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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수 May 22. 2020

미워해도 괜찮아

나를 지키는 관계란

일 년 일 년 살수록 나이가 쌓일수록 미워했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늘어간다.  말하기만 좋아하고 듣기는 덜 하는 사람, 면전에서 무시하는 사람, 힘이나 재산을 기준으로 차별하는 사람,  강약약강인 사람 , 미워해야만 하는 사람은 세상에 차고 다. 분리수거를 엉망으로 하는 이웃은 어떻고, 담배 피며 길에다 잔뜩 침어놓는 동네 피시방 이용자는 또 어떠하며 사람을 따르는 새끼 길냥이에게 독극물을 먹이는 골목 끝 주민과 장삿속으로 슬쩍슬쩍 거짓말하 시장 아줌마까지, 미워하고 사는 게 안 미워하고 사는 것보다 자연스러울 지경이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으레 싫어하는 사람이 화제가 된다. 좋아하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밥 먹으면서 차마시면서 술 마시면서 내가 미워하는 그가 얼마나 미움 당해도 싼 지 구구절절 세밀하게 묘사한다. 왜 그렇게들 상사는 무례하고 후배는 어려운지. 일 못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수두룩 빽빽하며 세상은 지독히도 불공평하게 돌아가는지. 가끔은 버티는 것 말고 삶에서 어떻게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나 싶기도 하다.


마셔가며 먹어가며 언성을 높여가며 그 인간은 못돼 쳐 먹었다고 떠들어대면 스트레스가 꽤 풀리기도 했다. 정말 못 참을 땐 분노의 눈물을 흘가라앉기도 했다. 그러다 한해 한해 지나며 언제부터인가 미움(혹은 못마땅)의 대화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사람과 이야기할 때면 유독 이 얘기 언제 끝나지,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싶은 것이  마음이 불편해졌다. 왜 불편할까? 대체 왜? 왜 듣기 힘들까? 상대에게만 그런 불편함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털어놓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누웠을 때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었나? 한동안은 불쾌함의 원인을 몰랐다. 어느 날 내게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미운 사람이 생기고 나서, 미움의 폭주기관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나서 까닭을 알았다. 나와 그들의 불편한 이야기에 한 가지 공통점 있다.  


소통의 목적은 공감이다. 우리는 다행히 같은 차원의 우주에 산다는 걸 확인하고, 너와 내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에 위로받아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존재론적 분리불안에서 잠시나마 안정감을 찾 시간. 그게 대화의 본질-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미세한 표정의 변화와 목소리의 떨림을 읽어내는 관계에서 벌어지는 교감삶이 지탱되게 한다. 나와 세상을 잇는 끈이 .

공감을 목적으로 대화할 때, 대화의 주어나 혹은 내 마음다. 그 사람이 이랬어 저랬어 저러고 이랬어, 말이 길어져도 처음이나 마지막 문장은 결국 내 마음이 어려워, 이다. 그 사람 때문에 내 마음이 편치가 않아, 이다. 듣는 내가 그 사람을 같이 욕해주는 건 네 마음이 어려우니 내 마음도 슬프다, 이다. 네 마음이 곤란해서 내 마음도 아프다, 이다. 대화는 공감을 일으키고 공감은 일시적일지라도 갈등을 해소시킨다. 대화의 주어가 나와 내 마음일 때 목격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대화의 주어가 바뀔 때, 주제가 전도될 때는 다르다. 듣기가 어려워진다. 그 사람은 이상해, 그 사람은 못돼먹었어, 그 사람은 허영덩이리야,라고 말할 때, 들을 때 그 얘기엔 곧잘 공감이 되질 않는다. 미운 사람이 이야기의 주어가 될 때 말하는 이의 마음엔 미움을 넘어선 죄성 깃든 비뚤어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것은 반응이고 반응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 저람이 싫네, 좀 밉다, 아니 많이 미워. 여기까지는 괜찮다. 미움이 순수한 미움일 땐 거기까진 괜찮다. 미움이 진화해 부글부글 끓어올라 선을 넘을 때가 문제다. 미움을 위한 미움이 돼버렸을 때, 미움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이 되어버린다. 멸시와 증오, 시기와 질투, 비난과 무시 이 모든 것이 한데 엉킨 비뚤어짐이다. 미움을 넘 비뚤어짐으로 가면 그때부턴 상대의 의미 없는 몸짓도 도 모든 것이 견딜 수 없게 괴로워진다. 즐거운 점심시간에도 나근한 늦은 밤에도 머릿속엔 비뚤어짐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소용돌이 속에 갇히게 된다.


 어느 시점이었을까. 미움보다 불편함이 더 커 것이. 나이가 들고 종교가 생기면서 불편함은 더 커졌다. 스무 살도 아닌데 아직도 발끈하는 거니. 종교가 있다면서 왜 못 품고 분노하는 거니. 너는 대체 왜 그러니. 왜 넉넉해지질 못하니. 불편함이 장성해 죄책감이 되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나 자신이 상대보다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흉측한 내가 보였다. 미움에 빠진 내가 싫어서 더 괴로워졌다.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부정하고 악한 것이 되어 그 상황 상황을 묘사하게 되는 내가 꼴 보기 싫었다. 위험하다 종이 어디선가 울렸다. 너 지금 증오로 가는 증기열차에 미움이란 석탄을 들이붓 있나, 하고.


미움의 동굴에 들어가 있으면  마음엔 햇빛이 들지 않다. 참담한 분노만 불탄다.

그때가 너무 괴로웠기에 이제는 그런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다. 미워할 수는 있.

 그런데 미워하기만 하면 그건 나를 질식하게 한다. 미워하더라도 건강하게 미워해야 내 마음을 지킬 수 있다. 미운 것도 싫은데 내 마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다, 고 마음을 바꿨다.


미움이 생길 땐 쿨하게 미워하는 게 좋다. 나는 그 사람 미워하지 않아, 단지 불편할 뿐이야 같은 거짓말이 스스로를 더 힘들 게 한다. 거짓말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까. 남에게는 말하지 못해도 적어도 나 한 사람, 스스로에게만큼은 난 그 사람이 미워.라고 인정하는 것이 이상한 트집을 잡아가며 상대를 깍아내리는 것보다 건전하다. 미워하되 쿨 하게 미워하기. 내 마음을 잘 보살펴주기. 분노에 지지 않아야 나를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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