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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철 Jun 03. 2019

수학여행의 기분으로 아사쿠사

도쿄, 2018년 11월

마지막 이야기

도쿄도 다이토구 아사쿠사





모던 아사쿠사


 월요일이 되자 도쿄라는 이름의 톱니바퀴는 다시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슈트를 입고 가방을 든 사람들이 생활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여행자 또한 생활인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이번 여행의 피날레는 도쿄에 처음 온 여행자들이 반드시 간다는 아사쿠사(浅草)로 정했다. 여행자는 전철의 생활인들 틈에 서서 도쿄를 노래한 옛 유행가를 떠올렸다.

도쿄의 번화한 아사쿠사는
카미나리몬(雷門), 나카미세(仲見世), 센소지(浅草寺)
비둘기 구구구, 콩 파는 할머니
활동사진, 십이층(전망대), 하나야시키(花屋敷, 유원지)
스시, 오코시(밥풀과자), 소고기, 덴뿌라

-소에다 토모미치(添田知道), 〈도쿄부시(東京節)〉, 1919년.


 이 노래가 불리던 1920년대의 아사쿠사는 모던의 첨단을 걷던 거리였다. 흥행가(興行街)라 불리던 거리에선 영화관과 극장들이 길 양편으로 공연 이름을 적은 깃발을 세워두고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하나야시키에선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진기한 동물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축음기 소리 울려 퍼지는 거리마다 오만가지 것들을 파는 식당과 카페, 잡화점이 늘어서 있었다. 아사쿠사란 하나의 거대한 유원지였다. 그리고 지금도 아사쿠사는 하나의 거대한 유원지나 다를 바 없다. 다만 그 시절의 모던이 이제 복고가 되었을 뿐이다.



1937년의 아사쿠사 공원 6구, 흥행가의 풍경 (사진출처 : Wikipedia)



스미다 강에서 건져 올린 아사쿠사의 오늘날


 아사쿠사는 원래 센소지라는 사찰의 신도들이 모여 살면서 번화하기 시작한 마을이었다. 고대 일본의 중심은 간사이(関西) 지방이었고, 무사시노(武蔵野)라 불리던 도쿄 일대는 한적한 촌에 지나지 않았다. 센소지가 생기기 이전의 아사쿠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옛 아사쿠사의 주민들은 농사를 짓거나 스미다 강(隅田川)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던 모양이다.


 천년하고도 사백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먼 옛날, 아사쿠사에는 히노구마노 하마나리(檜前浜成)와 타케나리(檜前竹成)라는 이름의 어부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제는 여느 때처럼 스미다 강에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물을 당겨보니 사람 모양을 한 조각상이 딸려오는 게 아니겠는가. 조각상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한 형제는 하지노 나카토모(土師中知)라는 선생을 찾아가 이 조각상이 무엇인지 물었다. 조각상이 성스러운 관세음보살상임을 알아본 하지노 나카토모는 어부형제와 함께 불교에 귀의했다. 이들은 스미다 강에서 건져 올린 관세음보살상을 본존으로 삼아 절을 세웠다. 이것이 센소지의 시작이었으니, 그 때가 628년이었다.



히로시게(広重), 《東都旧跡尽 浅草金竜山 観世音由来》



 센소지의 관세음보살을 찾으면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소문은 날로 퍼져나갔다. 과연 정말로 그러했는지 역대의 수많은 권력자들이 센소지의 관세음보살을 신앙했다. 권력을 배후에 얻은 센소지는 날로 성장했다. 특히 도쿠가와 막부는 센소지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원소로 지정하고, 아사쿠사 일대를 센소지의 영지로 주었을 정도였다.


 유명한 권력자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돌자 먼 곳에서도 센소지를 찾아오는 이들이 늘어났다.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 자연히 참배객들을 상대로 하는 상업이 번성하는 법이다. 식당, 찻집부터 길거리 곡예단이나 가부키 극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먹거리와 볼거리가 넘치는 아사쿠사의 모습은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히로시게(広重), 《사루와카마치 밤의 경치(猿わか町よるの景)》, 1856년.
1841년, 막부는 에도에서 손에 꼽힌다는 가부키 극장과 인형극 극장들을 센소지의 북동쪽(오늘날의 아사쿠사 6초메)으로 모두 이전시켰다. 그리하여 이 거리의 이름은 가부키의 창시자인 사루와카 칸자부로(猿若勘三郎)의 이름을 따 사루와카마치라 불리게 되었다. 메이지시대에 들어서자 사루와카마치는 영화의 거리로 다시 태어났다. 아사쿠사 공원 6구로 지역명은 바뀌었지만 말이다.



이상한 나라로 통하는 카미나리몬


도쿄의 번화한 아사쿠사는
카미나리몬, 나카미세, 센소지


 〈도쿄부시〉의 노랫말대로 아사쿠사 역에서 나온 여행자를 제일 처음 맞이한 것은 센소지라는 절의 입구인 카미나리몬이었다. 역시 도쿄관광의 기본인 아사쿠사답게 입구부터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붐볐다. 키가 큰 백인들의 머리가 검은 머리의 물결 위에 동동 떠다니는가 하면, 히잡을 두른 여인들이 기념사진을 박고, 그 사이로 중국인의 무리가 깃발을 따라 우르르 몰려다녔다.





