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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철 May 27. 2019

책 읽고 춤추는 고양이의 가을 하루,
소세키산방 기념관

도쿄, 2018년 11월

열세번째 이야기

도쿄도 신주쿠구 와세다





나는 소세키로소이다


 연휴 이틀째의 토요일 아침. 와세다 역을 나서자 긴자나 마루노우치의 거드름쟁이들에 비하면 한없이 겸손한 집들이 야트막한 언덕길 좌우로 올망졸망 늘어서 있었다. 여행자가 지난 며칠간 둘러본 도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거리였다. 그 언덕길의 초입에 한 체인음식점이 분주히 그날의 영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게 앞에 세상 모든 음식의 사진을 갖다 붙여놓은 것 같은 식당 자체는 일본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여행자는 이곳을 목표로 와세다에 왔다. 메이지 시대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가 바로 이 자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가게 앞에는 ‘나쓰메 소세키 탄생의 땅(夏目漱石誕生之地)’이라 새긴 기념비가 서있었다. 그 옆의 새끼 비석에는 소세키가 옛집의 정취를 노래한 하이쿠가 새겨져 있었다.


그림자 제각각
소나무 세 그루의 달밤이로다 
(影参差 松三本の月夜かな) 


 달밤의 풍류를 노래한 시이지만 소세키가 이 터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시를 읽고 있으니 밤의 소나무 그림자가 쓸쓸하게 흔들리는 광경이 눈에 어리는 듯 하였다.



버려진 새끼고양이


 나쓰메 소세키가 소설가로서 내놓은 첫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는 다음과 같은 고양이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나는 고양이다. 아직 이름은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아무튼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데서 야옹야옹 울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족속을 봤다. 나중에 들은즉 그건 서생이라는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영악한 족속이라 한다. (중략)

 이 서생의 손바닥에 얼마 동안은 기분 좋게 앉아 있었는데. 잠시 후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생이 움직이는 건지, 나만 움직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눈이 팽팽 돌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도저히 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털썩 소리가 나면서 눈에서 번쩍 불꽃이 일었다. 거기까지는 기억나는데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보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많던 형제자매가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소중한 어머니마저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중략) 나는 지푸라기 위에서 갑자기 조릿대 밭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중략) 잠시 후, 울어대면 그 서생이 데리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옹야옹 하고 시험 삼아 울어보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역,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현암사, 2013, 16-17p.


 고양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형제와 강제로 헤어지고 만다. 뿐만 아니라 인간세계로부터도 거듭 거부당하는 경험을 겪는다. 그러한 거부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고양이는 인간세계 바깥의 이름 없는 존재로 남는다. 고양이는 인간세계와의 거리 덕분에 인간세계의 모순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그렇다고 해서 거부당한 자의 마음에 남은 상처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소설 속 고양이의 회상은 소세키가 이 집에서 겪은 유년기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나쓰메 가문은 카구라자카(神楽坂)에서 타카다바바(高田馬場)에 이르는 이 일대 11개 마치(町)를 관할하는 나누시(名主) 직을 대대로 세습해왔다. 나누시란 막부나 영주로부터 특정 지역의 행정 ‧ 경찰 ‧ 사법 업무를 위임 ‧ 하청 받아 수행하는 직책으로서, 대체로 그 지역의 유지가 맡았다. 담당업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권력과 함께 급여 외의 부수적인 수입도 얻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소세키의 아버지 나쓰메 고헤이(夏目小兵衛) 또한 그 아버지로부터 나누시 직을 물려받았다. 1967년 2월 9일, 소세키는 나쓰메가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金之助)였다.


