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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Aug 16. 2021

여름예찬

1. 초여름 (2020, 6월에 쓴 글)


  종일 창문을 열어둬도 춥거나 덥지 않다. 집안의 공기와 바깥의 공기가 하나가 되는 시절, 초여름이다. 거리엔 초록이 제 옷을 찾아 입는 중이다. 계절의 환복을 바라보는 일은 늘 생경하다. 환절기는 내가 담긴 세계가 변화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와중에 나만 멈춰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때다. 하지만 다행히도 여름은 내가 제일 사랑하는 온도다. 특히 초여름은 더 그렇다. 햇살 아래를 걷는데 뒷목이 따뜻한 느낌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걷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계절, 발바닥을 방바닥에 종일 대고 있어도 발이 시렵지 않은 계절. '너무 차가워서 문제인 것보단 너무 뜨거워서 문제인 게 낫지 않아?' 라고 말해주는 계절이, 너무 뜨거운 사람은 반갑다.


  여름 안엔 또 여름만의 추위가 있다. 비가 오면서 제법 추워진 날씨가 여름의 존재감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추워도 괜찮았다. 얇은 가디건 하나만 챙겨도 왠지 든든해지는 정도의 추위니까. 실제로는 조금 더 추울 수 있어도. 손에 들린 남방 하나, 가디건 하나에 마음 놓을 수 있는 온도니까.



2. 한여름(2021년 7월에 쓴 글)


 눈 닿는 곳마다 황폐하지 않고, 초록이 우거졌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지. 마음이 황무지같아도 계절의 생동을 눈에 담을 수 있는 게 한여름. 


 물론, 뜨거움이란 것은 누군가에게 재앙 그자체이기도 해서, 특히 인간의 욕심으로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는 지금 여름은 예찬하기엔 이미 너무 슬픈 것이 되버린 것일 수도 있기도 해서, 한여름의 햇살을 오묘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무언가가 절정으로 다다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도, 슬프기도 한 것. 여름이 꼭대기까지 내달렸다는 것은 곧 시린 언덕으로 계절이 뜀박질을 한단 뜻이니까. 그렇지만 작열하는 태양이 있기에, 나는 안심했다. 우리에게 태양이 유독 뜨거운 지금이 있듯이 나에게도 뜨거운 한 때가 있었거나, 있을 거란 뜻이기도 하니까. 태양의 시계와 나의 시계가 그 속도의 차이로, 나는 올여름을 뜨겁게 보내지 못할지라도. 눈뜰 수 없을 정도로 온통 뜨겁기만 한 태양을 피해 그늘로 골라다니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나는 태양의 절정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삶에도 절정이 찾아오기를 서늘한 곳에서도, 바랐다.


 계절의 정점에 서니, 지나간 삶의 절정들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무심코 창밖을 보다가 햇빛이 나뭇잎을 스쳐 만들어내는 노란 얼룩들을 보는 것 같이 잠깐, 잠깐씩 찬란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걷는 거리가 익숙했던 때를 떠올리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제는 그 누군가에게 "잘 지내냐"고 묻지 않는다. 그 누군가와 함께 했던 기억에게 "잘 있었냐"고 안부를 묻는다.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거리를 쏘다녀도 괜찮은 게 여름. 거리의 표정이 조금 더 누추해져도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는 것이 여름. 골목을 걷다보면 방충망이 쳐진 대문에서 가족들의 단란한 식사 잡음이 들려오고, 언덕배기를 오르던 사람들이 중턱에 위치한 마트에서 하드 하나 씩 들고 숨 고르는 것도 여름만의 풍경. 모두가 꽁꽁 싸매기보다는 활짝 열어놓는 여름의 넉넉한 품 안에서 나는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3. 늦여름(2021, 8월 16일)


 "어우 추워."

 북쪽 지역에 위치한 우리 집은 8월 중순만 되도 새벽에 찬 바람이 든다. 열어 둔 창문으로 올해 첫 손님인 추운 바람이 들어 닥치자 엄마가 낯선 형용사를 내 뱉었다. '춥다'는 말이었다. '추워'란 말 뒤에 '에어컨 끄자'가 붙지 않고, 황급히 창문을 닫는 엄마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계절의 끝이, 다가왔구나.


 제일 사랑하는 것과 나누는 당연한 '안녕'은 조금씩 슬퍼진다. 반복되던 '안녕'이기에 담담하려 애쓰지만 끝내 슬프다. 나는 더이상 뜨겁지 않은 노을을 맞이하며 이제 껴입을 일만 남았구나, 맨살을 공기에 내 놓을 일이 사라지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또 견디는 계절을 맞이해야 한다. 여름은 유일하게 명절이 없는 계절이었다. 이제 불청객처럼 느껴지는 명절이 다가오면 백수인 나는 또 슬며시 가족 행사에 불참할 그럴듯한 핑계를 생각해내고, 막상 그날이 다가오면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가운 공기를 뚫고 거리를 쏘다닐 터였다.


 이제 견디는 계절이 온다. 바깥에 나서려면 매서운 추위에 몇 번이고 망설여야 하고, 많은 것들을 몸에 둘러야 한다. 매달 가스비 고지서가 날아올 때 쯤에는 손을 벌벌 떨며 우체통을 확인해야 하고, 눈이 오면 한 걸음 한 걸음 넘어지지 않으려 애 쓰면서 걸어야 한다. 


 견디는 계절이, 온다. 추위를 견디고 나면 '끝'을 견뎌야 한다. 더이상 넘길 달력이 없는데, 기대할 일이 없을 때의 허탈함을 또 어떻게 삼켜야 하나. 나는 저물어가는 여름 앞에서 온통 견딜 생각 뿐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XfN1K6Q4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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