 카미나리몬, 즉 번개의 문(雷門)이라는 이름은 그 양옆에 번개의 신과 바람의 신이 지키고 서있다 하여 붙은 것이다. 카미나리몬은 화재로 타버렸다가 재건하기를 수없이 반복해왔는데, 1865년의 대화재로 전소된 이후로는 백년 가까이 재건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가설로 세워놓았던 문도 1945년 5월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아사쿠사 일대가 잿더미로 화하면서 사라졌다.





 지금의 카미나리몬은 1960년, 전자제품업체 파나소닉의 창립자인 마쓰시타 코노스케(松下幸之助)의 기부로 재건된 것이다. 센소지의 관세음보살에 기도를 올렸더니 병이 나아서, 그 보은으로 기부했다고……. 카미나리몬의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제등의 테에는 파나소닉의 전신인 마쓰시타전기(松下電器)와 마쓰시타 코노스케의 이름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여행자가 카미나리몬 앞에 서자 번개의 신이 여행자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센소지의 방문자 중에 혹여 삿된 놈이라도 섞여들지 않을까 하고 살피는 것일까. 여행자는 최대한 무구한 얼굴로 붉은 제등 밑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별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카미나리몬이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라도 되는 것처럼.



실은 뻔한 나라, 나카미세 상점가


 카미나리몬으로부터 호조몬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참배로인 오모테산도(表參道)를 따라 온갖 먹거리와 잡화를 파는 나카미세의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절이든 신사든 경내의 참배로에 장터가 벌어진다는 건 여행자의 종교감각으로는 언제 보아도 퍽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다.





 이곳 나카미세는 1685년, 센소지가 영지 내에 사는 주민들에게 경내의 청소와 같은 부역을 부과한 대신, 가게를 열도록 허가해 준 데에서 시작되었다. 센소지 관세음보살의 이름이 드높아질수록 나카미세는 번창했으니, 관세음보살의 공덕치고는 퍽 세속적인 감이 없지 않다. 어쨌든 먹고 마시고 구경하는 서민의 놀이터로서 아사쿠사는 이곳 나카미세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여행자는 오모테산도를 끊임없이 흐르는 사람의 강물을 따라 나카미세를 구경했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제법 일본적인 멋이 있는 상점가였는데, 다가가 뜯어보니 수학여행지의 기념품 가게가 따로 없었다. 동전지갑부터 장난감에, 강아지, 고양이용품까지…… 아사쿠사와 별 관련도 없는 잡다한 ‘메이드 인 차이나’ 물건들이 좌판에 즐비했다. 외국인들의 고정관념에 부응하는 일본 풍의 물건이 인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점두에 걸린 닌자복과 수리검을 보고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느 가게나 파는 물건도 비슷했다. 귀여운 무늬의 가방을 발견해서 귀인을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았는데, 옆 가게에 가니 같은 원단으로 만든 지갑을 팔고 있더라.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관광지의 분위기도 그 나름의 맛이 있는 법이다. 별 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관광지의 이름이 새겨졌을 뿐인 목도를 괜히 잡아보고, 고구마 양갱을 사서 입에 넣기도 전에 떨어뜨리고……. (불쌍해보였는지 하나 더 주셨다.) 사실 진짜배기 맛집과 상점들은 나카미세 양옆의 골목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데, 여유가 많지 않은 출국 날의 여행자는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카미세에서 바라본 도쿄 스카이트리



야나기차야의 녹차 아이스크림. 좋다! 진하다! 쓰다!!



아사쿠사에서 날아온 나들이가방



히로시게(広重), 《조루리마치 번화도(浄るり町繁花の図)》 부분확대, 1852년.
복을 불러오는 고양이, 마네키네코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가장 오래된 기록에 따르면 센소지에서 한 노파가 도자기로 된 마네키네코를 팔아 대유행시켰다고 한다. ‘아사쿠사 관음 고양이’, ‘마루시메네코(丸〆猫)’ 등으로 기록된 이 고양이의 등 뒤에는 동그라미(마루丸) 안에 ‘교묘하게 자신의 것으로 삼다’는 뜻의 ‘세시메루せしめる’에서 따온 ‘〆(시메)’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즉, 이 고양이의 집사가 되면 돈이나 복을 원만히 자기 것으로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진출처 : Wikipedia)



나카미세에서 바라본 호조몬



지역민들의 마음이 담긴 호조몬의 짚신


 번개의 신, 바람의 신만으로는 센소지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한 걸까. 나카미세의 끝에는 인왕(仁王)이 지키고 서있는 호조몬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물론 호조몬도 도쿄대공습으로 불탔다가 일본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보이던 1964년에야 재건된 것이다.