 그러나 긴노스케(소세키)가 태어난 때는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한 대혼란기였다. 1868년에 왕정복고가 선포되고 1869년 이르기까지 신정부군과 막부군 간의 내전이 지속되었다.(보신전쟁戊辰戦争) 막부가 붕괴하고 신정부가 대권을 잡은 이후에도 신정부가 체계를 잡을 때까지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막부의 녹을 먹던 나쓰메 가문은 가세가 기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긴노스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고품점에 양자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의 누나가 그를 데려옴으로써 그의 입양생활은 며칠만에 끝이 났다. 낡은 가재도구를 늘어놓은 가판 옆에 밤이 늦도록 나와 있는 아기가 너무 불쌍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쓰메 고헤이는 쉰이 넘었고, 아내 치에도 마흔을 넘긴 나이였다. 그들에게는 그 많은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1868년, 긴노스케는 다시 시오바라 쇼노스케(塩原昌之助) 부부의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시오바라는 지금의 신주쿠 2초메(新宿二丁目)에서 나누시를 맡은 젊은이로, 어려서부터 나쓰메가의 일을 도우며 동시에 나쓰메가의 후원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시오바라 내외를 이어준 것도 나쓰메 고헤이였다. 시오바라 부부에게 있어 긴노스케의 입양은 나쓰메가에 은혜를 갚는 일이었으며, 또한 대를 이을 아들을 들여 자신들의 노후를 대비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긴노스케는 시오바라가에서 시오바라 긴노스케라는 이름으로 유년을 보내게 되었다. 시오바라 부부는 긴노스케를 제멋대로 하도록 오냐오냐 키웠는데, 이는 나중에 장성한 그로부터 봉양을 받기 위해 계산된 행동이었다. 후에 소세키가 쓴 글들을 보면 어린 긴노스케도 양부모의 행동에 애정이 담겨있지 않았음을 알아채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시오바라 긴노스케로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면 좋았겠지만 그가 일곱 살 때 사건이 터지고 만다. 쇼노스케의 불륜행각이 들통 나고 만 것이었다. 부부싸움이 이어졌고, 긴노스케는 잠시 나쓰메가에 맡겨졌다. 그는 양부모에게 들은 대로 친부모를 할아버지, 할머니라 믿고 지냈다.


 긴노스케는 얼마 안 있어 다시 시오바라가로 돌아갔지만, 시오바라 부부는 그가 아홉 살 때 이혼하고 말았다. 시오바라는 불륜사건 때문에 호장(戶長. 7~8개의 마치를 엮은 소구小区의 행정책임자.) 자리를 잃게 되었다. 결국 긴노스케는 파양되어 나쓰메가로 돌아왔다. 조부모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실은 친부모였다는 것도 이 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어린 긴노스케에게 충분히 충격적인 일대 사건이었지만,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불륜을 저질러서 자신이 맺어준 인연과 이혼한 것도 모자라, 일자리를 주선해달라고 찾아온 시오바라의 뻔뻔함에 고헤이는 대노하였다. 친부와 양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 속에서도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긴노스케의 호적 문제였다.




나쓰메 소세키 탄생의 땅 기념비로부터 바라본 나쓰메자카와 나쓰메자카의 내력을 설명한 안내판



 긴노스케가 파양되어 돌아왔을 때, 나쓰메가는 유신 이전의 권세를 회복한 상태였다. 나누시가 폐지된 이후에 고헤이는 제4대구(大区)의 구장(区長)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도쿄가 6개의 대구로 편성되어 있었으니 구장이란 오늘날의 구청장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직책이었던 셈이다. 그의 권세는 그의 자택에서 카구라자카의 구청에 이르는 자신의 출근길을 나쓰메자카(夏目坂)라고 이름 붙이고, 그가 사는 동네의 행정구역명을 우물(이, 井)에 국화(키쿠, 菊)가 그려진 나쓰메 가문의 문장에서 따와서 키쿠이쵸(喜久井町)라 명명할 정도였다.



나쓰메 가문의 문장



 그럼에도 친부는 긴노스케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대를 이어 고헤이의 노후를 책임져줄 아들들이 있는 마당에 어린 긴노스케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시오바라가 이혼하여 긴노스케를 키울 수 없게 되었으니 그를 먹이고 재우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나쓰메가가 맡게 되었지만, 호적은 계속 시오바라가에 남겨두어 시오바라로 하여금 양육비를 부담하게 하였다. 시오바라 또한 이혼까지 한 처지였으니 자신의 노후를 책임져줄 긴노스케를 호적에 붙들어두려고 하였다. 따라서 긴노스케의 학비며 용돈은 모두 시오바라가 부담하였다.


