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
멍충아. 그건 병이었어!
2010년 3월이었다. 3부작 특집 다큐멘터리를 끝내고 한 달간 잠시 쉬었다. 긴 시간 준비한 3부작이 끝났으니 사치를 부릴 만도 했다. 게다가 지난 십 년 간 맹렬히 달려오지 않았던가. 한 달간 마음껏 쉬고 놀자. 그래 그러자. 단단히 그럴 작정이었다.
3월이니 봄은 아직이었고 겨울은 여전했다.
감사하게도 바닥이 절절 끓었다. 중앙난방식 아파트였지만 노인분들이 많이 사시는 덕이었다. 차가운 날씨, 따듯한 바닥, 그 정도면 충분했다. 3년 전 화제였던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을 보며 배달음식을 시키며. 대충 먹거나 꽤 잠을 잤다. 세상에. 게으르기가 이렇게 게으를 수 없었다. 인간이 이 정도까지 누워있을 수 있구나 싶을 만큼 누워있었다. 설거지를 하기도 귀찮았고, 샤워도 성가셨다. 당연히 며칠 만에 집은 난장판이 되었고 나는 쓰레기와 쓰레기 사이에 누워있었다. 그렇게 누워서 한 달을 보내고 다시 출근을 했다.
2010년은 가장 많은 프로그램을 만든 해였다. 프로그램명으로 만든 폴더만 열다섯 개가 있었다. 폴더 안엔 다시 부제목으로 된 폴더가 또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KBS 스페셜 폴더가 있고, 그 안에 개별 프로그램 폴더가 다시 있는.
다큐멘터리 한편을 만드는 데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일 년 이상이 걸린다. (물론 상황에 따라 하루 만에 만들 수도 있다. 전직 대통령이 서거하시는 그런 슬픈 일이 생길 때에는) 그런데 그해엔 대략 스물다섯 편에서 서른 편 사이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스물다섯 편 안에는 3부작 특집뿐 아니라 독립 다큐도 있었다. 노량진에 있는 방송사의 원고를 마치고, 여의도의 다른 방송사로 넘어가 곧바로 다음 원고를 쓰는 일정.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했을까? 미지수다.
해기 바뀌었다. 결혼날짜가 정해졌고 그전에 건강검진을 받고 싶었다. 결혼하면 일본에서 살아야 했기에 그.전에 체크할 계획이었다. 뭘 검사해야하나 짚어보다 찜찜한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2010년의 3월이었다. 나는 정말 게으른 걸까? 한 달을 누워서 지낼 만큼? 정말 그렇게까지 게으르다고, 내가? 찝찝하고 마뜩지 않았다.
생로병사의 비밀을 수년간 만들었으니 그 이력으로 짐작이 가는 질병을 꼽았다. 아무래 만성피로 증후군 같았다. 전문기관이 어디 있나 조사해보니 개인병원 몇 곳, 한의원, 그리고 강북삼성병원에 만성피로 클리닉이 있었다. 병원 홈피에서 딤당 교수의 프로필을 훑어본 후 최근에 쓴 논문이 있나 검색했다. 논문은 못 찾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당시는 만성피로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형성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 와중에 클리닉이 있다니 감사한 마음이었다.
검사항목은 여러 가지였다. 날 잡아 하룻 동안 받은 검사에선 스트레스가 높다고 했지만 그뿐, 혈압도 피검도 정상이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넌지시 물으셨다. "혹시 섬유근통증이라고 알아요?" 생로병사의 비밀에 방송할 아이템을 찾기 위해 질병 사전을 뒤진 적도 여러 번이지만 낯선 병명이었다. "처음 들어보는데요." 선생님은 낙관적이지도 않은, 그렇다고 비관적이지도 않은 어조도 말을 이었다. "약이 있긴 있는데 결혼을 곧 앞두고 있다고 했죠? 환경이 달라지면 좋아질 수도 있으니 일단은 결혼 생활을 잘해보시죠." 싱거운 처방이었다. 그치만 약을 안 쓰니 큰 병은 아닌가 보다 싶어 안심이 되었다.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오는데 가정의학과 대기실 책꽂이에 눈이 갔다. 우연히 눈이 갔다고 표현할 그 정도의 짧디 짧은 순간.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어떤 단어가 이목을 끌었다. 섬유근통증. 리플릿 한 장을 들고 병원을 나와 택시를 잡았다. 당시 잠잘 시간도 없이 일하던 때라 대중교통은 이용하질 못했었다.
택시에서 리플릿을 펼쳤다. 여자에게 많다. 30대 여자가 주로 발병한다. 2프로가 앓고 있다. (2프로면 꽤 많은데?) 만성적인 통증이 있다...... 별 느낌이 없었다. 피곤해서 간 거였지 아파서 간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문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섬유근통증은 아주 오래된 병입니다. 성경의 욥 또한 이 병을 알았습니다.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성경은 잘 몰랐지만 욥이 고난을 이겨 낸 멋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욥이 앓던 병을 앓는 건가? 멋진 걸! 하고는 리플릿을 핸드백에 넣었다. 택시의 차 창밖으로부터, 따듯한 기운이 돌기 시작한 바람이 들어왔다. 벚꽃이 곧 필까?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년 뒤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형편이 될 줄은 까맣게 몰랐던, 결혼 준비로 여전히 바쁘고 즐겁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