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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선 Dec 30. 2020

산타모자와 그림자와 독립 책방

독립책방 방문기

어떤 날엔 작은 일상의 변주가 나를 살게 한다.

그리고 독박 육아 다음 날은 집을 나서는 것이 좋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일찍 집안일을 마치고 점심 출근하는 남편에게 서점에 내려달라고 했다. 내게 독립 책방에서만 쓸 수 있는 도서 상품권이 생겼다. 2만 원. 한 권 사기엔 많고 두 권을 사기엔 조금 부족한 금액. 나는 어떤 책을 살까 고민했다. 이성적인 책과 감성적인 책을 한 권씩 골라볼까 생각만 해뒀다. 서점을 찾는 이유는 운명처럼 책을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일단은 손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어보기로 했다.

서점에 들어와 이층으로 올라갔다. 익숙한 두 얼굴이 보였는데 한 명은 책방 사장님이고 한 명은 작가와 독자로 만난 동네 주민이었다.

"이 곳에 오니 이렇게 동선이 겹치기도 하네요."

올해 처음 본 작가님이었다. 예상치 못한 우연은 늘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갈 시간이 되었다며 만나자마자 헤어짐의 인사를 했다. 내년을 기약했다.

내년 독서 목표 중 하나는 시집을 많이 사는 거였다. 시는 정말 강력한 한 편을 만나면 인생이 뒤바뀌는 것 같은 경험을 해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전에 추천받은 적이 있는 시집 한 권과 좋아하는 독립출판 작가의 책을 골랐다. 급한 마음으로 살 책을 고르면 꼭 후회하게 되니 오자마자 천천히 골라두었다. 이 두 권이 마음에 든다. 결국 나는 감성적인 책만 두 권을 샀다.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바로 계획대로 하는 일 없는 enfp다.

책을 읽다가 잠시 사장님과 대화도 나눴다. 한 전시 포스터를 붙이고 있어서 가까이 가서 봤다. 빨간 포스터에 열리고 있는지 닫히고 있는지 아니면 반쯤 열려있는지 모를 문이 있었다. 그리고 작가 이름이나 장소, 날짜 등 기본적인 것 말고는 전시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어떤 내용의 전시 일지 궁금했다. 나는

"포스터를 이렇게 만들면 뭘 하는지 어떻게 알고 가요"

라고 말했지만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맡아 둔 서점 창가 쪽의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가만히 앉아서 서점 안을 둘러봤다. 한쪽 벽에 크게 붙어 있는 영수증 서점 일기의 네 번째 글엔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글을 쓰는 나에게 건네는 말인 것 같았다. 시선을 옮겼다. 서점의 천장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무로 된 실링팬이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천장의 선풍기 같은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몰라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다. 몰랐던 물건의 이름을 알게 되어 기뻤다.

등 뒤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내 앞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내 그림자를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내 머리는 저렇게 둥글구나, 키도 이만큼 크면 좋을 텐데. 구름이 해를 가리며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내 앞의 그림자는 희미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좀 전보다 조금 더 길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햇살을 보려고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바로 앞에 주차장이 보였다. 주차장에서 주차권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그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키보드 위에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빨간 산타모자를 쓰고 있었다. 입고 있는 점퍼의 등에는 바로 옆에 있는 빵집 이름인 '성심당'이 쓰여있었다. 가슴팍에는 한자 마음 심(心) 자가 박혀 있었다. 초코색 도요타가 주차장으로 들어가니 그분이 이쪽으로 주차하라고 안내하는 손짓을 했다. 마스크 아래 얼굴은 안 보이지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의 진짜 웃음은 눈을 보면 안다고 한다. 나는 마스크를 써도, 멀리에 있어도 그 사람이 웃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마음(心)을 가진 산타가 창 밖에 있었다. 나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글을 쓰는 동안 내 그림자는 선명하고 길어진 채로 있었다. 꼭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일어나기 전에 벽에 걸린 영수증 서점 일기를 한 번 더 읽었다. [누군가의 감정이 타자에게 온전하게 전해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글이 보였다. 아까 보았을 땐 눈에 들어오지 않던 글귀였다. 글을 읽는 순간도 결국 타이밍이다. 보는 순간 내 것이 되는 글이 있다. 숙제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쓴 글을 읽고 사람들이 내 감정을 조금이라도 온전하게 알 수 있을까. 요즘은 글에서 숙제를 많이 얻는다.

매주 일상에서 변주를 만들어 글을 쓴다. 오늘의 변주는 이 정도면 좋았다.

남은 커피를 한 입에 털어 넣고 일어났다. 내 그림자가 창으로 들어오는 그림자의 밖으로 튀어나가 반으로 잘린 채가 된다. 나는 나로 돌아온다.

서점을 나서며 오늘 저녁은 뭐해먹지, 매일 하는 질문으로 현실감을 느낀다. 그래도 집에만 있던 어제보다는 더 기운이 난다. 오늘 얻은 에너지로 가족들에게 더 잘 해먹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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