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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섭 Feb 10. 2019

이성 혹은 의지로서의 세상

자연세계와 인간 세계

거실 난초꽃이 피었다. 내가 촌뜨기라 개나리나 벚꽃같이 흐드러진 꽃에 들뜨지만, 선비와는 거리가 있어 고고한 난무덤덤하다. 선물로 받은 놈인데 구석에 처박혀 겨우 물만 얻어먹다가 봄이라고 향기를 날리고 있다. 식물은 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봄이면 꽃을 피운다. 이를 자연의 섭리라고 하며 자연법칙은 결코 변함이 없다.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의 본질을 아직 모르는데 그런 확신을 할 수 있을까? 우주를 거창하게 들먹이지 않더라도 태풍 진로나 지진을 정확히 예측 못하지 않는가? 원자력 발전소의 사용 후 연료를 완전히 처리하지 못하지 않는가? 합리적으로 보이는 반론이다.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 모르는 현상들이 있지만 저는 숨겨진 자연의 섭리를 확신하는 과학기술자이다.


영국 철학자 흄은 경험에서 모든 지식을 얻는다는 경험론자로 분류되지만 세상을 알 수 없다는 회의론자이다. 칸트는 흄의 회의론에 충격을 받아 관념론을 정초 하였다. 철학하는 방식을 전환한 칸트는 관념론에서 뇌의 정보처리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 그도 자연의 섭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고 발을 뺀다. 칸트는 자연과학을 배웠지만 그의 자연과학 논문은 과학이 아니라 소설이니 그를 비난할 맘은 없다.


흄이 주장한 지식의 회의로부터 칸트가 독단에서 깨어났다면, 철학자들이 꺼리는 자연의 무관심에서부터 저는 독단에서 깨어나고 있다. 그래서 자연세계와 인간 세계를 통합시키는 노력을 하고 싶다. 더 나아가 인간 세계의 성장과 분배를 조화시키는 이론을 정초 하고 싶다.


왜 철학자들은 자연세계의 섭리를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을까? 투명한 유리창에 부딪친 적이 있는가? 사막 너머 신기루를 쫓아간 적이 있는가? 가을에 핀 개나리에 놀란 적이 있는가? 그럴수록 우리는 더 엄밀해야 져야 한다. 감각을 착각하게 하는 자연현상이 많지만 자세히 들어다 보면 자연의 섭리로 완전히 설명된다. 따라서 자연의 섭리를 의심하는 태도는 체계적 지식체계 구축에 커다란 장애물이다.            


명절에는 어머님이 계신 거제 고향을 갔다 처가가 있는 진천으로 간다. 중부 고속도로가 귀경차량으로 정체될 때 오창을 가로지르는 국도를 간혹 탄다. 이번에도 막힌다는 소식에 국도를 선택했는데 오창 시내를 통과하느라 고생을 했다. 일반적으로 정체 소식에 운전자들은 덜 막히는 도로로 동시에 몰리게 되므로 국도가 더 막힐 수가 있다. 고추 파동이 마늘 파동이 일어나는 이유도 동일하다. 정보의 실시간이 떨어지고 한번 결정하면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도로 체증이나 마늘 파동에는 자연의 섭리가 작용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의지의 부작용이다. 자연에는 결코 변하지 않는 섭리가 있지만 인간세상에서는 늘 변하는 의지가 있다. 법칙으로 예측이 가능하지만 의지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의로의 세상'을 말할 때 자연세계와 인간 세계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의지가 작용하는 세상은 인간세상이지 자연 세상은 아니다.   



아미는 유기견이다. 몇 번 밥을 주었더니 우리 집에 자리를 잡았다. 6년간 함께 살았다. 손님이 방문할 때 짖기에 목덜미를 잡고 자제를 시키려다 손을 가볍게 물린 적이 있다. 온 지 2년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 물지 않을 거라 신뢰를 했는데 그 기대가 무너졌다. 지금은 더욱 나를 따르므로 신뢰하지만 물고 있는 뼈다귀를 빼앗는다며 돌변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개를 인간 세계에 속한다고 본다. 아마 모든 생물이 그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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