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ürren / Lauterbrunnen
* Interlaken - Grindelwald
* 20150913
첫차를 타고 융프라우에 올라가야지 생각했지만 그건 내 마음이고 내 다리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피곤해서 8시 조금 넘어 일어났다. 이집은 샤워기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위에 딱 붙어서 가운데의 작은 폭포같은 구조다. 샤워야 어떻게 했지만 머리 감으려니 난감하다. 어떻게 감긴 감았다.
기차를 타니까 중국인들이 너무 많았다. 평소에 유레일로 타고다닐때는 중국인들 그리 못봤는데 밀린 사람들을 여기서 다 봤다. 구름이 꾸물꾸물 하더니 비가 내린다. 망했네. 하고 숙소를 찾아갔다. 유스호스텔 찾느라 조금 고생 해줬다. 깔끔하다.
숙소에 짐을 던져두고 일단 나왔으나 비가 오니 뭘 보나 하다가 그럴땐 마을을 보자 싶어서 뮈렌을 가기로 했다. 차시간을 봤더니 편도 1시간에서 2시간. 여기는 산악기차들이라서 느리다. 여튼 꾸역꾸역 갔다.
다른 동네들도 예뻤지만 여기는 유독 예뻤다. 할슈타트와 동급정도로 이쁜 곳이고 촉촉한 공기 탓인지 뭔진 몰라도 여긴 뭐든지 다 색채가 선명하다. 한시간이면 느긋하게 한바퀴 돌 수 있는 곳이다. 중간에 잠시 앉아서 뭔가 간식 업어온 것들을 집어먹곤 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와 라우터브루넨을 걸었다. 여긴 숙소있는 그린델발트만큼 큰 마을이다. 보니까 융프라우 아래의 베이스캠프 동네는 라우터/그린델이 먼저이고 그 아래 인터라켄이 또 있는거다. 그리고 본격 관광지라서 사방에 호텔들이 가득하다. 큰곳이든 작은곳이든 다 그렇다. 가격표는 뭐 안봐도 당연히 불편한 가격대이지만 숙박비는 세계 어디나 비싸고 여긴 좀 더 비싼 수준.
걷다보니 가까운 곳에 폭포가 있었다. 여기 폭포는 폭포 뒤쪽으로 살짝 들어갈 수 있게 길이 나있어서 잠시 들어가보기도 했다. 버스타고 십분쯤 가면 이동네에서 가장큰 폭포가 있다는데 까먹고 들러보질 못했다. 여기서 3일을 보낼 생각이지만 마지막날엔 또 해있을때 몽트뢰로 이동해야 하니까 들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못갔다. 폭포물소리가 귀 멍멍할 정도로 큰 곳이라는데... 언제 또 갈 일이 있겠지.
여기저기 걸어다녔더니 피곤했다. 사실 어제 무박이틀을 보냈으니 잠이 부족했지. 졸다깨다를 반복하다가 중간에 좀 멍해져서 다시 걷기로 한다. 이미 비는 멎은지 오래다. 여기는 날씨 안좋을 때가 많다던데 내가 좋은 때에 온 것인지 비가 와도 조금 오다가 말고 그렇다. 아까 숙소 아줌마가 오늘 종일 비올거라던데 하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해가 더 반가웠다. 이 날씨면 내일 아침에 융프라우 오르는데는 문제 없겠다.
중간에 융프라우 관련 책자를 받아서 보니 이 동네도 구역을 나누어 이해하면 좀 편했다. 이동수단은 철도(+케이블카), 버스, 도보. 보니까 버스는 융프라우 빼고는 어지간한 곳으로 다 보내주는거 같긴 하다. 그리고 케이블카가 유독 많은데 그건 겨울에 이놈들이 죄다 스키장 리프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기차로 갈 수 있는 곳들 위주로 적으면... 높이는 내 맘대로 층을 붙여보았다.
1 그린델발트 - 피르스트 : 피르스트까지 가면 바흐알프제 호수까지 볼 수 있다. (1층)
2 쉬니게 플라터 - 빌더스 빌 : 전망이 그리 좋댄다. (2층)
3 라우터브루넨 - 뮈렌 : 여기가 가장 높은 마을이고 더 위의 산인 쉴터호른으로 이어지는 케이블카가 있다. (2~3층)
4 클라이네 샤이덱 - 융프라우 : 여기가 끝판왕 (4층) 융프라우 말고 뮈렌에서 쉴트 호른으로 가는 경우도 꽤 있다고 한다. 쉴트 호른이 더 좋을것 같기도 한게, 융프라우는 기차타고 터널로 올라가니까 경치는 아쉽다. 쉴트 호른은 다단계 케이블카인듯. 대신 추가금액이... ㅋㅋ
5 인터라켄 - 하더 쿨름 : 안가도 되지만 인터라켄과 주변 호수가 다 잘보이는 곳이라고. (2층)
그리고 외국인들은 꽤 다양한 곳에서 자는거 같은데 의외로 벵겐이나 뮈렌까지 올라가서 자는 사람들도 꽤 있더라. 보통은 그린델에서 많이 자고 라우터에서 자는 사람들도 많은듯.
저정도 코스면 2박 3일에 다 소화 가능하다. 여기서 레포츠만 안하면. 레포츠에 큰 관심은 없으니까 나는 다 소화하고 갈듯. 가장 즐거운건 역시 이렇게 혼자서 나와 딱 어울리는 장소를 발견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런게 세렌디피티겠지. 이번 여행은 도통 준비를 안하고 움직인 탓에 세렌디피티 천지다.
남들 아무도 안내리는 작은 정거장에서 내렸다. 근처에 집도 소도 없고 차도와 트래킹하는 길 표지판 정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어딘가 애매한 둘레길에 잠시 멈춘거. 역시 아무도 없는 곳을 걷는게 기분이 좋다. 여기 등산열차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서 뭘 타도 시끄럽다. 여기서 1~2시간 걸으면 숙소가 있는 그린델발트가 나온다.
걷다가 아무도 없길래 음악을 튼다. 바로크풍의 포크싱어 재키 레벤. 내 첫번째 배낭여행인 2002년에도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걸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베토벤의 피아노 콘체르토. 음악이 바뀌니 다른 분위기가 된 것 같다. 혼자 내려오다가 아무도 안다니는 길에 빈 테이블이 있길래 거기 앉아서 빵도 먹고 음악도 듣고 일기도 쓰는 참이다. 내가 인기 작가라면 이런 곳에 와서 글을 쓰는 호사를 누릴수도 있을텐데 그냥 일기쓰기 좋아하는 여행자일 뿐이네. 애석하게도 내 일은 사람들과 둘러앉아서 얘기를 많이 해야하는 일이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한번쯤은 직업으로 가져보고 싶다. 여기서 혼자 앉아 한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다. 아직도 해가 넘어가지 않는다. 이러다가 갑자기 넘어갈지도 모르겠으나 해넘어가는 시간에 맞춰서 내려가려고 한다.
아까 사진을 찍다가 내가 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자연도 좋지만 자연에 길이 나있는 것을 좋아한다. 물길, 골목길, 기차길 다 좋다. 길이 왜 좋을까 생각해봤는데 이유가 많더라. 길은 목표를 제시한다. 따라오라는 메시지. 길은 휘기도 곧기도 한데 그 선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에 안심이 된다. 누가 나보다 먼저 걸었고 심지어 내놓기 까지 한 것이 길이니까. 길의 아름다움은 꽤나 여성적이다.