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쏟은 한 달,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
30년이 조금 넘는 인생을 사는 동안 나는 항상 스스로에게 ‘잘 살고 있다’ 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었다.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혀도 좌절하기 보단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난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긍정적인 자세로 삶을 이어나갔다. 할머니의 비극적 죽음 앞에서도, 부모님의 잦은 다툼과 별거 앞에서도, 수 없이 많은 시험에서 낙방했을 때도, 꿈에 그리던 직장의 최종 면접을 통과하지 못해 아쉬워 죽을 뻔했을 때조차 결국엔 툭툭 털고 오뚝이처럼 일어났던 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려울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와 관련해 겪게 되는 일들 앞에선 오뚝이가 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인생을 살면서 통과하는 수많은 과정 중 나는 지금 제일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이전의 것들과는 다르게 과감하게 혹은 단호하게 끝내고 잊을 수 있는 그런 류의 과정이 아니었다.
이 과정의 길이가 길고 긴 만큼 내 호흡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어느 해 가을이었다. 엄마가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한 명의 사회 구성원인 것 같았는데, 몇 년 동안 시도했던 모든 면접에서 고배를 마시게 되니 그 쓴 맛으로 인해 내 육아와 인생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하게 되면 육아만 하는 것 보다 육체적으로는 더 힘들 것이 분명했지만, 내가 갖고 있는 능력을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심적으로는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재취업을 위해 매진했던 것인데, 현실은 내게 이유도 알려 주지 않은 채 아주 냉정하게 날 거절했고 그로 인해 나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좌절감에 휩쌓이게 되었다. 취업과 관련된 예를 들었지만 사실 결혼 생활과 육아의 모든 과정은 하나부터 열까지 쉽게 그냥 넘어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퇴직을 하고,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이 모든 것은 이전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들이라 애초에 잘 할 수가 없었던 것인데, 나 조차 스스로에게 ‘하다 보면 잘 하게 될 것’이라는 부담을 주었던 것이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이 모든 것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도록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에 따른 책임을 한꺼번에 느끼게 되어 결국 과부하가 걸린 시점이 왔다가 생각한다. 하다 보면 잘 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시작한 것들이었지만, 어느 날 문득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젠 더 이상 잘하고 싶지도 않다는 마음이 생겨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남들도 다 하는 건데 왜 너만 그렇게 유별나게 힘들어 하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나만큼 티를 내는 사람이 드물 뿐, 결혼, 출산, 육아의 과정을 거치며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은 왜 모두가 힘들고 낯설어하는 이 과정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힘든 티를 내지 않으며 헤쳐 나가야 한다고 혹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힘들어서 힘들다고 하는 것이고 변화를 주거나 새로운 방법을 찾다보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해보지 않았던 것을 시도해보자고 하는 것뿐인데, 왜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을 ‘참을성 없는 사람’ 혹은 ‘유별난 사람’ 등으로 구분해버리고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내려는 의지를 저지하려고 하는 것일까? 참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 한국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참고 견디려고만 할게 아니라, 건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그 해결 방법을 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우면 옷을 벗고, 추우면 옷을 입는 것처럼 불만이 생기면 그것을 토로하고, 그 상황을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땀이 나고 있는데 겉옷을 벗지 않는 사람의 행동을 인내심 이란 이름으로 칭찬하지 않는 것처럼, 무조건 참는 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란 것이다. 더워도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고, 더워서 옷을 벗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 둘 중 어느 것도 잘못했다거나 잘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신경 쓰고 있던 상황 혹은 나를 신경 쓰이게 했던 상황들로부터 벗어나 나름의 방식으로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질문들에 답을 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내 자신을 나아가게 하기로 결정했다. 다시 잘 살고 싶어지는 내 자신으로 말이다. 과부하가 걸린 내 머릿속을 포맷한 후 현실로 돌아와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모두를 대하고 싶었다.
It is a very long race after all.
이봉주 선수와 우사인 볼트가 경기에서 보여주는 호흡법이 다른 것처럼 이렇게 긴 과정을 통과할 땐 내 호흡법에도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난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달려나가다간 이내 곧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 같았다.
그래서 난 2017년, 내 딸이 5살이 되던 해에 가던 길에서 잠시 멈추어 생각이란 것을 할 시간을 충분히 가져보기로 했다. 내 페이스에 맞춰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달려나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