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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May 30. 2021

면접 구두를 신발장 안으로 넣었다

현관 바닥에 꼬질꼬질한 운동화들 틈 사이로 매끈하고 각진 면접용 구두가 제 자리를 잡고 버티고 있는 나날이 흘러갔다. 집을 드나들면서 현관 바닥 한 켠에 콧대를 뽐내고 있는 구두를 보고 있노라면 낯설면서 우스웠다. '운동화'가 소울메이트였던 시절과 아직 안녕할 때가 안됐는데, 나는 소울메이트를 떠나보낼 생각에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자주 사용하는 메모 어플에는 'ㅇㅇ매체 최종 면접 대비' 칸을 새로 만들어 놓고 사용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ㅇㅇ매체 근처를 지나갈 때나, 아니면 친구와 약속을 잡으려고 달력을 미리 넘겨볼 때라던가, 여름옷을 마련하고 싶어서 구경하는데 오피스에도 입고갈 수 있는 옷을 함께 본다거나 할 땐 나도 자꾸만 기대하는 마음이 되더라. '내가 진짜 ㅇㅇ매체 기자가 된다면?!' 그 뒤로 이어질 문장은 대체로 기분 좋은 내용이었다. 그 기분 좋은 상상을 머리 한 켠에 얹고 살아갈 수 있는 날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은,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요 몇주 간 다른 언론사 필기 시험과 더불어 ㅇㅇ매체의 각종 전형에 응시하느라 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잠이 오질 않는다. 눈 주변엔 피로가 우글거리고, 어깨는 무겁고, 머리는 아픈데도 잠이 안 온다. 기분이 은근히 다운되고, 내일이 두렵기도 설레기도 했다. 사실 두려움이 더 컸다. 탈락이 두렵다. 먹을대로 먹어버린 나이도 두렵고, 전형에 응시하면서 이미 애사심이 생겨버렸는데 단지 해당 매체의 '독자1'로 남을 때 느낄 허탈함도 두렵다. 준비생으로 또 한 해를 버티면서 늙어갈 마음도 두렵고, 한 단계 한 단계 오르는 것이 버거울 나날도 두렵다.


이렇게 조급해질 때마다 주문 처럼 외는 말을 또 주섬 주섬 마음에 띄웠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야"는 말. 친구 S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속도 자체가 운동의 방향성을 포함한 개념이기 때문에 속력이란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나는 속도든 속력이든 아무렴 좋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빨리 가느냐보다는 어디로 가느냐라는 뜻만 잘 통하면 그만이었다.


저 말은 정말 자주 부서지는 말이다. 친구들의 취업 소식에 마음 한 구석에 찾아드는 조급함을 느낄 때 내가 내뱉는 한숨 사이에서 저 말의 부서진 찌꺼기가 함께 나온다. 나보다 어리거나, 같은 나이인데 벌써 이뤄놓은 게 많은 사람들을 볼 때 미간 사이에서 저 말이 구겨진다. 인생..정말 속력보다 방향일까..? 아니..나는 느린 건 둘째치고,,, 방향이라도 맞게 가고 있는 게 맞는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매일 매일 되새기는 만큼, 매일 매일 부서지는 말. 파도가 심한 해변가에 모래성을 쌓듯 나는 매일 매일 정성들여 저 말을 빚고 인생이란 파도가 휩쓸어가면 다시 쌓고,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주무르곤 했다.


글은 삶을 바꾸려는 시도이기 보다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는 일이라기에, 나는 오늘 잠이 오지 않는 밤을 좀 다르게 바라보려고 글을 쓴다. 인생은 속력보단 방향이 중요함을. 내 손톱을 이루고 있는 작은 미생물과 나의 시계가 다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각기 다른 사람의 인생도 서로 다른 속력을 지녔다는 걸.


내일 이후의 내가 또 꼬질꼬질한 운동화를 신은 나라도 포기하지 않고 싶다. 그래서 내일을 맞이하는 겸한 마음으로, 구두를 신발장 안에 도로 집어 넣으며 최선을 다해 나아가는 내삶의 속력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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