 호조몬 재건에 사재를 기증한 이는 오타니 중공업을 창립한 철강왕이자 당시 일본 3대 억만장자로 불리던 오타니 요네타로(大谷米太郎)였다. 젊은 나이에 단돈 20전만 들고 도쿄로 상경한 그는 일용직 노동자에서 스모선수를 거쳐 일약 억만장자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일본여행자들이 자주 보게 되는 ‘호텔 뉴 오타니’도 그가 세운 것이었다. 카미나리몬도 그렇지만 센소지는 예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정재계의 거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절인 모양이었다.





 한편 호조몬의 안쪽 벽에는 거대한 짚신이 한 켤레 걸려있었다. 한 쪽 발에만 사람이 서넛을 족히 누울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야마가타 현 무라야마 시(山形県村山市)의 봉찬회에서 제작하여 기증했다는 이 액막이용의 짚신에는 볏짚이 2.5톤 이상 들어갔다고 한다.


 호조몬의 짚신은 1929년 무라야마에서 열린 짚공예품 전시회를 계기로 태어났다. 지역 청년들은 전시회에서 어떻게 하면 지역의 특산품을 잘 알릴 수 있을까 고심 끝에 거대한 짚신을 만들어보기로 하였다. 완성된 짚신은 단순히 호기심을 끄는 물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청년들의 손재주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호평을 받았다.


 짚공예품 전시회를 성공으로 이끈 청년들은 도쿄의 센소지에 거대한 짚신을 기증하여 지역을 더더욱 알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짚신을 가져가는 데에 필요한 운송비를 마련하지 못해 그들의 도쿄행은 좌절되고 말았다. 대신 지역의 코마츠자와 칸논(小松沢観音)이라는 사찰에 짚신을 기증했는데, 근교에서 짚신을 보러오는 참배객이 늘어 지역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한다.


 도쿄의 센소지에 자신들의 짚신을 걸겠다는 무라야마 청년들의 꿈은 1941년에 이르러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도쿄에서 수많은 인파를 굽어보게 된 이 짚신에는 중일전쟁의 승리를 비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자타를 불문하고 숱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그런 바람이 담긴 짚신은 미군이 투하한 소이탄의 불길에 재로 돌아갔다. 인왕은 화염 속에서 침묵을 지켰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무라야마의 짚신은 1964년, 호조몬의 재건과 함께 지역민들의 새로운 바람을 담고 돌아왔다. 무라야마 출신의 조각가 무라오카 규사쿠(村岡久作)가 호조몬의 새로운 인왕상 조각을 맡게 된 것을 기념하여 지역주민들이 새로이 만든 것이다.


 무라야마 봉찬회는 이후 거진 십 년에 한 번씩 새 짚신을 만들어 센소지에 기증하고 있다. 지금 호조몬의 뒤편에 걸려있는 것은 1941년으로부터 8대째에 해당하는 짚신으로 2018년에 제작 ‧ 기증되었다. 무라야마 시에선 호조몬의 짚신을 만들기 위해 키가 큰 옛 품종의 벼를 특별히 따로 재배하는 노력까지 기울인다고 한다. 요즘의 벼는 키가 작게 개량되어 짚공예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호조몬의 짚신은 지역사회의 발전을 고민하고 전통을 지키려는 지역민들의 마음이 담긴 짚신이었다. 여행자가 짚신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한 할아버지가 어린 친구들을 이끌고 짚신 밑으로 다가와 아이들에게 짚신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무라야마 사람들의 마음은 이렇게 다음 세대에게로 이어진다. 마음이 이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가 아닐까.











센소지의 본당과 오중탑. 
역시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다가 1648년에 재건된 것이 근대까지 남아있었으나, 1945년의 도쿄대공습으로 전소하고 말았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대를 전후하여 재건한 것이다. 당시에는 일본도 아직 문화재 복원에 대한 개념이 잡히지 않았던 시대였다. 때문에 카미나리몬, 호조몬, 본당, 오중탑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졌다. 
이천년대 들어 센소지의 기와들은 가벼운 티타늄 기와로 교체되었다. 이는 건물이 지진에 더욱 잘 견디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면서도 전통기와지붕의 색감을 내도록 서로 다른 색깔의 티타늄 기와를 사용했다고 하니 참으로 꼼꼼한 사람들이다.



센소지 본당 앞에 있는 미아 알림 표지석(迷子知らせ石標). 정면에 ‘나무 대자비 관세음보살’이라 새겨진 이 비석은 미아를 찾는 표지판으로 이용되었다. 비석의 뒷면에 미아를 찾고 있다거나 혹은 보호하고 있다는 종이를 붙여 정보를 교환하였다. 에도시대 시내의 번화가엔 이러한 미아 알림 표지석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센소지의 미아 알림 표지석은 1860년 세워졌으나 현재 서있는 것은 1957년에 복원한 것이다.



여행자는 언제까지고 여행자이고 싶다! 귀국(출근)하기 싫은 자의 마지막 몸부림.
‘회전초밥 네무로 하나마루’ 긴자점.
긴자역과 연결된 도큐플라자에 있으므로 쇼핑차 들르기 좋다. 츠키지의 스시잔마이보다 훨씬 맛있었다.
잘 있거라, 연어알! 굳세어라, 도화새우! 다시 보자, 방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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