 양가의 의견일치로 긴노스케는 나쓰메가에 살면서도 시오바라 긴노스케로 남게 되었다. 친부는 긴노스케를 조금도 아들로 대해주지 않았으니, 그는 친부모와 살면서도 남의 집에 얹혀사는 꼴과 같았다.


 긴노스케가 나쓰메 긴노스케로 돌아온 것은 스물한 살 때의 일이었다. 그것도 나쓰메가의 대를 이을 장남과 차남이 연달아 결핵으로 죽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변변찮은 삼남보다 학문에 재능을 보이던 긴노스케가 탐나게 된 고헤이는 시오바라와의 교섭 끝에 과거의 양육비 조로 240엔을 지불하고 긴노스케의 호적을 돌려받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온 것이다! 하지만 긴노스케가 소세키라는 필명으로 유명해지자 시오바라는 계속해서 그에게 돈을 요구했다. 그 후로도 아들―돈을 둘러싼 친부와 양부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나쓰메자카에서 내려다 본 풍경



 소세키는 인격형성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두 가문 사이에서 받은 고통으로 평생 정신질환에 시달려야했다. 한편으로는 무너져가는 자아를 붙들고 광기를 극복하기 위해 썼던 글들이 그를 문호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친부와 양부 사이에서 거래와 흥정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은 그를 누구보다도 예민한 근대사회의 비판자로 만들었다. 돈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을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시대, 한 마리의 이름 없는 고양이만이 그 어둠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쓰메자카에서 만난 귀여운 간판의 카페. 아쉽게도 영업 준비중이었다.



고양이의 초대


 소세키가 나고 자란 와세다역의 옛집으로부터 나쓰메자카를 거쳐 카구라자카에 이르는 길은 그가 한평생 거닐던 산책로였다. 이 골목에서 소세키는 홀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으리라. 자신의 울증과 싸우기도 하고, 시대의 모순에 대해 고뇌하기도 했으리라. 또 저 골목에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산시로三四郎』의 인물들처럼 지인, 제자들과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기도 했으리라.





 고요한 골목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콧수염 아저씨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자니, 한 마리 고양이가 마중을 나왔다. 소설 속에서 걸어 나오기라도 한 것일까. 이름 없는 고양이의 꼬리를 따라가자 소세키산방 기념관(漱石山房記念館)이 나왔다.


 소세키산방은 그가 『산시로』, 『마음(こゝろ)』 등의 작품을 집필했던 곳으로, 그는 1907년부터 1916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소세키산방은 1945년의 도쿄대공습으로 완전히 불타고 말았다. 다행히 공습 전에 소세키의 아들이 그의 장서와 사진을 비롯한 유품을 소개(疏開)해둔 덕분에 소세키산방은 2017년, 그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에 소세키산방 기념관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여행자의 벗, 노인들


 그런데 누군가 기념관으로 들어서려는 여행자를 불렀다. 돌아보니 바나나나무처럼 잎이 넓은 나무 옆에서 한 할아버지가 손짓하고 있었다.



소세키산방 기념관 앞의 파초와 속새



 “파초꽃이에요. 보기 드문 귀한 꽃이니 가까이 와서 구경 좀 해봐요.”


 바나나나무가 아니라 파초였구나. 과연 할아버지 곁에 서니 주먹만 한 꽃이 보였다. 저 꽃에서 바나나를 닮은 열매가 나는 모양이었다. 말로만 듣던 파초를 처음 보게 된 것인데, 꽃까지 보게 되다니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꽃이 생기는구나. 산천초목에 통 무지한 여행자에게는 좋은 가르침이었다.





