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쏟은 한 달,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
떠나기 직전까지 며칠을 엄청난 위통에 시달렸었다. 내가 소화기관에 문제가 좀 있어서 소화가 안 된 적은 빈번했지만 위가 그렇게 아팠던 적은 처음이었다. 잘못 먹은 것은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매운 걸 먹은 것도 아니었는데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청양 고추 주스라는 게 있다면 그것을 세 컵 정도 연거푸 마신 느낌이었다.
계속 아파하니 엄마는 아무래도 신경 써서 그런 것 같다며 마음 좀 편하게 먹으라고 하셨다. 내가 없어도 순수는 잘 있을 것이라고. 순수 걱정 때문에 그런 거라면 엄마가 알아서 잘 할 테니 그 걱정은 그만 해도 된다고 하셨다. 계획이 현실이 된 후부터 딸 아이 걱정에 새벽에도 몇 번씩 잠에서 깨곤 했으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원래도 신경 많이 쓰고 사는 편인데 이런 적이 없었다고 그런 건 아닐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해서 짐을 푸는 사이 어느 순간부터 익숙해진 그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나만의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며 잠시 다녀오겠다고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게 말할 땐 언제고 막상 날짜가 다가오자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내 속이 내 속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경 써서 그런 거라는 엄마의 말씀과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며 비행기 타는 순간 씻은 듯 나을 거라고 여기 걱정은 그만하라고 말씀해주신 딸의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
부담을 이기지 못해 속이 타 들어가는 고통까지 느끼면서 난 왜 이곳에 오는 것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나.
그건, 지금 포기하면 그게 언제가 되었든 다시 시도할 수 없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지금 포기한 그 선택을 그 때가서 후회할 것이 너무 두려웠다. 발등에 난 불 끄자고 온 몸을 적실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떠나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부탁을 해야 하는 부담감을 이를 악 물고 이겨내기로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홀연히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떠난 줄 알겠지만 실상은 아주 처절했다. 가면 안 될 것 같지만 안 가도 안될 것 같았던 내 마음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통증이 사라진 것은 나도 잘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나는 여전히 춘천에서 엄마 없이 일상을 보내고 있을 내 딸이 걱정되고 너무도 많이 신경이 쓰이며, 아주 오랜 만에 휴식을 갖는 엄마에게 손녀 좀 돌봐달라고 부탁한 내 자신이 죄스럽고, 일정을 좀 줄이면 안되겠냐고 물어 본 남편의 말에 칼로 무 자르듯 싫다고 말했던 상황이 미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도착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다. 내가 짠 계획을 어떻게 해서든 진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위로하는 듯한 느낌이다. 한 동안 성취감이란 것과 너무 먼 삶을 살고 있었고 그 부분에 대한 아쉬움과 불만이 많았는데, 그것이 무엇이든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도록 노력을 퍼붓고 있는 이 상황만으로도 나는 기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