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하면 월초
7월 초가 지났다.
이말은 즉, 한해의 절반이 지나갔단 소리다.
일년의 절반을 소득 없이 지나보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는지,
하루를 조금 일찍 시작했다.
늦게 자서 일찍 눈을 떴는데도 개운한, 1년에 몇 번 없는 아침이었다.
베이글을 올리브 오일에 구워서 감자수프와 함께 먹었다. 공복이 탄수화물의 달콤함을 반기지 않을 리 없었다. 제철을 맞은 감자는 푸근하고 포슬했다. 아침을 다 먹은 뒤엔 커피를 홀짝이면서 신문을 챙겨 읽고 정리했다. 하루를 조금 일찍 시작했다는 것 말곤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다만, 다른 나날들과 차이가 있다면 오늘은 '초월감'이 조금 더 필요한 하루였다.
요즘 나는 거의 매일 위기감과 싸운다. 직관적으로 말하면 꿈을 이루지 못할 거라는 위기감이다. 조금 더 구구절절하게 말하자면 제도권 안에 안착하지 못할 거라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속한 세계에 속하지 못한 채 겉돌다가 결국 나가 떨어질거라는, 몇 년간 붙들고 있었던 일도 이루지 못한 허울 좋은 껍데기가 될 거라는, 그런 종류의 위기감들이다.
위기감에 강하게 휩싸일 때면 나는 어떤 초월감을 통해 위기감을 삼켜 내려고 한다.
이 초월감을 정확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음, 그 초월감을 가지려 노력할 때의 나는 눈동자에 조금 힘이 풀리고 입은 조금 더 굳게 다물게 된다. 또, 공기의 흐름에 피부로 느낄 만한 변화도 없고 아무런 방해물도 없는 내 방 안락한 의자 위에서 나는 갑자기 흔들리지 않고 버티려고 급하게 중심을 잡는다. 척추를 곧추세우고 턱을 조금 더 치켜들고, '내가 지금 해야 할 것'들에 대해 곱씹는다. 뭐, 대단할 것들도 없이 매일 반복되는 리스트들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붙들 수밖에 없는 대단한 리스트들이기도 하다.
초월감을 가지는 나만의 방법은 그야말로 위기감의 근본적 원인인 '백수 상태',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 원인인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왜 이러지?"라는 의문문 대신, "이런 삶도 있는거야"는 평서문을 마음으로 중얼거리는 행위이며, 입을 삐죽거리는 대신 조용히 허공을 응시하는 태도다. 눈을 부릅뜨고 코앞에 인생의 온갖 장면을 직면하려는 행위보다는 인생과 운명에서 한 다섯 발자국 쯤 멀어져보는 것이며, 과거에도 미래에도 영혼을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현재에 매달리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초월감이 생긴다고 해서 내가 느끼는 이 위기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위기감에 한없이 흔들리지 않고, 내가 지금 위기에 있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덴 도움이 된다.
초월감이 오른 나는 조금 더 뚱해진다. 그리고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수행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할일들을 조금은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나면 목과 명치 사이에서 가슴을 짓누르던 위기감은 아침에 먹은 감자수프와 함께 위장으로 내려가 있다. (물론 초월감이 매번 잘 소환되는 건 아니다.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7월초가 지났다. 초월하면서. 그래도 작년보단 초월이 쉬워지긴 했는데. 하지만 이 사실 조차 위기감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끝도 없이 초월해지기만 하면 어떡하지. 잘 견디기만 하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지. 악순환이다.
그럼 또 뭐 어떡해 초월해야지.
달력이 한 장 한 장 넘어가면서 느껴지는 압박감들, 월초가 지나 월말로 다다를 때의 허탈함, 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하면 함께 얼어붙는 꿈들. 이런 한해가 반복되면서 나는 어쩌면 생존 방식으로 초월을 택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