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 현지 포털 사이트에 자주 나오던 사건 사고 기사가 떠올랐다.
"내일 갈게요."
다행히 남자는 순순히 후퇴해 주었다.
도시 중심가의 재개발 제한으로 고층건물이 치솟은 외곽과는 달리 몇 십 년, 몇 백 년씩 고치면서 써 온 저층 건물들만 있는 바실리 섬은 다리 하나를 두고 본토의 옛 궁궐 터와 인접해 있어 고관(高官)은 아니더라도 귀족들이 살던 곳으로 이 건물도 안채에 종교적인 모자이크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했다. (참고로 요즘에는 바실리 섬에도 으리으리한 새 대리석 아파트들과 영어유치원 등이 생겼다.) 그렇게 오래 개조를 거듭하며 지속되어 온 건물은 문짝부터 가지각색이라 도살장 같은 느낌을 주는 붉은 페인트가 신나 한 겹을 쓴 채 부서지다 만 자물쇠를 달고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내가 살던 집처럼 얼핏 보면 진짜 나무문 같기도 한 합성수지로 만든 문을 단 집이 있고, 도둑은 얼씬도 말라는 듯 시커먼 쇠문을 단 집 등 제각각이었다. 또한 집 내부도 내가 살던 집처럼 좁은 집이 있는 반면에, 두세 개 집을 터서 하나의 집으로 만들어 방이 네다섯 개에 미처 없애지 못한 출입구도 두세 개쯤 되는 집도 있었다. 한번은 허술한 단체우편함의 틈새로 윗집 관리비 고지서가 우리집 우편함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그 금액이 평소 익숙한 금액의 두 배가 넘어 깜짝 놀랐다가 수취인 이름으로 집주인 이름이 아니라 낯선 이름이 적혀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적도 있는 것이다.
다음날 아랫집을 찾았을 때, 집에는 어린아이와 부인이 있었다. 아랫집은 우리집의 두 배쯤 되는 큰 집이었고, 집은 리노베이션 중인지 시멘트 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부인이 안내한 욕실 한쪽에서는 과연, 젖은 흔적이 있었다. 나는 다른 도시에 있는 집주인을 대신해 집세를 받는 등 집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있던 부동산 에이전트와 의논했다. 에이전트는 샤워 부스 틈새로 물이 새는 것 같다며 실리콘 처리를 해주었고, 다행히 그것으로 물 새는 문제는 일단락된 듯 했다. 그 뒤로 나는 귀 뒤에 블루투스 수신기를 꽂은 아래집 남자를 계단에서 만나면 '물은 안새죠?' 하고 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렇게 수상한 남자는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날을 보내게 된 듯 싶었다. 그런데...
*표지 사진 : 바실리 섬의 명물인 구 증권거래소 앞 등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