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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수 Jun 12. 2020

그 사람이 마음에 걸렸던 이유

마음이 들키면 하수다

모임에 나가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화합을 위해 보통은 그냥 넘기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 저 사람과는 도무지 안 되겠다, 라는 판단이 첫인상에서 느껴지는 경우다. 첫인상 대로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내내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요구를 맞춰줘야 하는 때, 그 모임에 나갈 수가 없다. 리더가 됐든 막내가 됐든 한 사람의 주장대로 굴러가는 모임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모임에서도 그런 사람이 나왔다. (내 기준으로) 그 사람은 막무가내였다. 모임의 장소, 시간, 방법 등등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싶어 했다. 성정이 좋은 사람들은 되도록 그 친구의 의견을 따라주고 싶어 했고, 나는 좋다 싫다 반응을 하지 않은 채 그럭저럭 자리를 견디다 불쾌하게 돌아왔다.


얼마 후 그 사람이 모임에 나오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속이 후련했다. 내가 나갈까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라 무난하게 해결되어 감사했다. 그런데 그 후부터 계속 기분이 찜찜하더니 마음이 불편해져 왔다. 영문을 몰랐다. 그 사람이 잘 못했고 나는 아닌데 왜 내 마음이 계속 불편한 거지? 친구들에게도 물었다. 종교모임에서 한 친구는 내 안의 교만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라는 답을 내놓았다. 그것도 맞다 싶었지만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며칠 전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강의를 하나 듣고 있다. 아마추어들에게 완전 프로가 오셔서 기초를 설명을 해주시는 수업이다. 기분이 들떠서 첫 강의를 들었고, 오 역시 프로시구나, 다르다, 라는 느낌을 받고 돌아왔다. 문제는 두 번째 수업. 학생들의 질문을 세 시간 동안 내내 받는 시간이었는데 일반인과 아마추어가 섞인 학생들의 질문은 어쩔 수 없이 수준이 낮았다.

어리석은, 기초도 모르는 질문일지라도 프로의 답은 질문의 수준에 맞춰지지 않는다. 프로일수록 우문현답, 프로다운 답을 내놓기 마련이다. 그런데 강의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의 짜증이 보였다. 내가 이렇게 같은 말을 하고 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또 못 알아듣습니까? 같은 느낌이었다. 강사의 말투는 친절했고 위트 있었다. 그러나 속마음이 훤히 드러났다. 표정과 어투, 답을 생각하는 포즈의 순간이나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보세요, 같은 말속에 그 사람의 기분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뭔가 내 마음의 해결점을 발견한 건 이 순간이었다. 누군가 강사에게 재차 질문을 했다. 강사는 또 비슷한 질문이군, 이라고 오해를 하고는 엉뚱한 답을 했다. 질문자가 오해하셨다고 알려드리자 강사는 답을 얼버무리고는 다음 사람의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는 첫 질문을 받았던 때처럼 굉장히 성실하게 친절하게 답을 하셨다. 내 찜찜함의 이유를 알게 된 것이 이때였다. 속마음을 들켜서 구나. 번쩍, 답이 나타났다.


그 강사가 별로였던 이유는 속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속마음이 드러났다는 걸 알자 만회하려 했던 그 태도가 속마음을 들켰다는 걸 더 확실히 증명해주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임에서 무례한 사람에게 계속 찜찜함을 느꼈던 이유는 내 속마음, '너 진짜 별로라는 거 알지?'라는 마음을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별로라는 게 들켜서, 내가 멋있지 않은 부분-남들에 비해 못나면 못났지 결코 멋지지 않은 후져빠진 면을 들키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모임에서 내 마음을 잘 숨겨야 했고, 차라리 내가 모임을 나왔어야 했다. 무표정에서 드러나는 무시하는 표정만큼 교만한 표정도 없는데 아마 내 표정이 그랬을 거다. 내 온몸의 제스처가 아오 너 별로다, 나와는 수준이 안 맞아,라고 외치고 있었을 거다. 나의 못난이를 홀딱 들키고 나니 나는 그 사람에게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됐던 거다.


어른스러움을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나이에 걸맞은 큰 어른이 별로 안 보인다. 걸출하신 분들은 이제 돌아가시는 중이시고, 새마을 운동을 이끈 어른분들은 젊은 이들과 대립 중이다. 88 올림픽의 세대도 중간 역할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 결국 어른은 꼰대로 비꼬아지고, 젊은이는 나약한 세대로 치부되고 있다. 서로를 향한 증오와 경멸을 솔직하게 드러낸 결과는 갈등뿐이다.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이에게는 이빨이 없다. 귀여운 새끼 고양이와 천진한 아기는 경멸과 증오,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를 해칠 힘이 없는 나보다 약한 자, 나보다 힘이 없는 자를 경계할 필요는 없다. 내가 한 수 위지, 라는 만족감으로 질투할 필요가 없다. 내가 너보다 낫잖아, 라는 생각은 그래서 소모적이다.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어 내게 돌아올 호의와 친절을 차단시킨다. 내가 잘난 게 그렇게 중요한가. 상대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게 그렇게 중한가. 그걸 표현하고 티 내는 게 그리 중한가. 그렇다면 나는 하수다. 헛똑똑이 멍청이. 그게 나다. 이걸 알고 맘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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