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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선 Dec 30. 2020

우울했던 친구와의 전화, 교실바닥이 있는 카페에서

나선이 쓰는 글

흐린 날일수록 산책을 해서 기분을 환기시켜야 한다. 아이들이 하원 하기 전에 나는 산책 겸 몇 가지를 사러 잠시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n 년째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친구 S는 얼마 전에 시험이 끝나 2차 준비 중이라고 했다. 연락하던 남자와 연락을 안 하게 되었다는 말을 했고, 시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조금 우울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라는 말도 해줬다. 나는 몇 년간 그걸 몰랐고 연락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12월에 임용 합격 글이 주르륵 인스타에 올라오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S가 연락하거나 소식을 올리지 않는 것은 잘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하면서 휴대폰을 들어 한참을 전화할까, 말까 매년 고민했다. 결국엔 친구에게 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아 연락하지 못했었다. 그냥 우울한 친구에게 무슨 말이든 해서 서툴더라도 위로해 줄 걸 그랬다.

우리는 매년 이맘 때는 연락을 안 하다가 나중에 연락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S가 먼저 연락을 해준 거였다. 내가 요즘은 영화든 책이든 사랑 이야기가 재밌다고 했더니 다음 연애 소식이 있다면 꼭 내게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연락이 뜸했던 시간이 S도 미안했던 걸까. 조금 더 신경 써 줄 걸. 전화를 끊으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
통화하며 걷던 길은 선사유적지 산책로였다. 나는 자주 방문하다가 코로나가 심해지고는 잘 못 갔던 카페에 갔다. 바로 앞이었다. 개인 카페라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앞에 선사유적지를 마주 보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뻥 뚫린 기분이 드는 곳이다. 나는 들어가서 항상 시키던 아메리카노가 아닌 브루잉 커피를 주문했다.

"원두는 어떤 걸로 해드려요?"

직원이 물었는데 난 마치 브루잉 커피를 처음 마시는 사람처럼 당황해서는,

"어.. 원두 뭐가 있죠?"

하고 물었다. 메뉴판이 있었는데 영어와 한글이 같이 쓰여있었다. 원두 판매 가격과 커피 한잔 값이 나란히 적혀있어서 이렇게 비싼가 하고 우왕좌왕했다가 다시 안내를 받아 제대로 메뉴판을 읽었다. 당황해서인지 봐도 잘 읽히지 않아서 그냥 산미 있는 원두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전에 마셔본 적 없는 원두의 커피를 마셨다. 추천해준 것을 주문한 선택은 탁월했다.

자주 갈 때도 사장님은 나를 모르는 것 같았는데 오랜만에 보니 더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마스크 때문일까. 마스크를 써서 상대가 나를 잘 못 알아본다는 것은 좋은 것 같다. 나는 단골 카페에서 주인이 아는 척하지 않는 경험을 오랜만에 했다. 아무 음성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평소엔 햇살이 한가득 쏟아지는 카페 창인데 오늘은 날이 흐려서 창 너머 선사유적지가 더 고즈넉하고 몽환적으로 보였다.

작은 카페 바닥은 옛날 교실 같은 나무 바닥이었다. 걸을 때마다 약간 삐걱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삐걱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가끔 책을 읽다가 카페 사장이 소리 없이 내 앞을 지나가면 깜짝 놀라곤 했다. 내가 걸을 땐 소리가 났던 것 같은데. 그는 홍길동일까. 인기척이 없는 사장님 덕분에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잔잔한 팝송과 커피 향만이 카페를 가득 메운다.

나는 책을 읽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인스타에서 전부터 가려고 마음먹었던 독립 책방의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코로나 2단계 격상으로 인해 영업시간이 바뀌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카페 사장님과 그 책방 주인이 친구랬었는데. 갑자기 그 사실이 떠올랐고 어쩐지 두 사람 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은 연결감을 느꼈다. 물론 둘은 나를 모르고, 나도 둘을 모른다.

카페엔 그 책방 지기 친구가 선물한 독립출판물 몇 권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다. 카페 사장님은 저 책을 읽었을까. 둘은 서로의 취향을 알까. 친구란 뭘까. 안다는 건 뭘까.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S에게 내가 먼저 연락해서 만나고 싶다. 독립 책방에도 꼭 갈 것이다. 오늘은 사람이 없고 조용했던 작은 카페 나들이로도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당장 아이를 어린이집에 하원 하러 가야 한다.

지금을 살아내는 것만으로 우리는 바쁘고 힘겹다. 다들 코로나 조심하고, 감기 조심하고, 독감도 조심하고 무사히 얼마 남지 않은 올해를 잘 지내길. 내년엔 만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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