 할아버지는 이어서 이 파초(芭蕉)에서 따와서 호를 지은 시인 마츠오 바쇼(松尾芭蕉)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행자가 멋들어지게 바쇼의 하이쿠를 읊으며 화답할 순간이었지만, 감동하며 읽었으되 시를 외울만한 머리가 되지 않는 것을 어찌하리오. 그 사이 할아버지는 또 한 쌍의 커플을 불러 세워 파초의 꽃을 구경시켜주었다. 파초 전도사 할아버지였다.


 어느 나라를 가나 어르신들은 젊은이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어 한다. 객지에서는 무지한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는 여행자들에게,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옛말은 항상 참이다. 길을 묻더라도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라. 뜻밖의 배움을 얻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소세키산방의 옛 주춧돌과 고양이묘(猫の墓). 1908년 9월 13일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모델이었던 고양이 후쿠네코(福猫)가 죽자, 소세키는 후쿠네코를 산방 뒤뜰 벚나무 밑에 묻어주었다. 이후 그가 키우던 문조와 애견 헥토르도 이곳에 묻혔다.(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에서 따온 이름이다.)  1920년 후쿠네코의 13주기를 맞아 장녀부부가 9층 석탑을 지어 나츠메가의 동물들을 공양하였으니 그 탑을 ‘고양이묘’라 불렀다. 1945년의 탑은 도쿄대공습으로 산방과 함께 파괴되었으나 1953년 12월 9일 소세키의 기일을 맞아, 탑의 잔해로 다시 묘를 세웠다.



옛 소세키산방의 조감도. 현관 좌측은 가족생활공간이며, 우측은 응접실을 거쳐 서재로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가 교사시절 가르쳤던 제자들, 친구들, 문사들과 젊은 작가지망생 등 수많은 이들이 소세키산방을 드나들었다. 찾아오는 이들이 너무 많아 작품활동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으니, 소세키는 매주 목요일 오후 3시로 면회시간을 지정하였다. 이것이 문화살롱 ‘목요회’의 시작이었다. 목요회 멤버 중에는 작가지망생이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있었다.



서재라는 그릇


 초판본과 자필원고를 통해 소세키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념관 2층의 전시도 볼만하지만 소세키산방 기념관의 가장 큰 눈요깃거리는 레플리카로 재현한 소세키의 서재가 아닐까 한다. 백여 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사랑하는 작품의 산실을 직접 보다니. 비록 재현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소세키산방의 서재에서 (1914년 12월. 사진출처 : 소세키산방기념관)



 그의 서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무수한 책들이었다. 하드커버의 서양서는 줄을 맞춰 서있었고, 동양서는 누워있었다. 눕혀서 쌓아놓은 동양서는 책을 찾기 쉽도록 제목을 적은 꼬리표를 혓바닥처럼 늘어트려 놓았다. 소세키의 성격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보다 더욱 장관은 책장 밖으로 넘친 책들이었다. 책장에 꽂힌 것보다 더 많은 책들이 바닥에 쌓여있었는데, 그 책의 탑들이 병풍을 이루었다. 보통 책이 이 수준에 이르면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지기 마련인데, 반듯하게 줄을 맞춰놓았다. 당시의 사진에도 저렇게 반듯하게 쌓여있었다고 하니 이 또한 그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소세키기념관이 내부공개"(산케이신문)

재현된 서재의 모습은 위 링크의 산케이신문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실제 유품의 원소장자인 현립 가나가와 근대문학관과 도호쿠대학 부속도서관의 요청대로, 재현된 서재의 사진을 찍는 것은 가능하지만 재배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소세키산방을 보다 : 웹판 나쓰메 소세키 디지털 문학관

당시 서재의 모습과 유품에 대한 소개는 위의 현립 가나가와 근대문학관 나쓰메 소세키 디지털 문학관에서 볼 수 있다.



