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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Dec 15. 2022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누구보다 잘하고 싶었어요

요새 글을 너무 안 썼죠. 2021년 초에 썼던 글 남겨두고 갈게요.

내가 언론고시의 길을 걷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글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부터 글쓰기 능력은 내가 훔쳐서라도 얻고 싶은 특기였다. 글쓰기에는 진입장벽이 없기 때문이었다. 피아노, 운동, 미술, 영어 같은 것들은 돈을 들여서 누군가에게 전문적으로 배워야 잘할 수 있는 것들로 여겨졌다. 한 마디로 부모가 자식에게 투자를 해서 학원에 보내줘야 습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글은 누구나 원하면 쓸 수 있고, 노력하면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영어 학원은 있지만 글쓰기 학원은 없다. 논술 학원이 있기야 하지만 어디까지 입시용일 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누구나 인정할 만큼 잘하는 사람이 진정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글을 잘 쓰고 싶었고, 그때부터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게 글의 재료가 되는 통찰, 즉 생각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무살, 새내기 시절, 한창 페이스북이 유행할 때였다. 페이스북에 올린 걸 보면 그리 정성들여 쓴 것 같지도 않은데 선배들의 글은 멋졌다. 잘쓰는 '척'을 하는 글이 아닌 진짜 잘 쓴 글들이 넘쳐났다. 그때의 나는 바보 같게도 부족한 밑천을 채울 생각을 한 게 아니라 포기와 미루기를 선택했다. 일단 작가의 꿈을 접었다. 글 잘 써서 먹고살기란 글렀구나, 싶었다. 그래도 글쓰는 삶 자체를 포기하진 않았지만 문제는 부족한 밑천을 채울 생각을 안했다는 거다.


밑천이 탄로난 건 2017년 하반기였다. 당시 인턴기자인 나의 글과 생각을 엿본 사수 선배의 날카로운 지적이 이어졌다. 


"즉각적으로 표현하지 마. 책 읽고 영화 보고 기록해. 그리고 어디 처박혀서 1년 동안 글만 써. 너는 그래야 붙어." 


밑천이 없는 글은 화려한 척을 한다. 알맹이가 없기 때문에 문장을 유려하게 만들어서 잘 써 보이도록 트릭을 쓰게 돼 있다. 내가 그랬다. 선배는 그걸 알아보고 정확히 짚었다. 읽고 써야 했다. 글 잘쓰는 공식은 무조건 많이 읽고 쓰는 것이란 걸 그땐 '알기만' 했다.


실행에 옮긴 건 이번년도 부터다. (나름) 부지런히 읽고 썼다. 2020년 하반기를 읽고 글 쓰는 순간을 사랑하며 살았다. 원래는 독서편식쟁이라서 문학만 읽었지만 신문을 꾸준히 읽기 시작했다. 사회과학 서적에도 손을 뻗었다. 가장 노력한 건 삶의 순간 순간 마다 떠오르는 생각과 감상을 기록하려 애썼단 것이다. 별 거 아니게 느껴지는 생각의 자투리들, 불현듯 치고 올라오는 사회에 대한 불만스런 감정, 재미있는 말장난, 나의 지금을 이루는 과거의 조각들 등을 최대한 적었다. 카카오톡 '나에게 보내기'를 많이 이용한 탓에, 지금 나와 나누는 카카오톡 대화창엔 이상한 문장과 단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래서 글을 쓸 때 카카오톡 대화창부터 켜서 내가 어떤 것들을 기록했는지를 살펴봤다. 그것들을 조합해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나름대로 노력한 결과, 나는 아주 조금 성장했다. 성장을 체감한 순간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래도 의심이 치솟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기복이 심한 인간인지라 글쓰기도 그랬다. 어떤 날은 훅훅 잘 써지고 또 결과물도 나쁘지 않지만, 어떤 날은 연필이 같은 자리만 맴돌았다. "내가 정말 성장한 걸까? 이제 내 글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도 읽을 만 한 글일까? " 끊임없는 의문이 들었다. 어제 한겨레교육에서 주관하는 백일장에서 상을 탄 이후로 나는 스스로를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성장했고 앞으로도 성장할 수 있다. 이제 글을 쓰는 데 두려움이 많이 줄었다. 스스로에게 계속 의문이 들고, 자존감이 추락할 때면 이 글을 보고 다시 힘을 내고 싶다.


글을 사랑하는 이유는 너무 많다. 그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글쓰기에선 솔직함이 강점이 되기 때문이다. 경험상 사람들은 솔직한 글에 마음을 열어주었다. 한터 백일장에서 수상한 글도 "자기연민이 너무 과장된 글"이란 평을 들을 정도로 나에게 솔직한 글이었다. 글은 "내가 나여도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한껏 솔직해져도 괜찮은 존재. 나에겐 글이 그렇다. 그래서인지 나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색하는 과정에서 글쓰기 실력도 성장했다.


앞으로도, 쓰며 살 것이다. 나는 그 길을 선택했다. 쓰는 것으로 나를 먹여 살리고, 쓰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로. 운명은 언제나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가. 글이 그렇다. 글쓰기를 선택해서 삶이 조금 누추해졌지만 글쓰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유일하고도 충만한 행복을 얻는다. 앞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글을 쓰고 싶다. 부디 인생이 그렇게 무탈히 흘러가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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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되고, 직업적인 글쓰기만 하느라, 브런치에 도통 글을 못 올렸다.

글에 대한 깊은 애정이 옅어져가는 지금, 다시 꺼내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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