 책과 함께 바닥에 깔린 페르시아 융단이나 상아제 페이퍼나이프 같은 유품들 또한 모던보이로서 소세키의 취향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취향은 어쩐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속물적 지식인 ‘구샤미(苦沙弥)’를 떠올리게 했다. 구샤미는 천연두를 앓아 얽은 얼굴부터 영어선생이라는 점까지 소세키의 자기풍자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실제의 소세키와 닮은 부분이 많은 캐릭터다. 구샤미에게 서구적인 신지식은 유일한 밥벌이 수단이자, 실업가 가네다와 같은 자본주의적 속물들과 자신을 구별 짓는 정신적 보루로 기능한다. 마음속에는 가네다처럼 사회의 주류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대고 있지만 말이다.


 구샤미는 소세키의 또 다른 얼굴로 여겨진다. 메이지 유신으로 봉건제도가 붕괴하면서 소세키와 형제들은 지난 시대에 아버지가 누렸던 특권을 물려받을 수 없게 되었다. 신분적 ‧ 경제적 불안 속에서 그들이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지식뿐이었다.


 물론 하급무사나 나누시 가문 출신의 불안한 세대로서 지식을 삶의 돌파구로 삼았다는 점은 당대 일본 지식인들이 대체로 공유하는 특징이었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쓸모없는 자식 취급을 받으며 살았으며, 후에 학식으로나마 아버지의 관심을 끌 수 있게 된 소세키에게 지식은 더욱 큰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물질적으로 표현한 소세키의 서재는 그의 깨어진 자아의 모양을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그릇이 아니었을까.



서재를 둘러싼 당시의 베란다식 회랑. 파초와 속새는 소세키가 자신의 취향대로 꾸민 것이다. 기념관 정문의 파초 또한 서재 재현의 일부였던 것이다. (사진출처 : 소세키산방기념관)



회랑에서 풍경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취하는 소세키. (사진출처 : sakamichi.tokyo)



서재의 베란다식 회랑도 재현되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소세키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2층 전시실로 여행자를 안내하는 고양이. 소세키의 작품세계를 상징하면서도 관람자들에게 친근감을 주려한 기획자의 궁리가 엿보였다.



카페 소세키


 관람을 마치고 나니 노곤해져서 1층 카페 소세키의 창가에 고양이처럼 늘어져 있었다. 커피는 덴노가에서 마신다는 타마야 고바야시(珠屋小林) 상점의 원두로 내렸다고 한다. 배도 살짝 고팠으므로 버터케이크를 곁들였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알게 된 이야기지만 카페 소세키의 진정한 주인공은 버터케이크가 아니라 쿠우야(空也)의 모나카와 모찌였다.





 쿠우야는 1884년에 창업한 긴자의 화과자점인데, 소세키가 쿠우야의 모찌를 아주 좋아하였다고 한다.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도 구샤미와 메이테이, 간게쓰가 쿠우야 모찌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현암사판에는 그냥 찹쌀떡이라 번역되어 있지만, 간게쓰의 앞니 빠진 자리에 낀 떡이 바로 쿠우야 모찌다. (모찌는 1월과 11월의 기간한정상품)


 매장에 상품도 메뉴판도 없는 이 화과자점은 오래된 만큼 아주 인기가 좋아서 예약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마저도 예약전화가 하도 많아서 전화가 연결되길 기다리느니 직접 가서 예약을 하는 게 낫다고 한다. 특히 모나카는 하루에 예약으로만 만 개 가까이 팔리는 모양이다.


 그런 귀한 모나카와 모찌를 이곳에선 소세키와의 인연 덕에 쉽게 맛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자는 버터케이크만 맛있게 먹고 돌아섰다.



입장권과 기념품점에서의 수확. 소세키산방 원고용지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초판 삽화로 장식한 문고판 북커버. 만년의 소세키는 원고지를 주문제작하여 사용했다. 디자인은 유명한 판화가로서 문학서의 장정을 주로 맡은 하시구치 고요우(橋口五葉)가 맡았다. 1행이 열아홉 칸으로 이루어진 것은 연재를 위해 당대의 신문편집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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